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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귀' 가졌다는 정동영, 100분토론 점수는?
[하재근 칼럼] 말 많은 것보다 현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치인돼야
 
하재근   기사입력  2007/10/20 [14:14]
정동영은 100분토론에 나와 자신을 ‘큰 귀’를 가진 정치인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건 좋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상가 같다면 정동영은 정치인 같다. 정동영의 그런 정치인스러운 점이 내가 과거에 정동영을 좋게 봤던 이유였다. 백성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제 좋다는 말만 반복하는 이념형 지도자보다 현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치인이 낫다.
 
2006년부터 정동영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정치인스러운 건 알겠는데 도무지 지도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통째로 그랬다. 국가경영에 얼마나 아무 생각이 없으면 허구헌날 당내 문제로만 지지고 볶았겠나.
 
이번에 이른바 경선이란 것에서도 그랬다. 최대 이슈가 내부 문제였다. 옛날에 민주당에서 지도부를 뽑을 때 주요 인사들이 공동체의 비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무현에 대한 배신감을 어떻게 하면 보다 자극적으로 절절하게 표현할까에만 전념하는 것 같아서 ‘찌질당’이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신당 경선도 한 마디로 ‘찌질찌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동영은 오랫동안 당내분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강력한 국가적 비전으로 이를 돌파하지 못하고 언제나 주춤주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것이 기대를 실망으로 바꿨다. 실망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에 100분토론에서 보여준 모습은 나름 괜찮았다. 70점 정도는 줄 만하다.
 
-대북안보문제-
 
첫 머리를 대북문제로 시작했다. 이 주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동영의 낮고 차분하며 자신감 있는 어조가 돋보였다. 티비 뉴스 진행자 출신이라는 경쟁력이 십분 발휘됐다. 물론 말하는 내용 자체도 지당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외적인 이미지와 상승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다.
 
교육개발원에서 나왔다는 사람은 서해교전 유족 언급으로부터 말문을 열었는데 황당하다. 교육개발원 출신이 교육격차, 사교육비를 걱정해야지 왜 냉전 선동을 하나. 방송사에서 질문을 배급했을 수도 있는데 그 후의 질문 논조를 보면 본인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 기관에서 교육정책에 관여하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가 없다.
 
군인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건다. 국가는 그 군인을 위무하고 국민은 군인을 존경하며 감사해한다. 그것이다. 그 이상이 되어선 안 된다. 신라가 백제와 싸울 땐 신라 군인은 백제와 싸우는 것이고, 신라가 고구려와 싸울 땐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할 수도 있는 거다. 백제와 동맹을 하려는데 ‘그럼 여태까지 백제와 왜 싸웠단 말인가! 전몰자들은 개죽음을 한 것인가!’ 이런 선동은 백해무익하다.
 
6.25 때 전사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반도 평화를 유예할 이유도 없고, 남북평화선언을 하기 위해 현충원을 갈아엎을 필요도 없다. 군인은 그 순간, 그 정세에서 국가에 충성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정세가 달라지면 임무도 달라진다. 군인의 죽음의 순간을 기준으로 국가의 외교안보 정책이 고착될 이유가 없다.
 
평화가 시작되면 NLL이든 뭐든 대립선이 완화되는 건 당연한 거다. 이 당연한 걸 가지고 토론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우리 처지도 참 딱하다.
 
-개성공단·남북경협-
 
패널들은 개성공단의 부실을 부각하려 애썼다. 정동영은 이에 대해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논법은 좋다. 긍정적이다. 언제나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좋은 법이다.
 
북한의 노동·토지와 남한의 자본·기술이 만나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생각은 백번 지당하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일본과 독일의 기술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중국이 뒤쫓아 오고 있다. 기술은 없어서 경쟁력이 안 되고 저임금은 아무도 안 받으려 해 경쟁력이 안 된다. 70년대 이래 한국경제를 지켰던 경쟁력 요소는 사라져가는데 선진국형 경쟁력은 아직 안 생겼다.
 
이 상황에서 동남아 노동자 수입해 달러를 동남아로 보내고, 공장을 중국에 보내 한국인을 실직자로 만들어야 하는가? 바로 휴전선 이북에 한국경제에 기적을 가져다줬던 70년대의 그 전설적인 노동자군단과 같은 DNA를 가진 집단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노동을 채용해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고, 북한은 여기에 동참해 경제를 개발할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다. 상호이익의 윈윈구도인 것이다. 이 구조가 안정되면 북한이 중국으로 흡수될 염려는 사라지며, 안보불안이 생겨날 이유도 사라진다. 자고로 서로 이익을 보는 사이는 절대로 틀어지지 않는 법이다.
 
개성공단 25개 업체 중에 13개 업체가 2년 만에 설비증설 200%에 나섰다는 말은 고무적인 뉴스다. 패널은 이익률 가지고 따졌는데 이는 정말 무지한 시각이다. 지금 한국 기업이 사상최대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데 왜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는가? 투자를 안 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개발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투자기근을 겪고 있는 중이다. 나라 사정을 고민하던 사람이라면 ‘설비투자증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열려야 한다.
 
더군다나 신생 공장들에 이익률 잣대를 들이대는 용감함은 정말 위험하다. 생각해보라. 이 잣대를 들이대면 지금 우리나라엔 자동차산업과 반도체산업 등이 없어야 한다. 구멍가게와 산업이 다른 것은 구멍가게는 그날 그날 장부를 보며 일희일비하지만 산업은 10년, 20년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요즘 한국경제는 이런 장기적 투자전망이 사라지면서 기업이익률에만 매달리고 그에 따라 주가만 저 혼자 올라가고 있다. 도대체 이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있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나.
 
정동영이 끝까지 희망적으로 받으면서 부품소재산업 육성까지 언급한 것도 좋은 인상을 줬다. 정 후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중국한테 200억 달러 흑자를 보는데 일본이 우리한테 250억 달러 흑자를 본다. 우리가 일본에게 부품소재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북한한테 우리가 부품소재를 공급할 수 있다면 북한에서 조립공장이 잘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우리는 돈방석에 앉게 된다는 구조인데, 그 경우 우리 부품소재산업이 활발히 돌아가면서 생산성이 향상돼 국제경쟁력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브릭스(BRICs, 2000년대를 전후해 빠른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신흥경제 4국을 일컫는 경제용어-편집자 주)가 뜨는 걸 우리한테 위협이라고 걱정할 일이 아니게 된다. 그들이 뜨면 뜰수록 우리 부품소재를 필요로 할 테니까. 이렇게 가야 한다.
 
-경제-
 
정동영이 중산층사회를 복원하겠다고 하자 패널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동영은 국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불만족을 말했다. 이것은 반가운 일이다. 참여정부는 언제나 수치만 나열하며 국민들에게 ‘경제는 좋아, 너희들은 지금 잘 살고 있어’라고 윽박지른다. 정동영이 역시 보다 정치인답다.
 
한나라당 연구소 출신이라는 패널은 남북경협으로 어떻게 우리 경제의 문제를 풀 수 있느냐며 경제 내부적 요인과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경제 내부적 문제는 투자고갈, 분배시스템붕괴, 각 경제주체의 이기심 극대화(사회적 자본 고갈 · 자산 및 이윤, 이익 내부화 성행) 등이다. 한나라당의 정책은 이 문제들을 모두 심화시킨다. 참여정부의 정책방향도 마찬가지다. 고용 없는 성장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나라당과 참여정부의 자유화, 한미FTA, 서비스업 집착은 모두 (질 좋은) 고용이 없는 성장을 초래할 것이다.
 
한미FTA라는 중차대한 이슈가 왜 대선후보 토론에 언급되지 않는지 황당하다.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이 문제를 걷고 보면 정동영은 차별 없는 성장과 고용 있는 성장을 주장했다.
 
차별 없는 성장에선 육아와 보육, 공교육, 직업전환교육, 평생교육 등이 강조됐다. 좋은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하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말보다 유독 정동영의 말이 좋게 들리는 건 대선주자 중에 교육정상화에 두 번째로 근접한 사람이 정동영이기 때문이다. 문국현 쪽에서 들리는 교육관련 얘기들은 고만고만하다.
 
특히 평생교육은 문국현이 가장 강조하는 것인데 이를 실현할 토대를 만들 공약은 권영길 다음이 정동영이다. 한국인이 평생 동안 교육다운 교육을 못 받는 것은 여기가 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에서 필요한 건 간판이지 교육이 아니니까. 이 구조를 정동영이 두 번째로 잘 이해하는 것 같다.
 
고용 있는 성장이란 중소기업 정책, 고기술, 대북경협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말한다. 여기선 특히 중소기업이 강조됐다. 당연하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변변한 일자리가 생긴다.(중소기업 종사자수 노동자의 약 80%) 중소기업이 저절로 사나? 고기술이 있어야 산다. 기술이 없으면 경쟁을 못하니까.
 
중소기업 부분에서 시민논객은 가장 큰 문제로 어음제도를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동영은 단가인하문제로 받았다. 이때 속으로 무릎을 쳤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기업이 단가를 후려치니까 중소기업이 살아날 수가 없다. 이것이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데 이걸 못하게 하려면 대기업의 영업행태를 규제해야 하고, 그러려면 주주, 즉 자산가들의 소유권 행사를 제약해야 한다. 정동영에게 그럴 정도의 강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난 무조건 정동영을 찍을 것이다. 역대 한국 지도자 중에서 이런 걸 제일 잘 했던 사람이 박정희였다.
 
정동영은 제조업을 몇 차례 언급했다. 서비스업은 정동영 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말로 매우 반가운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비스업 집착은 공포스럽기만 하다. 제조업을 육성해야 일자리가 생긴다. 서비스업이 아무리 발전해봐야 일반 서민이 로펌에 들어갈 건가, 투자금융사에 들어갈 건가.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나 서빙하게 된다.
 
항공우주산업도 언급했는데 이것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한국 산업발달사에서 언제나 나에게 한으로 남았던 것이 자동차에서 끝났다는 점이다. 유도탄개발팀은 전두환이 해체해버렸고, 강력한 산업파급효과를 과시한다는 항공우주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 박정희가 육성한 산업으로 아직까지 먹고 살고 있다. IMF의 공격을 받고도 이나마 버티는 것은 다 박정희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것을 육성하지 못하고 있다. 항공우주산업은 그 다음 것의 후보 중 하나로 내 개인적인 ‘로망’이었다.
 
-교육-
 
교육개발원에서 나왔다는 패널은 정작 교육부문에선 별로 할 질문이 없다며 교육이슈를 덮어버렸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인지 모르겠다. 평소에 뉴스를 잘 안 보고 특히 정치관련 기사는 거의 안 본지 오래라 정동영의 교육공약을 자세히 몰랐었다. 이 기회에 당사자의 육성으로 교육공약을 들으려 했는데 패널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전에 내 손에 전달된 정동영 교육정책이라는 팜플렛엔 국립대평준화에 근접하는 방향이 있었다. 이것은 정동영 측이 한국 교육의 핵심적인 문제지점을 대학입시로 본다는 뜻이다. 권영길에 이어 두 번째로 정확한 시각이다. 참여정부와 이명박은 엉뚱하게 중등 공교육 정상화가 문제해결의 관건이라며 헛발질을 하고 있다.
 
정동영이 고등교육예산 두 배 증액을 말했는데 이것도 바른 방향이다. 고등교육예산이 두 배가 되면 딱 OECD 평균 수준이 된다. 남보다 더 앞서나가야 하는 이때 평균에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거라고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다.(사실은 이왕 증액하는 김에 세 배로 하는 것이 좋겠다. 재정? 무조건 되게 한다는 정신으로 하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옛날에 밥을 굶으면서도 경부고속도로를 지었던 나라다.)
 
한미FTA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이것이 체결되고 투자자와 소비자가 자유로워질 때 어떻게 중소기업, 제조업을 육성하며 대학입시를 규제하겠는지에 대한 복안이 제시되지 않았다. 특히 한미FTA 협상에서 교육개방은 유예됐을 뿐인데 장차 이것이 실현되고 참여정부의 국립대 법인화 정책과 조합되면 정동영의 입시규제 정책은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다. 싫건 좋건 이명박식 대학자율화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참으로 교묘한 덫을 놓았다.
 
정동영은 마지막 발언을 서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물에 술탄 듯이, 술에 물탄 듯이 끝냈다. 이런 건 좋지 않다. 지금 원하는 건 파탄을 끝낼 희망의 비전, 확신의 지도자, 강력한 리더십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표류하는 배의 키를 잡아줄 선장이다. 정동영은 경제활성화와 국가선진화, 미래, 행복 등의 메시지를 보다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왜 못 살게 되었는가를 국민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문제지점을 정확히 밝혀야,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나. 민생파탄의 15년 역사에 자신이 10년을 함께 했으니 거기에 대한 사과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사과가 아니라 사죄를 해야 한다. 참여정부까지 대표해 사죄하고 변화를 약속해야 한다.
 
한나라당 탓이 아니라 자기 탓부터 하고, 이제는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강력한 지도력을 보일 때 민심이 돌아설 것이다. 자기 탓을 하며 자유화라는 파탄의 고리를 적시하면 이명박의 정책은 정확히 그것을 심화시키는 쪽에 놓이기 때문에 선명한 각이 저절로 형성된다.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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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0/20 [14: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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