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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를 고무·찬양함
그에게 뭇매를 가할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문순   기사입력  2003/10/09 [10:19]

인터넷에서 손쉽게 행해지는 실시간 여론조사의 경우 조사의 편의성 때문인지 보기를 몇 개 던져놓고 답을 고르라는 식의 질문이 많다. 이럴 때 답변자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질문자의 의도가 훤히 보일 때나 자신이 원하는 답이 없을 경우이다. 가령 송두율 교수의 파문 때문에 실시한 '한겨레'의 여론조사는 응답자에게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① 실정법 위반 엄하게 처벌해야 
② 시대상 고려해 관용 베풀어야 

▲송두율교수     ©대자보
송 교수에 관한 거의 모든 여론조사가 이런 식이다. '처벌'이냐 '관용'이냐의 양자택일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 앞에서, 파문의 당사자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하는 것 말고 그를 '처리'할 권리가 이 사회에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거나 본인이 부인하는 간첩죄를 지우자는 것인지, 아니면 노동당 가입이 남한을 해코지한 것이라도 되는지, 송 교수가 처벌이나 관용을 받아야 할 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멀리 내다보면 대단치도 않은 일에 난리법석을 떤 사건으로 기억될 터인데, 분단체제라는 현실의 질곡에 무감각하거나 어쩔 수 없이 적응하는 소시민의 삶을 택하지 않은 한 지식인의 초상을 생각해볼 아량이 이 사회에는 없는 것일까? 
 
지금은 송 교수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가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현실이다. 어제의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위상을 하루아침에 거물 간첩으로 뒤바꾸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은 많아도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희박하다. 그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남한의 일반인이 허용할 수 있는 통념 이상으로 북한당국과 교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동안 남과 북의 '경계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자신의 자리 매김에 거스른 것이라는 비판만큼은 그에게 우호적이던 사람들에게서조차 피해가지 못하는 듯하다.

송두율 교수가 자신이 서 있는 경계를 남과 북 사이로 설정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경계는 남북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유럽, 제3세계와 서구 사회, 피식민지와 식민종주국이 중첩되어 있는 곳으로 그에게 인지되었다. 경계인이라고 하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완전한 중립 지대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자신도 자기정체성을 그렇게 규정지었지만- 송 교수 자신도 인정했듯이 경계인은 매우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그에게서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3세계 진보적 지식인의 전형인 종속이론에 매료된 민족주의자라는 위상이다.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지배-종속으로 보는 인식을 이분법에 치우친 근대적 사고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라면 경계인이라는 말이 풍기는 탈근대적인 체취와 민족주의자는 어울리기 힘들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는 그가 사전적인 정의의 경계인으로 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음을, 양극단의 체제 사이에서 어느 한편으로 조금이라도 기울어지지 않는 삶이 적어도 그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럽 한복판에 선 이방인 학자로서 서구의 지배논리와 보편주의에 그대로 수긍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그가 민족 주체를 강조하는 학문적 위상을 갖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다 북한 당국을 접하기 어렵지 않은 지리적 공간에 처한 그가 종속적 경제 발전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남한과는 대조적으로 한때 모범적인 제 3세계 국가의 자립 경제 모델로 주목받은 북한에 우호적으로 기운 것도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그의 학문적 궤적으로서는 필연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 연구에서 내재적-비판적 방법론을 주창한 그에게 정작 비판적 접근이 결여되었거나 주체사상을 탈현대철학적인 맥락이나 '동양적 문화체계'에서 이해하고자 한 점도 그의 학문적 정체성으로서는 불가피한 경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기에는 지난 37년 동안 송 교수에게 빗장을 걸어둠으로써 남한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한 당국도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최소한의 아량도 베풀지 못한 남한이 그를 친북적이라 꾸짖고 벌할 자격이 있는지?

어떻게 보면 송 교수처럼 본인의 의사와 달리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진 결과로 나타나는 경계인의 위태로운 삶, 그러면서도 남북한 양쪽에서 찬밥 대우를 받는 것보다는, 남북한 체제에 똑같은 강도의 비판을 가하며 스스로 학문적 중립을 지킨다고 믿으면서 남한 자본주의의 번영은 그것대로 누리는 태도가 훨씬 손쉽고 안전해 보일지 모른다. 진보진영에서마저 송 교수에 대한 이해나 두둔이 아닌 관용이나 포용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9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남한의 확고한 체제 우위를 목격하며 '전향'한 덕에 실정법에 저촉될 부담이 사라진 남한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안일한 풍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낡고 투박하게만 보이는 이론을 붙들고 자신의 행적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의 뭇매를 감당하고 있는 한 지식인의 비운과 대비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현재 그의 행보는 지켜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인다. 앞으로는 "한국의 실정법을 염두에 두고 살겠다"고 한 송 교수의 발언을 남한 체제에 대한 귀순으로 받아들여도 좋은지? 그가 당당한 경계인으로 살아가기 바란다면 수구초심으로 돌아왔다는 그에게 가혹한 요구일 뿐인지 가슴이 아프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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