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학 졸업자가 아니라면 한국 땅에 살면서 학벌 문제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국가기관에 의해 만인 앞에서 자신의 학력이 조롱당하는 사람의 참담함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문대졸, 30대, 무직, 경제 분야 전공이나 경력 없음” 검찰이 공개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신상 정보는 일부러 꿰다 맞추기라도 한 듯 학벌, 나이, 전공, 경력, 경제적 지위 등 한국 사회에서 모멸당하기 좋은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검찰은 ‘가방끈 짧은 청년 백수’에게 휘둘린 사람들의 낭패감을 기대하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인터넷에서 자기 생각을 쓰려면 최종학력부터 밝혀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나는 미네르바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나를 넣어보고 싶어진다. “지방대졸, 석사 학위도 없음, 단독 저작 한 권도 없음, 문학평론가 행세.” ‘경제 대통령’으로 행세한 청년 실업자 못지않은 괴물이 나온 듯하다. 그나마 해박한 경제 지식으로 전문가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는 미네르바에 비하면 내 처지는 더 심각하다.
인권 선진국에서라면 정부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터넷 논객이 구속될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지만 검찰이 한 시민의 학력에 모욕을 주는 행위는 더욱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검찰의 머릿속에서 학벌로 마녀사냥을 하려드는 상상력이 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저변에 깔린 의식이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간판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서열을 나누는 버릇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혔는지 그렇게 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아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도 예외로 두지 않는 듯하다. 그 점을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연수의 인터뷰에서 느꼈다.
▲ 1월 6일 자 한겨레 기사 © 한겨레 인터넷판 | |
김연수는 어지간한 문학상은 죄다 휩쓸었을 만큼 상복이 많은 작가인데, 정작 작가로서 자신에 대한 믿음은 그다지 단단하지 못한 듯하다. 수상 인터뷰에서 그는 “글을 쓰면서 늘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불안하고 불확실한 마음인데, 이렇게 중요한 상을 받게 되면 적어도 당분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한겨레, 2008.1.6.)라고 했다.
상금은 3500만 원이다. 이상문학상은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소설 쓰기가 중노동이기는 하지만, 장편도 아닌 단편 하나에다 몇 천만 원의 상금은 상식적으로 과하다. 이 많은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가 수상작을 책으로 펴내어 번 돈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시장에서 안 팔리면 상금을 줄 수 없는 형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이 출판사의 수입을 보증하듯 소설책은 타이틀이 달려 있을수록 잘 팔린다. 그런데 단편소설 하나만으로는 돈 되는 책이 만들어질 수 없으니 수상 작가의 다른 작품도 실리고, 엉뚱한 다른 작가들의 소설 대여섯 편도 ‘우수작’라는 등수가 매겨져 책으로 함께 묶여 나온다.
문학상은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격려와 보상이 아니라 출판사의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상의 규모와 상금이 클수록 정도는 더하다. 돈만 된다면 표절로 물의를 빚은 작가가 선정돼도 상관 없다. 그러나 대형 문학상 수상을 가급적 고사하고 작은 규모의 상에 만족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수상 실적이 많을수록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품과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작가는 없어도 정작 그런 상을 거부한 작가는 ‘동인문학상’ 후보 지명을 거부했던 황석영, 고종석 정도에 불과하다.
김연수의 소설 중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는 한 명의 서술자가 다른 목소리를 제압하고 단일 사건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중간 중간에 샛길로 빠지고 가지를 치고 여러 가지가 뒤섞이기도 한다. 독자는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가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 거지?’ 의심하며 지나온 지면으로 되돌아가 읽곤 한다. 그건 작가의 전략이다.
김연수는 소설에서 확고하고 단일한 목소리를 의심하는 형식 실험을 일관되게 전개해왔다. 그 결과 세상의 권위와 진리는 무력해지고 분산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증발하지는 않는다. 최후까지 남는 건 소설가적 자의식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그것을 의심하는 자신의 이성만큼은 회의할 수 없게 되고 도리어 이성적 능력에 대한 신뢰가 확고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김연수가 한국 문학의 전설인 이상(李箱)을 소설에서 다루었던 것도 그의 작가적 자의식이나 자부심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세상의 권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만 좋으면 그뿐 남들한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상이 주어져도 즐거워할 줄 모르며,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내세울 간판이 없어도 당당하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갈고 닦은 김연수의 작가적 자의식은 문학상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해져 버렸다. 세상의 진리와 권위를 의심하라는 그의 작가 정신이 왜 출판사의 상품화 전략과 무관하지 않은 문학상에는 몸을 덥석 낮추는가. 어쩌면 열린 텍스트를 지향하는 김연수의 실험도 진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시장에서 한창 그런 것이 유행하고 환영받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문학상을 수 백 개 타든 당대의 평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김연수라고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죽고 나서 재평가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이름이 달린 문학상이 몇 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이상 자신은 짧은 생애 동안 변변한 간판이나 타이틀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 '미네르바' 박대성 씨는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신동아와 인터뷰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CBS노컷뉴스 | |
공업학교 출신의 하급 기술자 경력이 전부인 그는 전문학교 졸업자나 일본 유학 출신자가 허다한 문단에서 철저한 방외인이었다. 가방끈 짧은 비전공자가 문인이 되었으니 미네르바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문단에 학맥도 인맥도 없던 그는 그나마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몇 안 되는 동료 덕분에 잡지에 전위시 <오감도>를 연재할 기회를 얻었으나, 주류 문인들과 독자들로부터 미친 사람의 ‘잠꼬대’ 같다는 혹평을 받고 작품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지면을 잃었다.
그러나 이상은 ‘천재’를 몰라주는 당대 문단의 수준을 한탄하는 데 그쳤을 뿐 시류에 영합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가 작가로서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에 손댔다면 사후의 위상은 결코 오늘날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김해경'인 그의 필명이며 ‘상(箱)’은 상자로서 그가 사후에 들어갈 관을 의미한다. 자신의 필명에 죽음을 담을 만큼 세상과 철저하게 불화했던 작가는 사후에 자신의 이름이 세상의 권위를 차지하게 된 사실을 알면 흔쾌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물신 숭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헤어나지 못함을 알면 기분이 어떠할까.
학벌이든 상이든 껍데기와 간판에 불과할진대 그런 것들이 위력을 가진 사회일수록 삶의 내용을 채우는 데는 자연히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학벌과 상장이 당사자의 능력을 입증해준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 딱한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하기는 싫고 연줄과 권력을 통해 삶의 노른자위를 독차지하고 싶은 자들에게 간판이나 타이틀은 면죄부다. 껍데기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한 아무런 비빌 언덕도 없는 이상과 미네르바는 소외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의 알맹이가 조금이라도 채워지는 건 이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