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의 느긋하게 세상보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제국의 지층, 억누를 수 없는 다중의 웃음소리
[책동네] 조정환의 <제국기계비판>, 다중의 주체성과 운동에 관한 고찰
 
벼리   기사입력  2006/01/15 [18:31]
웃음을 수반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전제(專制)의 시작이거나 반복되는 검열과 감시의 히스테리일 뿐이다. 그래서 맑스가 『선언』을 기초할 때 들었던 그 <조종(弔鐘)소리>는 전세계 부르주아들에게는 공포의 시작이었지만 막 성장하던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유쾌한 사티로스극의 서막을 알리는 웃음소리였다.
 
전율과 폭소, 전복과 전유의 기쁨은 세계가 한 순환을 마감했음을 의미하는 공통의 악보 위에 기입되는 음표들이다. 거기서 형성되는 긴장과 굴절된 음들의 기묘한 조합들이 세계사적 사건들을 일의성의 지반 위에 펼쳐 놓는다.

▲ 조정환 지음, <제국기계 비판>     © 갈무리, 2005
부르주아들은 이 경쾌한 리토르넬로를 견디지 못한다. 기계가 멈추고 지층이 파열되는 순간, 무대는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득 메워지고, 들끓고, 기민해지며, 조우하는 힘들이 하나 낭비됨이 없이 자기가치화의 역능에 이르기까지 고양된다. 혁명, 하나의 삶.

조정환의 『제국기계비판』은 이 삶의 기록이며 악보다. 넓게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라깐돈 정글, 좁게는 한반도와 주변국들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또는 느리게 이동하는 다중들의 리듬을 따라간다. 조정환은 이러한 <지적 모험>을 이미 그의 다른 저서 『아우또노미아』에서 밝힌바 있다. ‘버츄얼리즘’(virtualism). 이것은 실재와 가까우면서도 가상과 일정한 힘을 공유하는 다중의 덕 윤리이며 정치학을 의미한다. <virtual은 virtue와 마찬가지로 ‘남자/인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하며 ‘힘’을 뜻하게 된 virtus에 그 어원을 둔다. virtual은 효과상에서 실제적이란 뜻이며 실제적 효과를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485)  이러한 다중의 정치학과 덕 윤리는 <정보화로 나타나는 지배의 새로운 형태에 대응하고> 거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버츄얼리즘이 향하는 제국과 대항제국의 버츄얼리티는 맑스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가 미완으로 남겨 놓았던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 속에 이미 이 통찰이 존재한다. 따라서 네그리와 더불어 조정환은 『자본론』보다는 『그룬트리세』와 『초고』에 주목한다. <20세기 맑스주의 역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아니 외면되어 왔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맑스의 이론들 중의 하나가 포섭(subsumption)이론이다.『그룬트리세』(Grundrisse), 『1861-1863년 경제학 초고』를 포함하는 자본론 연구 과정에서 맑스의 핵심적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포섭론은 『자본론』 서술과정에서는 제외되었다>(27)  맑스가 충분히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쉽게 간과되어 버린 ‘포섭론’은 사실상 자본 운동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역능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자본론』 속에서는 이 흔적이 ‘가치론’에 녹아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맑스의 정교한 분석은 그 자체로 포섭론의 자본운동으로의 번역인 것이다. 여기서 필요노동은 잉여노동에 비해 상세히 서술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후자를 능가한다. 필요노동은 프롤레타리아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며 항상 잉여노동과 대립하고 그것을 위협한다. 필요노동을 극적으로 줄여가려고 시도하는 자본의 노력 속에는 자신의 생명줄과 같은 잉여가치에 대한 파괴적 과정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필요노동은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잉여가치와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무덤을 파면서까지 줄여야 할 대상이지만 노동의 입장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자기가치화의 주체다. 따라서 <전자는 이룰 수 없는 모순된 꿈이지만 후자는 하나의 현실적 경향이다>(102).

자본의 이룰 수 없는 꿈은, 그러나 현재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것은 현실적 경향으로서의 필요노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 폭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제국이 기반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이며 제국 그 자체는 현실에 기생하는 공허한 스펙타클일 뿐이다. 제국의 지층 아래 다중의 역능은 필요노동을 통한 자기가치화를 전복의 가능성으로 감지한다. 이때 제국은 한낱 위기의 징후이며 탈지층화를 경유해서만 완전해 질 수 있는 수동적 정념의 산물, 공포와 독재가 유일한 희망인 암적 유기체다. 다시 말해 <지구제국은 다중과의 적대를 피할 수 없으며 다중의 저항, 탈주, 구성의 운동에 의해 부단히 위기에 처한다>(146).

실제적 포섭의 시기에 다중의 저항에 떠밀린 자본은 위기에 처한 구성양식을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 초국적 자본의 도주선 위에 형성한다. 이 도주선은 다중의 소통과 협력을 통한 생산력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므로 주체로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 <자본의 생산적 기능은 끝났다. 자본은 사회적 노동협력체를 낡은 가치관계에 종속시키는 순수 권력으로 현존한다>(379). 소통과 협력의 구성을 통한 생산력 전체는 이제 다중의 수중에 떨어진다. 자본이 죽음의 도주선을 타고 떠난 자리, 수 천의 고원 위에 형성되는 이 주체성의 공명은 <사회 전체에 산포되어 있으며 그들의 생산력은 그 개별적 구성원들의 노동력의 합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한 협력적 생산력으로 나타난다>(220). 국가와 대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정치는 이 새로운 주체성 앞에 불필요한 잔여로 드러난다. 자본 운동의 마지막 잔여물을 쓸어버리는 전복의 활동은 <다중에 의한 공통제의 직접적 생산>을 <연합과 자치>를 통해 펼쳐낸다. 

이 연합과 자치의 주체성은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경제적 공통항을 가진다. 비물질적 노동은 소통과 협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자본에게 잉여가치 수탈의 광범위화이기도 한 이 확대과정은 역설적으로 자본의 위기를 첨예화시키는 중요한 독립항으로 작동한다. 양적․시간적 척도로 잴 수 없는 비물질적 노동은 자본의 시공간을 왜곡시키고 거대한 구멍을 뚫어 놓는다. 자기가치화가 치명적인 이유는 이렇게 미묘한 지점에서다. 게다가 비물질적 노동을 통한 자기가치화는 다중의 공통 역능을 증대시키고 기쁨을 산출한다. <오직 가변자본으로 배치됨으로써만 가치화할 수 있었던 노동력이 이제 광범위한 소통관계 속에 포섭되면서 자기가치화의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사유화의 행위를 극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실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철저하고 심오한 공통성(commonality)이 구축된 적은 없었다>(445-6).

다중의 활력은 여기서 탄생한다. 공통성은 소통의 협력체, 비물질적 노동의 장소다. 그렇다고 해서 다중이 어떤 전체성 속으로 용해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성 속에서는 활력의 펼침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중은 특이성들의 배치, 아상블라쥬, 혹은 별자리이다>(475). 배치와 아상블라쥬로서의 다중의 협력은 이렇게 해서 점점 언어적이고 지적인 일반지성에 접근한다. 탈근대적 역설이 발생한다. 다중의 두뇌와 몸이 이제 생산수단인 것이다.
 
이 생산수단은 전적으로 다중 자신의 일반지성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은 본원적 축적기의 폭력적 탈취 이후 처음으로 생산자와 결합된다. 주권적 정치의 조종이 울린다. <삶과 분리된 것, 삶을 대상화하는 것으로서의 주권적 정치와 삶에 내재하는 삶으로서의 정치가 하나의 장소에서 대립한다. 다중의 일상적 삶이 세계를 생산하고 혁신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주권체에 합성될 것인가(타율)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것인가(자율)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되는 것이다>(476-7). 실제로 코뮤니즘은 이 전장 속에서 탄생하고 지속되며, 또는 지속되어 왔다.

코뮤니즘의 시간 속에 다중의 주체성은 생산과 저항, 탈주로 수렴된다. 첫째, 생산이 곧 정치인 탈근대적 상황에서 생산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며 사유화가 아니다. 둘째, 생산의 공통성은 착취의 시도를 비웃는다. 기생적 욕망인 착취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공통성의 양식은 따라서 저항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셋째, 이러한 주체성의 생산은 근대적 훈육과 탈근대적 통제의 판옵티콘을 파괴하고 탈주한다. 그러므로 <생산, 저항, 탈주는 오늘날 제국을 전복하고 대항제국을 건설하는 다중의 주체적 운동의 주요한 양태들이다>(479).

그러나 다중의 운동은 국가 구성체를 향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이행이긴 하되 한 지점과 다른 지점을 잇는 방식, 하나의 파괴와 더불어 곧장 다른 하나의 전체가 탄생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주권적 구성을 탈구시키면서 현재/여기 일상에서부터 이념의 차원까지 잠재된 전복이다. 따라서 버츄얼리즘은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반혁명의 도구였으며 commune은 자신의 고유한 역능을 국가 체제 실험의 수단으로 양도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역능 외부에 어떤 대상도 두지 않는 다중의 고유성이 코뮤니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중의 활력, 즉 코뮤니즘의 잠재성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협력과 공통성의 무한한 자기가치화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긍정과 확신은 그저 잠잠하게 도래하지 않는다. 제국의 평면은 코뮤니즘의 들끓는 시물라크르들을 구획하고 재영토화한다. 따라서 <이 희망은 유토피아적이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이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오직 비참을 강제하는 전 지구적 전쟁질서에 대항하는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전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82).

삶은 항상 재개되는 혁명인 것이다. <언제나 전략에 있어서 적들을 앞서갈 것>(F. Guattari)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01/15 [18:3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박남석 2006/01/31 [15:33] 수정 | 삭제
  • 이 기사에서 한문장을 보자
    "부르주아들은 이 경쾌한 리토르넬로를 견디지 못한다."
    이게 영어 문장인가, 아프리카 언어로 된 것 일까?

    글쓴 이보다 가방끈 짧은 사람은 보지 말라는 건가
    그래서 안 읽고 이렇게 한마디 하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