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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 : 타계한 라틴아메리카의 어머니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평생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을 노래
 
최을영   기사입력  2009/11/12 [18:41]
라틴아메리카와 역사와 함께한 삶
 
<그라씨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생에 감사해)>라는 명곡으로 기억하는 라틴아메리카 음악의 거목 메르세데스 소사가 2009년 10월 4일 74세의 일기를 끝으로 사망했다. 1960년대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중심으로 남미 전역에서 일기 시작한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 운동에 동참했던 그는 평생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을 노래했다.
 
머릿결이 검어 생전에 라 네그라(La Negra: 검은 여인)란 별칭으로 불렸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의 투쿠만에서 혼혈인 메스티소로 태어났다. 투쿠만은 아르헨티나에서도 민속문화가 잘 남아 있던 곳으로, 소사는 그곳에서 민속음악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노래에 재능이 있었던 소사는 15세 되던 해에 투쿠만의 지방 방송국이 주최한 노래 콘테스트에 참가해 우승했다. 그리고 이때 그 방송국과 몇 개월의 출연계약을 맺었지만, 방송국 PD가 폴크로레(남미의 포크음악)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그에 반발하며 출연을 그만두었다.1)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활동하며 1959년 남편의 도움으로 첫 앨범을 발표한 소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의 생활을 견뎌야 했다. 당시 그는 가정부나 사무실의 급사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65년 코르도바에서 열린 폴크로레 음악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소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공적인 첫 공연을 가진 뒤에 1968년 유럽에서 공연을 한다. 당시 그의 공연을 본 독일의 한 음악평론가는 "에디트 피아프 이래 이만큼 감동적인 여성 가수를 보지 못했다"고 격찬했다.2)
 

그러나 소사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1976년 들어선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신음하게 된다. 3만여 명이 실종되고, 무수히 많은 이가 죽임을 당했던 잔인한 군부정권 하에서 소사의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리고 1979년 소사는 한 공연장에서 가난한 소작농들의 비참한 현실과 대지주들의 착취를 비판하는 노래를 불러 관객 35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강제출국당해 스페인에서 원치 않는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 당시 그는 남편을 잃었고, 지병인 심장병까지 얻었다. 2003년 내한 공연이 무산된 것도 심장병 때문이었다.
 
1982년 귀국한 뒤 그는 노래를 통해 군부정권에 항거했고, 1983년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이 몰락한 뒤로는 올곧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노래했다. 그 노래는 40여 장의 앨범에 고스란히 남았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
 
1963년 소사는 당시 아르헨티나에 불고 있던 '누에바 칸시오네로 아르헨티노(Nueva Cancionero Argention)' 운동에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칠레에서도 빅토르 하라(Victor Jara)를 비롯한 의식 있는 음악인들이 새로운 노래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다. 한편 쿠바에서는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 새로운 음유시)'라는 이름으로 누에바 칸시온과 연대의식을 가진 노래 운동이 확산되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1960~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노래운동이다. 새로운 노래란 뜻을 가진 이 운동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아타왈파 유판키(Atahualpa Yupanqui)와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가 다져놓은 기반 위에 빅토르 하라와 메르세데스 소사 등이 중심이 되어 펼쳐졌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194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민속문화를 채집 연구하던 아타왈파 유판키의 활동에서 기인한다. 전통문화의 복원이란 측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다분히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된다. 당시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독재정권하에 있었으며, 사실상 미국의 식민체제에 있었다. 이에 반발해 일단의 음악인들이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펼쳐나갔고,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누에바 칸시온 음악인들이 일조했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란 빅토르 하라의 말은 누에바 칸시온이 지향하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많은 이는 1959년의 쿠바혁명이 이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에 동참하며 폴크로레를 불러온 소사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노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훗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정권이 소사를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1982년, 아르헨티나
 
1982년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민중가수이자 누에바 칸시온의 대표적 인물인 메르세데스 소사의 귀국 공연이 2월 18일부터 28일간 열렸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하던 그가 3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목숨을 걸고 귀국해 연 공연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소사의 귀환을 환영했고, 공연은 연일 매진이었다. 그 공연에서 소사는 누에바 칸시온의 명곡이자, 자신을 대표하는 곡 <Gracias A La Vida>를 열창했다.
 
삶이 전혀 고맙지 않은 상태에서 소사가 부르는 <Gracias A La Vida>. 그 곡 중간에 소사는 목이 메었고, 그 시점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휘파람 소리, 그리고 함성 소리가 공연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현장은 그해 발매된 소사의 라이브 앨범 《Mercedes Sosa En Argentina(아르헨티나에서의 메르세데스 소사) 에 고스란히 실렸다. 처연하면서도 안으로 갈무리한 듯한, 저음이면서도 힘 있는 소사의 목소리와 그의 귀환을 환영하는 군중의 박수와 함성, 그리고 휘파람 소리와 함께 말이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은 이 라이브앨범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군부의 폭압 속에 숨조차 크게 못 쉬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돌아온 소사를 환호로 맞이했고, 소사는 영혼의 목소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조국으로 돌아온 소사의 감격, 그를 다시 맞는 관객들의 열광, 그리고 40대의 농익은 가창력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이 음반을 역사적 명반으로 이끌었다. …… 《아르헨티나에서의 메르세데스 소  음반에는 한 사람의 위대한 의지가 세상을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는 진리와 국적과 인종, 종교를 초월한 감동이 담겼다. '시공을 초월한 명반'이란 말은 바로 이 음반을 두고 하는 말이다."3) 
 

누에바 칸시온 최고의 표현자
 
메르세데스 소사는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다. 그는 곡을 쓸 줄 몰랐다. 그의 대표곡인 <Gracias A La Vida>도 비올레타 파라의 곡이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은 그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소사는 곡을 쓸 줄 모르기에 평생을 남의 노래만 해왔다. 그러나 원작자보다 더 뛰어난 노래를 들려줬고, 어둠의 시대에 희망의 빛을 던졌다. 우리가 소사의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가사를 다 이해해서가 아니다. 그의 영혼에서 우러난 감동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4)
 
또 음악평론가 서남준은 소사가 부른 <Gracias A La Vida>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죽음조차도 담담히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는 철학적이면서도 종교적 사유가 담긴 이 아름다운 노래는 누에바 칸시온 최대의 명곡으로, 지금까지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왔다. 심지어 존 바에즈까지도. 그러나 듣는 이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다다르도록 메르세데스 소사만큼 풍부한 서정과 울림이 큰 감동으로 이 노래를 전해주는 가수가 달리 있을까? 소사가 그 맑고 따뜻한 알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인생이여 고마워요>에는 파라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가위눌리게 하는 격동의 현장에서 정신의 파수꾼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감동과 높은 수준의 서정적 기품이 느껴진다. 그런 이유에서 마치 어머니의 품 같은 넉넉함과 중량감을 동반하는 소사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한 예술가의 완성의 경지를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5)
 
소사는 생전에 "예술가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의로 인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일"이라고 말했다.6) 그리고 자신의 노래가 달라졌다는 혹평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 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나는 무대 위에서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나는 민중에게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대신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7)
 
노래를 부르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고 말했던 소사는 죽기 전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투쟁과 단결의 노래이기도 했고, 인간의 고통을 호소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의 말대로, 우리가 소사의 노래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노랫말을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다. 저음으로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갈무리한 소리를 조용하게 내지르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느껴지는 전율,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 그것이 어쩌면 소사의 노래가 가진 힘일 것이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각주]
1) 서남준, 『월드뮤직』, 대원사, 2003, 278쪽.
2) 송기철, 「저항음악 메르세데스 소사 귀국 공연 음반으로」, 『한겨레』, 2007년 2월 12일, 27면.
3) 서남준, 『월드뮤직』, 대원사, 2003, 277쪽.
4) 송기철, 「저항음악 메르세데스 소사 귀국 공연 음반으로」, 『한겨레』, 2007년 2월 12일, 27면.
5) 서남준, 『월드뮤직』, 대원사, 2003, 276쪽.
6) 서남준, 『월드뮤직』, 대원사, 2003, 279쪽.
7) 홍지민, 「소사는 갔지만… 그녀의 음악은 영원히」, 『서울신문』, 2009년 10월 12일,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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