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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에게 4.19혁명기념일은 '소풍가는 날?'
[기자의 눈] 프랑스 고용법안 투쟁은 성공,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은 외면
 
황진태   기사입력  2006/04/15 [07:47]
4·19혁명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세대로써 그 당시 민중의 민주화 욕망을 읽거나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문헌과 함께 종종 당대를 살았던 선배들로부터 육성으로 듣는 방법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노년의 한 깐깐했던 걸로 기억되는 수학선생님은 정년을 앞두고서 미적분 수업을 제치고 학생들에게 4·19혁명을 얘기 해주셨다. 당시에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자리 잡았던 서울대 문리대에 재학 중이었던 선생님은 정작 자신은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토로했다.

내가 다녔던 경동고는 성북구 보문동 근처로 신설동의 대광고와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4·19 관련 문헌을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선생님은 당시의 대광고 학생들은 시위에 참가하여 깡도 있고 멋있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서 철없이도 그러면 우리 학교는 뭐했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후에 조정래 선생의 <한강>을 읽으면서도 대광고 학생들이 활약이 소상히 묘사된 것을 보면서 지금의 대광고 학생들이 멋있는 선배를 두고 있음에 부러워했다.

어쨌든 선생님은 한 시간 동안의 4·19혁명 얘기를 당시에 문리대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고 시위에 나서진 못한 자신은 비겁했다면서 우리에게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 뒤 나는 수능을 앞두고 버거워 하던 당시에는 경험하기 힘든 가슴 뜨거운 수업으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4·19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대학에서는 의례 4·19혁명 기념 등반대회를 어김없이 개최한다. 그런데 이 혁명의 의미를 요즘 학생들에게는 심히 퇴색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얼마 전 정치외교학과의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붙어있는 한 대자보에는 정치외교학과가 4·19혁명 기념일 등반대회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 날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갈 것인가를 두고서 '아주 민주적인 방법'인 투표를 통하여 압도적인 득표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는 결과가 떳떳하게 씌어져 있었다. 민주적인 절차를 이용했으니 비난하기도 뭣하다. 그런데 정치외교학과와 상관없는 나는 왜 창피함을 느꼈을까.

꽃도 피고 날씨도 화창하고 소풍가는 건 자유다. 그런데 막연하게 추측해서 사회에 대한 고민이 가장 절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이 다른 날도 아니고 4·19 혁명 기념 등반 대신에 '소풍'을 간다는 발상은 사회과학도로서의 존재의식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개념 없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학교도 이럴 바에는 휴강을 하면서까지 산에 올라갈 게 아니라 강의를 하는 것이 낫겠다.      

중앙일보는 최근 프랑스의 학생, 노동자들의 고용법 반대 투쟁의 성공에 대해서 "변화 거부하고 현재에 안주한 프랑스"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놓았다. 반면 한겨레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대중의 힘에 꺾인 프랑스 최초고용계약제"라는 사설을 내놓았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이 사회를 보는 눈은 이 상반된 두 매체의 지향점에서 어디에 가까운가.

3년 전 프랑스의 68혁명과 한국의 4·19혁명을 비교하는 세미나를 해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두 혁명 동안의 결과에 대해서 뚜렷이 내리지 못했는데 3년이 지나 이제서야 뒤늦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듯하다.

68혁명의 관성이 남아있는 프랑스는 이번 투쟁의 승리를 통하여 또다시 시민사회의 건강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4·19혁명 기념 등반을 '소풍'으로 바꾸는 센스와 부정적 여론에 의한 비정규직 반대 총파업의 실패를 좌시 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는 4·19혁명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한 노년의 교사가 후회했던 40년의 시간을 또다시 반복 체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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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15 [07: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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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6/04/23 [12:23] 수정 | 삭제
  • 프랑스에는 한국과 같은 권력의 나팔수가 없는 것도 한 요인이 될 것 같군요.
    있다고 해도 권력과 자본의 시녀인 우리 언론과는 좀 다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