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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과 존중 사이, 가사노동은 당당한가?
[정문순 칼럼] 가사노동이 당당해지려면 주부들이 게을러져야
 
정문순   기사입력  2017/05/04 [10:41]

노동이 당당한 나라노동이 존중받는 나라’. 노동이 존중받지도 당당하지도 못한 나라에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내건 약속이다.

당당함존중은 두 후보들이 각기 발 딛고 선 이념적 좌표의 차이만큼이나 뚜렷하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 이념의 후보가 빨갱이 낙인을 감수하고 노동을 마음놓고 고무·찬양하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노동을 존중한다는 사고는 노동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일로 생각하는 태도를 면치 못한다.

▲ 노동절에 노동헌장 발표하는 정의당. 정의당 홈페이지     ©정문순

 

존중 받는다는 표현이 거슬리는 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구태여 존중이란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존중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건 굳이 상대를 귀하게 대접하지 않아도 탈은 없지만 착한 뜻에서 배려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노동이 존중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대우 받기를 바랄 뿐이다. 대상을 얕잡아보는 태도가 담긴 존중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남이야 나를 봐주든 말든 나 스스로 떳떳하고 위엄을 느낀다는 심 후보의 노동 캐치프레이즈가 훨씬 더 격이 높고 당당하다는 표현만큼이나 당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이 당당하다는 표현도 내게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쓰는 단어 하나, 말투 하나에 유달리 민감한 나는 이 괜찮은문구에 100%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모든 노동이 떳떳하고 멋있고 당당할까.
 
어떤 소설가는 밥벌이가 지겹다고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정말 원하거나 창조적인 일이 아니라 밥을 벌기 위한 노동이라면 마뜩찮기는 하겠지만, 노동이 밥을 벌어준다면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이 밥을 벌어주거나 가치로운 것은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노동 중에서 유독 가사노동만큼은 밥벌이가 되지도, 성취감을 주지도, 자아실현을 느끼지도, 협업을 통한 동료애를 주지도 않는다. 오늘 실컷 해놓으면 내일 일감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요, 잘 한다고 승진이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적 상상력이나 요령은 발 붙을 틈이 없으며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노동의 무한한 반복일 뿐이다. 누군가와 비교할 수도 없고, 남의 자극을 받을 수도 없고, 다른 이들과 성취와 애환을 나눌 수 없는 일은 고독하고 외롭다.
 
경제학에서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이 노동소외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지만, 여성이 살림을 자신이 온전히 장악하고 있어도 가사노동은 외롭고 공허하다. 그것이 진짜 노동소외일 것이다.
 
세상은 가사노동이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거룩한 노동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여성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노동에 격을 부여하지 않으면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 미치지 않으려면 상상적 현실을 참이라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단언컨대 적어도 가사노동에 관한 한 노동은 당당할 수 없다. 가사노동이 당당해지려면 방법은 하나다. 일의 양을 줄여야 한다. 집안일을 줄여야 무가치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그나마 줄어든다. 혼자 하지 말고 가족 구성원과 나누어야 하며, 그럴 수 없다면 여성 스스로 게을러져야 한다.
 
한 번 쓴 수건을 늘 삶아야 할 까닭은 없으며 하얀 빨래 희게 하고 검은 빨래 검게 광낼 필요 없다. 돈만 있다면 집에서 꼭 밥을 해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늘 반찬 뭐 할까 걱정할 에너지가 있으면 책 한 줄 더 읽는 창조적 노동을 하거나 돈 버는 실리적 노동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친환경 식품을 다루는 어떤 협동조합에서 즉석 밥을 출시하자 주부가 다수인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한 적이 있다. 어떻게 공장 밥을 가족에게 먹일 수 있느냐였다.
 
주부가 세 끼 밥을 제 손으로 직접 짓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에서 진보 후보의 편견을 탓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심 후보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노동은 어디까지나 공장 노동에 국한된다. 노동의 당당함을 내건 여성 대통령 후보는 그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과 달리 여성을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 54일 경남도민일보 게재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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