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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왜 붕괴했을까? 자본주의 외는 없는가?
[책동네] 『공산주의의 현실성』,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
 
엄진희   기사입력  2014/10/21 [22:07]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면서 실상 세계는 자본주의 이외의 체제를 상상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는 비인간적인 체제라는 사실은 다른 대안적 세계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부추길 뿐이었다. 다른 세계를 만들려면 우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공산당을 해체하기에 이르렀고 우리는 스스로 자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왜 붕괴했을까. 브루노 보스틸스가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의 이념, 진리의 힘을 절대화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마치 공산주의를, 공산 국가를 영원 불변의 고정된 어떤 실체처럼 여긴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 실재의 세계로부터 오히려 유리된 채, 혁명 ‘이후’를 고려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을까. 그것은 그저 철학적 이념일 뿐이었을까. 정치와 분리된? 브루노 보스틸스는 이런 문제들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우선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해석과 시작을 제기한 <공산주의의 현실성>     © 갈무리

우리는 정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계급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기존의 불평등과 모순,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 이상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도착적으로, 그런 세계(아무 모순과 갈등이 없는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외상적 현실 앞에서 그 불안을 차마 견디지 못한 채, 편안하고 안전한, 그런 공간을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라는 것이 만일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거짓된 위반의 모델’(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401~403쪽)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래서일까. 지젝은 이런 식의 이항 대립 구도(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를 버리고 하나의 내속적 자기 곤궁으로서의 다른 하나,라는 구도를 고집한다.

 

따라서 하나를 전체가 아니라 비전체로 사유할 것, 대타자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빗금쳐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쉬운 말로 가령 부르주아라는 기표는 그 자체로 아무런 균열이나 그 자체 안에 간극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기표인가. 이런 질문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권력과 저항이 치명적으로 서로를 포옹하고 있다면, 즉 권력 없이는 어떠한 저항도 없고 금지가 욕망(위반에 대한 욕망)을 생산(<까다로운 주체>, 404~406쪽)한다면 우리는 이제 다르게 사유해야 할지 모른다. 여성주의가 여성의 본질을 규정해 놓고 남성 때문에 여성적 본질이 발현되지 못했다고 말할 때 범하는 우는 여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실체화해서 고정 불변의 무엇으로 여김으로써 여성의 무한한 잠재성을 가두어 놓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본질주의적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저항과 위반의 논리는 이렇게 본다면 이미 실패를 그 안에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브루노 보스틸스는 비정치적인 것, 문턱, 실재, 물러남, 빼기(혹은 정화) 등의 언어로 어쩌면 제 3항이라고 부름직한 영역을 사유할 것을 권한다. 물론 이런 사유들은 랑시에르, 지젝, 바디우, 벤야민 , 라캉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비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강요된 선택의 논리에서 빠져나오기를 말하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것은 선이라는 가치의 표상불가능성을 상정함으로써 동시에 정치권력과 윤리적 이념 사이의 근본적 불일치를 인식’(161쪽)하는 것을 말한다. 문턱도 그렇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곳에서 사유하기. 이곳은 실재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정치 체제는 그 내부에 자기 모순과 간극, 불일치를 가짐으로써(부정성) 그 외부에 적대를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자체, 빗금쳐져 있는(비전체로서, not all) 것이다(대타자는 없다). 이러한 결핍, 부정성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상징적 거세를 사실로 가정해야 하고, 기초적 구성적 상실, 혹은 결여(294쪽)를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무질서로부터 어떻게 하나의 체제가 발생하는가(296쪽)라는 질문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바디우나 랑시에르가 사유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러한 ‘상징적 질서에 구성적이고 내속적인 부정성’이라고 말한다. 물론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스승의 무지함(결여, 부정성)이 오히려 학생을 더 잘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젝이 보기에 바디우는 끝내 진리를 추구한 철학자이지 그 진리라는 것 자체가 이미 비진리이며,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실제 삶에서, ‘시에서 못지않게 아마 정치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존재할 때마다 우리는 원리의 와해를 목격하며 이런 원리의 붕괴가 동시에 원리와 역사 사이의 연결을 재구축하게 만드는 것을 목격’(240쪽)한다. 우리는 늘 실재 속에서, 사건 속에서 산다. 메타적 차원에서 우리는 사태를 직시할 수 없다. 이 ‘실재의 장소’에서, ‘문턱’의 자리에서 무한한 차이와 생성의 과잉이 지금과 다른 세계를 불러올 수 있는 길목을 열어 놓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기성품 같은 사회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또 순수 사건의 과장법에도 빠지지 않을 수’(243쪽) 있다. 이 어느 곳도 아닌 제 3의 장소가 비장소이고 비진리의 영역이며 문턱(내부이자 외부인)인 것인데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실행(공산주의가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할 수 있다고 브루노 보스틸스는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실재의 영역, 사건의 장소가 포스트모던식으로 무조건적 비결정성, 끝없는 열림, 차이를 향한 무한한 긍정만을 단순히 이야기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상징적 질서 자체의 비어 있음을 대신함(265쪽)으로써 ‘개입’(272쪽)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현실 세계의 비일관성, 큰타자의 비실존(281쪽)을 상정하고 세계를 혼란(307쪽)과 과잉으로 인식할 것, 저기 어딘가에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그런 곳이 가능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혼란을 그 자체로 충실히 받아들일 것 ! 다시 말해 존재와 사건 사이의,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제 3항으로서 구분 불가능한 문턱의 자리, 실재의 자리, 죽음 충동(306쪽)의 자리를 받아들이기. 그럼으로써 적극적으로 현실을 교란시키기. 지젝의 죽음충동은 무언가가 죽지 않은 채로 상징질서를 교란하고 파괴를 일으키는 것이다. 적과 우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상징적 세계는 구분짓고 단일한 정체성으로 우리를 제약한다. 이 제약을 넘어선 자유로운 충동만이 근본적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며 그 첫걸음은 이러한 싱징 질서 자체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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