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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이상한' 문학성과 왜곡
'임을 위한 행진곡',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가사의 변신, 변용 또는 왜곡
 
정문순   기사입력  2021/03/24 [09:52]

 

달포 전 세상을 떠난 노나메기백기완 선생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떼어놓을 수 없는 분이다. 선생은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의 겨울에 <묏비나리>라는 장시를 세상에 냈다. 이 시에는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권력의 폭압에 맞서다 스러진 민중의 처절한 투쟁을 춤사위에 비유한 이 시를 개사하고 곡을 붙인 노래가, 1982년에 나온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담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사실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원시의 개사는 황석영과 김종률이 담당했다. 선생의 서거와 더불어 이 노래에 얽힌 일화도 이제는 전설이 될 것이다.

  

<묏비나리>에서, “먼저 간 투사들흐느끼는 소리로 산 자 또는 함께 산화한 동지들을 독려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묏비나리> 일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이 대목에서 태어났다. 원시와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점이 뚜렷이 잡힌다.

 

원시가 망자의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는 데 반해 노랫말은 첫 소절에서 망자로 느껴지는 목소리가 나오다 돌연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산 자의, 아니 산 자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나타난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화자가 살아 있는 자라고 고쳐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원시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원시의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를 변용한 것이다. 단어 몇 개로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패배만 나타내는 데 그친 원시의 의미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보탬으로써 비극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노랫말은 세월은 흘러가고 산천은 안다까지 줄곧 화자가 산 자인 양 느껴지는 목소리로 진행하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에서야 다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느끼게 한다. 그리 되면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두 목소리는 모두 망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니 가사 전체가 망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번진다. 노랫말의 목소리는 망자인가. 산 자인가.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은 원시의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을 각각 변용한 것이다. 원시에서 두 대목은 본디 떨어져 있었지만, 노랫말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고 동지는 간 데 없고처럼 산 자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 들어감으로써 이런 어려움이 빚어진 것이다. 노랫말은 산 자와 망자의 말이 온통 뒤섞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억지스러울망정 죽은 자의 목소리로 관통한 것일 수도 있다. 원시가 망자의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으니 노랫말도 그것을 따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혼란스러움을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혼란은 노랫말의 의미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지경에서 더 극심해진다. 가령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앞과 뒤 구절의 의미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다. 동지는 죽고 깃발만 나부끼는 엄혹한 상황과, 흔들리지 말자고 하는 의연한 결의는 순리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 극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런 결심이 곧장 나올 수 있다면 객관적 조건을 깡그리 무시한 관념적 인식의 소산에 가깝다. 이는 원작자의 책임이 아니며, 원시에 없는 구절(“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과 원시의 구절을 따온 것(“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을 엉뚱하게 봉합하면서 생긴 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은 원작 시를 이리 저리 비틂으로써 의미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민중가요의 애국가이자 불멸의 절창이라는 평가를 지금까지 받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아름다운 가락에 힘입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사가 기여한 부분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사가 원시를 망쳤다는 평가가 사람들의 입에서 왜 나오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백기완의 원시가 아무리 흠을 내도 생채기 나지 않을 정도로 워낙 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무수하게 쏟아진 1980년대 운동가요들 중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만한 문학성을 갖춘 것은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불렀으면서도 가사 흐름이 이상하다고 하는 말은 왜 거의 나온 적이 없는지는 규명해 봄 직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운동가요는 혼자 조용히 부르기보다 대중 집회에서 다함께 부를 때가 많다. 가사가 의미적으로 무리 없이 이어지는지 찬찬히 따져볼 겨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근본적인 속성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일 작가 서경식이 말한 대로, 음악이 가진 현실 증폭의 힘과 연관지어볼 수 있는 것이 이 지점이다. 음악은 그 특성상 현실을 왜곡하거나 실제 이상으로 부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경식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나치 집단에게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들어 이 현상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독재자들은 음악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했다. 그들이 음악적 취향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음악을 무시하거나 권력 유지나 확대에 음악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권력자는 없었다. 권력이 군중을 선동하는 동원 행사를 치를 때나 권력자의 선동 연설 때나 음악이 빠진 적은 없었다. 권력자는 언어의 논리성을 비틀거나 뛰어넘는 음악의 무서운 역량을 간파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쏟아진 무수한 건전가요, 심지어 독재자 자신이 직접 곡을 짓기까지 한 노래들이 떠오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노랫말이 앞뒤 연결이 잘 되지 않거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더라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독려하는 가사가 가락을 타면서 증폭시킨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를 호명한 이가 산 자인지 망자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비슷한 사례가 또 다른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이다. 가수 안치환이 대학 시절 지은 이 노래 가사는 박영근 시인의 솔아 푸른 솔아등 그가 활동 초기에 쓴 시들에서 군데군데 뽑아 쓴 것이다. 구절을 갖다 쓴 것뿐 아니라 가사에 나오는 어머니의 상징도 박영근 시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어머니’, ‘누이의 그것과 같다.(김이구) 이를 차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빌려 썼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에는 박 시인은 자신의 시를 뽑아 노랫말로 써도 좋다고 미리 허락한 적도 없고 시인과 이 노래의 관계가 밝혀진 것도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던 1980년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솔아 푸른 솔아에는 백제6’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시는 폭압적 역사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이 원통하게 목숨을 잃고 시신도 거두지 못한 가족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이다. 박영근의 백제연작시들은 직접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을 노래한 시들이지만, “오월의 고통”(꽃들)으로 상징할 수 있는 당대 민중의 한도 포함하고 있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맛비 울다가는

 삼 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 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잎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로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솔아 푸른 솔아. -백제6부분, 박영근 전집1, 박영근전집간행위원회, ()실천문학, 2016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 첫 소절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은 원작 시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난감함을 감당할 수 없다. 불과 한 문장에 불과한 첫 소절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전체 노랫말의 일부이며 분량으로는 절반에 가깝다. 꾸미는 말과 이어지는 말이 이중삼중으로 겹침에 따라 길게 늘어진 이 대목을 접하면 곤혹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부터 이 구절이 어디에 이어지는지 헤매어야 한다. 뒤로 몇 걸음 건너 뛰어 사무쳐 우는에 걸린다고 치자. 즉 거센 바람이 불어왔기에 어머니가 사무쳐 운다고 말이다. 여기서 사무쳐 우는은 이미 앞의 가슴 속에를 받고, “가슴 속에는 또 어머님의 눈물을 받은 상태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오는뒤에 이어지는 갈라진에 걸리고 갈라진이 세상에 걸린다.

 

민중의 넋주인 되는을 풀이하고 주인 되는참세상 자유에 걸린다. 이처럼 수식에 수식을 더하고 문장 안에 문장이 몇 겹으로 쌓이면서 불과 한 문장이 오뉴월 엿가락으로 늘어지니 이런 문장은 눈으로 읽어도 뜻을 단박에 잡아내기 힘들다. 그러면 노래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 가사에서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수식어의 남발은 난독을 일으킬 뿐 아니라 문학성마저 헤치고 있다.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것을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이라는 이상한 문장으로 만든데다, ‘세상도 그냥 두지 않고 갈라진 이 세상이라고 덧붙임으로써 분단이 모든 사회 문제의 근본 모순임을 구태여 강조하는 듯한 태도도 억지스럽다.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위하여라고만 해도 깔끔할 것을, 멋스러움을 가미하고 싶었는지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라고 함으로써 수식에 수식을 덧붙이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이 가사는 노래로 부를 때도 장벽이 있다. 첫 대목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에서 가락은 한 매듭을 짓는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가 어디에도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는 셈이니 곡조로도 난감해졌다.

 

그러나 한 대학에서 총학생회 선거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대학 담장을 넘고 서울 지역 대학가를 넘어 전국 방방곡곡에 불렸고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민중가요”(노래운동, 길을 찾아라, 한겨레21, 1995.8.31.)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을 보면, 가사의 난삽함이나 비문학성, 가락의 어색한 끊음 등은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남의 시집 여기저기서 맘에 드는 대목을 끊어와 꼴라주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고통스럽고 죄 없는 이들이 옥에 갇힘으로써 어머니의 눈물을 뽑아내지만 그 어머니 자식들은 독야청청 소나무를 본받아 창살 속에서도 꿋꿋이 고통을 이겨낼 것이라는 가사의 의미를 잡아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갈라진 이 세상”,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등 직설적 표현을 노랫말에 그대로 앉힌 투박함이며 푸른 솔같은 상투적인 비유가 걸리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랫말로는 단박에 알아듣기 쉬운 대중성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시퍼런 쑥물과 푸른 솔의 강렬한 색감, 푸른 솔과 창살의 대비, 쑥물이 주는 고통스러운 이미지가 푸른 솔의 기개로 전환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퍼런 쑥물, 푸른 솔, 창살 모두 박영근 시인의 원작 시가 창출해 낸 발상과 표현이라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난삽하게 얽혔을망정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만하고 원작의 문학성에 적당히 기댄 점, 화자의 강렬한 결의, 거기에다 서정적인 곡조가 결합하면서 이 노래의 지위는 서울 지역 대학가 노래에서 시대의 노래로 한껏 끌어올려질 수 있었다. 물론 박영근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이 노래가 만들어졌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원작에 기대는 바가 크지만, 노래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논리성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뿐히 뛰어넘는 노래의 힘을 여기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모두 시대를 대표적인 민중가요다. 어쩌면 이 가사의 논리적 전개나 문학성을 따지기에는 이 노래들이 맞닥뜨렸던 시대가 너무나 엄혹했는지 모른다. 원시들은 모두 망자의 넋을 불러내는 진혼곡이며, 이성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폭압적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시였다. 시가 활짝 피어났던 1980년대는 오히려 문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였고 제 정신으로는 살기 힘든 엄청난 시대였다. 논리를 따지는 것이 사치스러운 시대, 광주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 숨이 가쁘다. 어떤 말이 필요할까.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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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4 [09: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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