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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다
용산참사를 이해하는 세 개의 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기여한 영화
 
정문순   기사입력  2012/07/17 [15:07]
영화 ‘두 개의 문’은 알려진 대로 그동안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거나 가해자 편으로 치부되었던 현장 경찰특공대의 시선으로 용산 참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촛불시위에 데인 후 이명박 정부가 공언한 무관용 원칙에 장단을 맞추고 출세욕와 공명심에 눈이 멀어, 테러범 잡는 데나 쓰이는 경찰 특공대를 농성 철거민 ‘섬멸’을 위해 투입하면서 진압에 필요한 기초 정보도 안주고 사지로 몰아넣었던 경찰 수뇌부의 악행이 두드러질수록, 말단 경찰들의 처지는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가해자 격인 국가권력의 말단 하수인으로 치부되었거나, 도심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다 사망한 영웅들이라는 극단의 평가에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누구의 관심도 미치지 못했던 현장의 경찰 특공대도 결국은 피해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긴 그들은 명령을 충실히 따르도록 자동으로 입력된 기계가 되기를 강요받은 이들이다. 간첩이나 테러 진압 훈련만 받은 그들 눈앞의 존재들은 ‘진압’이 아닌 때려 부숴야 할 ‘섬멸’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특공대에서 사망자도 나왔으니 이들을 국가공권력과 같은 편으로 분류할 수도 없게 되었다.

특공대원들이, 농성자들이 특공대를 향해 부르짖었던 “다 죽어”라는 말이, 당시에는 살상도 마다지 않겠다는 적개심에 불타던 말로 들렸지만 지나고 보니 진압하지 말라는 요청이 아니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한 국가 폭력의 말단에 머물러 있지 않다. 물론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말한 내용들이다. 

영화가, 경찰 특공대원들이 현장 철거민들과 함께 국가폭력의 희생자에 속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것도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수천 쪽에 이르는 수사나 재판 기록을 통해 진실에 육박하려는 노력은 리얼리즘으로 충만한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게는 영화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분히 설교적으로도 들리기도 했다. 영화 자체의 문법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은 영화와의 틈을 벌어지게 만든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누누이 강조한, 말단 경찰들은 진실을 말했다거나, 특공대원들은 진압 현장에서 지옥을 보았다고 했으니 엄청난 후유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는 식의 직설적이거나 관객을 가르치려는 주제 전달 방식은 마뜩하지 않다. 변호사나 대책위 관계자 등 굳이 ‘우리’ 편이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건조한 수사나 재판 기록으로도 진실에 닿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말단 경찰도 피해자더라는 깨달음은 별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특공대의 증언대로 말단 경찰이 상부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압 현장에서 농성자들과 함께 사망자도 나왔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가 의도하지 않거나 강조하지 않았던 것들에 있다. 용산참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길은 유가족이나 대책위의 절규일 수도 있고, 생각 없는 기계로 길들여져 공권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경찰 특공대의 시각이나 진술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편이 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경우를 얻은 것이 영화에서 발견한 수확이었다. 

영화가 찾은 재판 기록 중, 재판 도중 검찰이 증인으로 출석한 특공대 제1제대장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다. 경찰이 농성자 진압을 위해 컨테이너를 2대 동원했다면 특공대가 (사망자를 내지 않고) 더 안전했을 것이라는 증인의 진술에 대해, 검찰은 컨테이너가 1대가 아닌 2대였다면 특공대의 입장이 아닌 농성자들의 처지에서도 안전했겠냐고 묻는다. 특공대도 아닌 농성자의 시각에서 뜬금없이 질문하니, 증인이 질문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변호사가 질문을 이해하기 쉽게 거들어 준다. 망루에서 살아남은 농성자들에게 결국은 유죄를 때리고 마는, 농성자들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는 검찰의 입에서 농성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질문이 나온 것은 의아한 장면이었다. 

‘우리’ 편이 아닌 검찰 자신도 의도했을 것 같지 않은 태도가 영화를 비집고 나오면서, 영화는 결국 농성자들의 명예회복과 정당성에 힘을 두텁게 실어주는 결론으로 치달았다. 그 위치상 농성자들의 ‘적’으로 결코 치부할 수 없는 말단 경찰의 시선과 입을 통하기보다, 명백한 ‘적’을 통해서 농성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훨씬 더 굳건하게 입증해 준 것이다. 

당사자 유가족이든, 말단경찰이든, 공권력의 협력자인 검찰이든, 진실에 이르는 과정이 꼭 하나의 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두 개의 문’이 갖고 있는 문은 세 개 쯤 된다. ‘두 개의 문’은 피해자나 넓은 의미의 피해자가 아닌 움직일 수 없는 가해자의 입을 통해서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는 장면이다. 공권력이 비극의 현장을 철거하고 물로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은 특공대를 동원한 진압보다 더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진압 당시 화재 현장에서 쏟아내던 물줄기나 그 물이나 무엇이 다를까. 권력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흔적은 어떻게든 지워버리는 것이 속성이 있다. 공권력이, 목숨을 잃은 농성자들이나 경찰에게 최소한의 연민이라도 있다면 현장에 손을 대지는 말았어야 한다. 그 부분이 영화에서 어떤 부분보다 가슴이 아팠다. 진실에 이르는 여러 개의 문의 흔적을 아예 말소하는 행위야말로 희생자를 모욕하는 잔인한 짓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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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7/17 [15: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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