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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2004년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교수 최후의 유고에서 네오콘 강력비판
 
안찬수   기사입력  2003/09/25 [23:50]

▲에드워드 사이드가 알-아흐람(Al-Ahram Weekly online)에 기고한 꿈과 망상(Dreams and Delusions)이란 제목의 칼럼     ©알-아흐람홈페이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며, 문명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 미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는 이집트의 주간 ‘알-아흐람’ (Al-Ahram Weekly online) 2003년 9월 21~27일자 652호 오피니언난에 ‘꿈과 망상(Dreams and Delusions))’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사이드 교수는 이 칼럼에서, 이라크 전쟁은 “미국식 사고방식이 지니고 있는 파멸적이고 겉만 번드레한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증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이나 더글라스 페이스 국방차관과 같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도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네오콘들이 좀더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현실을 자신들의 추상적이고 무지한 언어로 오만하게 대체함으로써 생겨난 섬뜩한 결과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이드 교수는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라크 침략과 미국의 대테러전쟁이란 이미 파탄이 난 대영제국에서 들여온 최악의 수입품”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무리 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근본에 있어서는 인종차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미국의 힘을 대변하는 논객이나 시사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점인데, 사이드 교수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미국식 ‘실용주의(pragmatism)' 혹은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서 철저하게 재고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월포위츠, 체니, 부시가 쓰는 식의 미국식 ‘마술적’ 사고가 모든 민족이나 언어가 따라야 할 지상의 기준으로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큰 위험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이드 교수의 칼럼을 소개한다. <옮긴이 주>


7월말, 워싱턴에서 가장 유력한 서너 명의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톰 딜레이 하원 의원(공화당, 텍사스)이 ‘로드맵’과 중동 평화의 미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가 말한 것은 이스라엘과 몇몇 아랍 국가들의 방문을 앞둔 발표였고, 방문지에서도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톰 딜레이는 아주 분명한 말로 부시 정권의 ‘로드맵’에 대해 자신은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특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실현에 대한 조항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테러리스트 국가가 될 것이다.” 톰 딜레이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테러리스트(terrorist)’라는 용어는 미국 당국자들의 담화에서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이 말이 쓰이는 상황, 이 말의 정의, 구체적인 특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스라엘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배경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 시오니스트(Christian Zionist)'로서 지니고 있는 신념이라고 덧붙였다. ’기독교 시오니스트‘라는 말의 의미에는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행위를 지지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 국가 즉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 팔레스타인 수백만 명이 어떤 박해를 받게 될지 상관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행동을 계속할 신학상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 남서부에는 톰 딜레이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대략 6천만 내지 7천만 명이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지 W. 부시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며, 그도 감화에 의해 새롭게 신앙에 눈을 뜬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성서에 쓰여 있는 것을 모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부시는 그들의 지도자이며, 2004년의 대선에서 틀림없이 그들의 표를 겨냥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부시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부시의 대통령 지위는 파멸적인 국내외 정책 탓으로 위협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부시와 부시 주변의 선거 전략가들은 한층 더 미국의 다른 지역, 특히 중서부 지역의 기독교 우파를 장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 열광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신보수주의 운동의 사상 및 그 로비 세력과 연대하고 있다)는 미국 국내 정계에서 무서운 세력이 되고 있다. 또한 슬픈 일은 미국에서 중동에 대한 논의가 바로 이런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 관련된 문제는 국내 문제(local matters)이지 외교 정책과 관련된 문제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딜레이의 선언이 만약 단순한 광신도의 개인적인 견해였거나 아무 것도 취할 것 없는 공상가의 헛소리였다면, 사람들은 곧 ‘넌센스’라고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딜레이의 선언은 권력의 언어를 체현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견해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우리가 보고 믿거나 하는 것, 때로는 행동까지 신이 직접 이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장관은 매일 집무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집단 예배를 올린다고 보도되고 있다. 좋다. 기도를 올리고 싶은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헌법은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톰 딜레이의 경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고 하는 하나의 민족 전체에 대해 그들이 국가를 만들면 ‘테러리스트’ (현재 통용되고 있는 워싱턴의 정의에 따르면, 인류의 적이다)의 국가들 만들 것이라는 공격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민족 자결을 달성하려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했으며, 그들에게 더 많은 처벌과 고통을 가하려는 일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딜레이의 입장이 지니고 있는 완전한 비인간성과 제국주의적 오만함을 한번 생각해보라. 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그이와 같은 권력자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실제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달세계에 살고 사람에 대한 지식 정도밖에 없는 주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를 규정하고 늦출 수 있으며, 앞으로도 몇 년 동안 억압과 고통을 계속해서 가할 수 있다니. 그것도 단지 그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이 아무런 증거나 중요하게 여길 이유도 없이 그에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니.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이고, 이곳 미국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로비 활동에 의해 팔레스타인 남성, 여성, 어린이들은 미국 의회에 쌓아올려진 더 많은 장벽과 방해물을 만나는 것을 견뎌야만 한다니. 

내가 딜레이의 말에서 느꼈던 것은 단지 그 무책임함이나, 자신한테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 대한 안이하고 야만스러운(uncivilised, 이 말은 대테러전쟁과 관련해서 대단히 많이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 방식뿐만 아니라, 그 비현실성 다시 말해 중동이나 아랍, 이스라엘과 관련된 정책이 논의될 때 워싱턴 당국자들이 딜레이의 견해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 비현실성이었다. 이것은 9.11 사건 이후 강렬한, 그리고 공허하기까지 한 추상화의 새로운 차원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상황을 더욱 더 부풀려서 기술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극단적인 표현을 찾게 된다는 과장법(hyperbole)이 공공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과정은 물론 부시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발표하는 ‘선과 악(good and evil)', '악의 축(asix of evil)' '전능의 빛(light of almighty)' 등과 같은 추상적인 성명은 끝이 없다. 감히 말한다면, 나는 그런 성명들이 테러리즘의 악에 대한 구역질나는 토로라고 부르겠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사회와 관련된 언어들을 순수한 그리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논쟁이라는 기능 부전의 차원으로 옮겨놓고 있다. 

세계를 향해 쏟아 놓는 근엄한 설교와 각종 선언들은 실용적인(pragmatic) 것이며, 급진주의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며, 문명화된 것이며, 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은 집행력을 지닌 미국의 정책 당국은 이곳의 정권 교체와 저곳의 침공, 그리고 또 저곳에서 한 국가의 ‘재건’을 합법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에어컨이 켜진 워싱턴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진다. 도대체 이런 방식이 문명화된 논의 기준이나 발전된 민주적 가치 기준인 것인가.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오리엔탈리즘의 담화에서 기본적인 주제는 아랍어나 아랍인은 현실에 전혀 쓸모없는 정신 구조와 언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아랍인들이 이따위 인종차별적인 헛소리를 믿고는, 아랍어, 중국어, 혹은 영어와 같은 민족어가 모두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개념은 식민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19세기에 사용된 이데올로기적인 무기(ideological arsenal)의 일부분이다. 예를 들어 토머스 카알라일에 따르면, ‘니그로’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노예 상태로 그대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에르네스트 르낭에 따르면, ‘중국인’들의 언어는 복잡하며, 따라서 중국인들은 마음이 비뚤어져 있고 그들을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타 등등. 오늘날 이따위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랍인, 아라비아어, 아랍연구자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도무지 터무니없는 말로 상당한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우익 사상가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몇 년 전 어떤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 국무부에서 아랍연구자나 아랍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한다. 왜냐면 그들은 그 언어를 배울 때 아랍에 대한 ‘망상(delusions)’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오늘날 토머스 프리드먼과 같은 지식인을 포함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동네 철학자는 모두들 비슷한 어조로 떠들어대고 있는데, 그들은 아랍인들이 자신들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신화’(myth)는 아랍의 수많은 망상 가운데 하나라고 자신들의 과학적인 해설에 덧붙이고 있다.

프리드먼이나 아자미(Fouad Ajami)와 같은 권위자들에 따르면, 아랍인들이란 단지 떠돌이나, 깃발을 들고 다니는 부족들의 느슨한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며, 하나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체하거나, 하나의 민족인 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환각적인 망상이며,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생각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곳에 없으며 하나의 민족으로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오니스트들의 신념과 동질의 것이라고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공포와 무지에서 유래하는 이런 가설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랍인들은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 없으며, 사실보다는 화려한 말을 좋아하며, 냉정하게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연민과 자기과시에 빠지기 쉽다는 비난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것은, 아랍인이 자기 자신을 고발하는 ‘객관적인’ 설명으로서 작년에 나온 유엔개발계획(UNDP)의 보고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보고서는 천박한 것이며, 깊이 있는 사색을 하지 않은 사회과학 대학원생의 논문으로,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진실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수준은 이븐 할둔(Ibn Khaldun)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친 아랍인의 비판적인 글쓰기의 전통에 비한다면 아주 수준이 낮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엔개발계획 보고서의 작성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있는 제국의 맥락(imperial context)도 논외가 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사고가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전문가들은 종종 아랍어가 하나의 언어로서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것은 논의할 필요도 없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유해하다.

하지만 미국식 실용주의의 커다란 성공과 교훈적인 대비를 찾아냄으로써 도대체 무엇이 그런 의견을 개진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현재의 지도자와 당국자들이 성실하면서도 실제적인 방법으로 현실에 대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지를 살펴보자.

지금 내가 논의하고 있는 것의 아이러니가 곧바로 증명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국의 이라크 전후 계획이다. <파이낸셜 타임즈> 8월 4일자에는 이 문제에 대한 냉담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선출직 관료인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차관과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이 두 사람이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강경한 네오콘(neo-conservatives)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들로서 이스라엘과 리쿠드당과 이상하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에 따르면, 그들이 국방부 내에서 이끌고 있는 전문가 집단은 “전부터 계속해서 이것(이라크 전쟁과 전후 처리 문제)이 ‘케이크워크(cakewalk, 아무런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르는 속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전부 60일 내지 90일이 걸릴 것이다, 확 낚아채어 찰라비나 이라크 국민회의에 넘겨주자, 그런 뒤 국방부는 이 문제에서 손을 떼어버리자, 재빨리, 부드럽게, 즉각적으로. 그 후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순종하는 ’민주적인 이라크‘일 것이다. 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물론, 전쟁이 실제로 이런 전제를 기초로 수행되었으며, 이라크가 전적으로 제국주의적 가정에 기초하여 점령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보제공자나 은행가로서 찰라비가 지니고 있는 경력은 결국 최고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담 후세인이 무너진 이후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에 대해서 굳이 다른 사람의 일깨움이 필요치 않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의 약탈(이 문제는 전령군인 미군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사회 기반시설의 완전한 기능정지, 이라크인들(균질적인 단일 집단이 아니다)의 앵글로-아메리카 군대에 대한 적대감, 치안 부재와 생필품 결핍, 무엇보다도 특이한 인간(나는 ‘인간’이라는 말을 강조하고자 한다)인 가너와 브레머 그리고 전후 이라크의 여러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앞잡이들과 병사들의 무능, 이 모든 것이 미국식 사고방식이 지니고 있는 파멸적이며 겉만 번드레한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식 사고방식의 그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바로 아랍인과 같이 열등한 의사 민족(pseudo-peoples), 더구나 결함투성이의 언어와 망상에 잠긴 것 같은 사람들과는 명백하게 대조된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현실은 결코 개인의 지배(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하에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현실이 어떤 민족이나 그 정신구조에 더욱 밀접하게 부합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상황은 경험과 해석으로 이루진 것이며, 경험과 해석은 결코 힘으로 지배할 수 없다. 또한 경험과 해석은 역사상 인류 공통의 영역이다. 월포위츠와 페이스가 만들어내고 있는 엄청난 잘못은, 결국은 그들의 추상적이고 그리고 끝내는 무지한 언어로 좀더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현실을 오만하게도 대체하려는 데 귀착한다. 그 섬뜩한 결과는 여전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언어와 현실을 미국의 힘이나 이른바 서구적 시각의 소유물이라고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민중 선동은 우리들로서는 이제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제의 핵심은 물론 제국주의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는 정의와 진보의 이름으로 사담 후세인과 같은 악당을 제거한다는 제멋대로 떠맡은(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명이다. 

이라크 침략과 미국의 대테러전쟁이라는 수정주의적인 정당화(Revisionist justifications)는 이미 파탄이 난 대영제국에서 들여온 가장 최악의 수입품이다. 그것은 기존의 담론을 조잡하게 만들며, 사실과 역사를 무서울 정도로 왜곡시킨다. 이런 사실은 미국에 거주하는 영국인 저널리스트들이 공언하고 있다. 그들 저널리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원주민들이 불결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보일 때 꾸짖어줄 권리가 있다고. 그리고 왜 자신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가 하고. 왜냐면 5백년에 걸쳐 제국을 통치해왔으며, 지금에 와서는 미국인들이 그 뒤를 이어 통치하고 있는 머리가 덥수룩한 원주민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그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며, 원주민들은 미신과 광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 원주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죄 많은 폭군들이며, 자신들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그 일을 맡은 이들이라고.

만약 이들 변덕스러운 저널리즘의 곡예사들(너무나 많은 주인에게 봉사해왔기에, 그들에게는 도덕적 태도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은 때로는 마르크스나 독일 학자들을 인용할 수도 있을 터인데--그들 스스로 자신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다고 자인하고 영어 이외의 언어나 학문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하다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랬다면, 지금도 훨씬 영리하게 보였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근본에 있어서는 인종차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힘을 대변하는 논객이나 시사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의 뿌리는 더욱 깊으며 더욱 흥미롭다.

온 세상 사람들이 사상과 어휘의 혁명이라는 곤경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정책 당국에 의해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실용주의'가 보편적인 기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미 앞서 내가 언급했던 이라크의 예처럼, 실제로는 거기에는, 예를 들면, ‘현실주의(realism)’ ‘실용주의(pragmatism)’와 같은 말의 사용, 혹은 ‘세속적(secular)’이라는 말이나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의 사용에는 모든 종류의 차이나 이중 기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철저한 재고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그 후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에 순종하는 ’민주적인 이라크‘일 것이다.”라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처방에 봉사하기에는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다종다양하다. 이런 논법은 현실이라는 시험을 견뎌낼 수 없다. 의미는 하나의 문화에 다른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만이 사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비결을 소유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랍인으로서(그래 이것은 인정하자) 나는,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우리(us)'에 대해서 몇몇 슬로건이 너무 과도하게 선전되는 것과 논의나 논쟁 혹은 의사 교환을 처리하는 ‘우리(our)’의 방법을 너무 지나치게 허용해왔다. 

오늘날 아랍인이나 서양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빠지는 큰 잘못은 세속주의나 민주주의라는 말을 엄밀한 논의나 조사도 하지 않고 마치 누구나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복역수를 지니고 있는 나라다. 사형 집행 되는 자의 수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다.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도 일반인의 투표에서 이길 필요는 없지만, 대신에 적어도 2억 달러 이상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이 어째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좀더 정확하게 논지를 펼지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이라고 하는 몇몇  엉성하기 짝이 없는 언어나 ‘테러리즘’ ‘후진적’ ‘급진주의’와 같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아무런 회의도 없이 논의의 중심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아주 큰 위험은 월포위츠, 체니, 부시가 쓰는 식의 미국식 ‘마술적(magical)’ 사고가 모든 민족이나 언어가 따라야 할 지상의 기준으로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그리고 만약 이라크가 중요한 한 가지 사례가 된다면, 그런 일이 적극적인  논의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분석도 하지 않은 채 허락해서는 안 되며, 미국 정부의 힘이 그토록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려운 것이라고 겁먹어서는 안 된다. 중동 문제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아랍인, 이슬람교도, 이스라엘인, 유대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논의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강하게 권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이런 논의에 참가하는 것이며, 가치(values), 정의(definitions), 문화(cultures)의 장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결코 몇몇 워싱턴 관리들의 소유물도 아닐뿐더러, 몇몇 중동의 지배자들의 책임도 아니다. 인간의 활동에는 창조되고 또 재창조되는 공동의 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결코 제국의 떠버리들이 은폐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 원문보기  http://weekly.ahram.org.eg/2003/652/op1.htm

* 문학비평가이자 팔레스타인 대의(大義)를 위한 미국내 굴지
의 대변인이었던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수 에드워드 사이드가 25일 오전 별세했습니다. 향년 67세. 따라서 본문은 그의 마지막 유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었던 사이드는 1935년 당시 영국통치하의 팔레스타인  영토였던 예루살렘에서 출생했으나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카이로에서 보냈고,  성년 시절 거의 전부를 미국에서 지낸 그는 1957년 프린스턴대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1960년과 1964년 하버드대에서 각기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와  존스 홉킨스 및 예일대에서 강의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오리엔털리즘'을 비롯해 아랍-이스라엘간 분쟁을 다룬  '팔레스타인 문제들'(1979)과 '마지막 하늘 뒤에'(1986), 음악에 관한 저서인 '뮤지컬 일레버레이션즈'(1991)와 '문화제국주의'(1993)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이 통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던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잘못 대접하고 있다며 이스라엘을 계속 비판해 왔스며, 관계자에 따르면 최소한 1990년대 초부터 백혈병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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