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미네르바와 작가 李箱, 껍데기 사회의 알맹이들
[정문순 칼럼] 미네르바는 연줄과 간판이 앞선 사회를 밝히는 희망이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9/01/15 [17:54]
명문대학 졸업자가 아니라면 한국 땅에 살면서 학벌 문제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국가기관에 의해 만인 앞에서 자신의 학력이 조롱당하는 사람의 참담함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문대졸, 30대, 무직, 경제 분야 전공이나 경력 없음” 검찰이 공개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신상 정보는 일부러 꿰다 맞추기라도 한 듯 학벌, 나이, 전공, 경력, 경제적 지위 등 한국 사회에서 모멸당하기 좋은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검찰은 ‘가방끈 짧은 청년 백수’에게 휘둘린 사람들의 낭패감을 기대하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인터넷에서 자기 생각을 쓰려면 최종학력부터 밝혀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나는 미네르바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나를 넣어보고 싶어진다. “지방대졸, 석사 학위도 없음, 단독 저작 한 권도 없음, 문학평론가 행세.” ‘경제 대통령’으로 행세한 청년 실업자 못지않은 괴물이 나온 듯하다. 그나마 해박한 경제 지식으로 전문가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는 미네르바에 비하면 내 처지는 더 심각하다. 
 
인권 선진국에서라면 정부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터넷 논객이 구속될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지만 검찰이 한 시민의 학력에 모욕을 주는 행위는 더욱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검찰의 머릿속에서 학벌로 마녀사냥을 하려드는 상상력이 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저변에 깔린 의식이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간판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서열을 나누는 버릇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혔는지 그렇게 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아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도 예외로 두지 않는 듯하다. 그 점을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연수의 인터뷰에서 느꼈다. 
 
▲ 1월 6일 자 한겨레 기사     © 한겨레 인터넷판

김연수는 어지간한 문학상은 죄다 휩쓸었을 만큼 상복이 많은 작가인데, 정작 작가로서 자신에 대한 믿음은 그다지 단단하지 못한 듯하다. 수상 인터뷰에서 그는 “글을 쓰면서 늘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불안하고 불확실한 마음인데, 이렇게 중요한 상을 받게 되면 적어도 당분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한겨레, 2008.1.6.)라고 했다. 
 
상금은 3500만 원이다. 이상문학상은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소설 쓰기가 중노동이기는 하지만, 장편도 아닌 단편 하나에다 몇 천만 원의 상금은 상식적으로 과하다. 이 많은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가 수상작을 책으로 펴내어 번 돈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시장에서 안 팔리면 상금을 줄 수 없는 형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이 출판사의 수입을 보증하듯 소설책은 타이틀이 달려 있을수록 잘 팔린다. 그런데 단편소설 하나만으로는 돈 되는 책이 만들어질 수 없으니 수상 작가의 다른 작품도 실리고, 엉뚱한 다른 작가들의 소설 대여섯 편도 ‘우수작’라는 등수가 매겨져 책으로 함께 묶여 나온다. 
 
문학상은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격려와 보상이 아니라 출판사의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상의 규모와 상금이 클수록 정도는 더하다.  돈만 된다면 표절로 물의를 빚은 작가가 선정돼도 상관 없다. 그러나 대형 문학상 수상을 가급적 고사하고 작은 규모의 상에 만족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수상 실적이 많을수록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품과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작가는 없어도 정작 그런 상을 거부한 작가는 ‘동인문학상’ 후보 지명을 거부했던 황석영, 고종석 정도에 불과하다. 
 
김연수의 소설 중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는 한 명의 서술자가 다른 목소리를 제압하고 단일 사건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중간 중간에 샛길로 빠지고 가지를 치고 여러 가지가 뒤섞이기도 한다. 독자는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가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 거지?’ 의심하며 지나온 지면으로 되돌아가 읽곤 한다. 그건 작가의 전략이다. 
 
김연수는 소설에서 확고하고 단일한 목소리를 의심하는 형식 실험을 일관되게 전개해왔다. 그 결과 세상의 권위와 진리는 무력해지고 분산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증발하지는 않는다. 최후까지 남는 건 소설가적 자의식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그것을 의심하는 자신의 이성만큼은 회의할 수 없게 되고 도리어 이성적 능력에 대한 신뢰가 확고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김연수가 한국 문학의 전설인 이상(李箱)을 소설에서 다루었던 것도 그의 작가적 자의식이나 자부심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세상의 권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만 좋으면 그뿐 남들한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상이 주어져도 즐거워할 줄 모르며,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내세울 간판이 없어도 당당하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갈고 닦은 김연수의 작가적 자의식은 문학상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해져 버렸다. 세상의 진리와 권위를 의심하라는 그의 작가 정신이 왜 출판사의 상품화 전략과 무관하지 않은 문학상에는 몸을 덥석 낮추는가. 어쩌면 열린 텍스트를 지향하는 김연수의 실험도 진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시장에서 한창 그런 것이 유행하고 환영받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문학상을 수 백 개 타든 당대의 평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김연수라고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죽고 나서 재평가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이름이 달린 문학상이 몇 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이상 자신은 짧은 생애 동안 변변한 간판이나 타이틀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 '미네르바' 박대성 씨는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신동아와 인터뷰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CBS노컷뉴스

공업학교 출신의 하급 기술자 경력이 전부인 그는 전문학교 졸업자나 일본 유학 출신자가 허다한 문단에서 철저한 방외인이었다. 가방끈 짧은 비전공자가 문인이 되었으니 미네르바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문단에 학맥도 인맥도 없던 그는 그나마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몇 안 되는 동료 덕분에 잡지에 전위시 <오감도>를 연재할 기회를 얻었으나, 주류 문인들과 독자들로부터 미친 사람의 ‘잠꼬대’ 같다는 혹평을 받고 작품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지면을 잃었다. 
 
그러나 이상은 ‘천재’를 몰라주는 당대 문단의 수준을 한탄하는 데 그쳤을 뿐 시류에 영합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가 작가로서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에 손댔다면 사후의 위상은 결코 오늘날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김해경'인 그의 필명이며 ‘상(箱)’은 상자로서 그가 사후에 들어갈 관을 의미한다. 자신의 필명에 죽음을 담을 만큼 세상과 철저하게 불화했던 작가는 사후에 자신의 이름이 세상의 권위를 차지하게 된 사실을 알면 흔쾌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물신 숭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헤어나지 못함을 알면 기분이 어떠할까. 
 
학벌이든 상이든 껍데기와 간판에 불과할진대 그런 것들이 위력을 가진 사회일수록 삶의 내용을 채우는 데는 자연히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학벌과 상장이 당사자의 능력을 입증해준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 딱한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하기는 싫고 연줄과 권력을 통해 삶의 노른자위를 독차지하고 싶은 자들에게 간판이나 타이틀은 면죄부다. 껍데기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한 아무런 비빌 언덕도 없는 이상과 미네르바는 소외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의 알맹이가 조금이라도 채워지는 건 이들 덕분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01/15 [17:5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Partizan 2009/01/20 [19:10] 수정 | 삭제
  • 여러 분들이 응답을 하신 것을 보니 오늘 주제는 모두에게 평소 말하고 싶은 부분을 끄집어내신 것 같군요. 저도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오랜 동안 진보 진영의 한 축으로 활동하신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 바람에 휩싸여 그 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모습과 자신이 서울대 졸업했음을 알게 모르게 과시하며 그 자식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강요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 사람을 겪으며 느낀 바지만 최종 학력과 그것을 증명하는 종이 조각이 결코 그 사람의 인간성과 비례하지 않음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확실히 느끼겠더군요. 오히려 그 머리 좋은 것을 이용해 타인의 인생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방관자로서 본인의 입신양명과 보신에만 이용하더군요.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그 목적에 이타적인 부분도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런 현실을 벗어나거나 일거에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는 것 같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만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만 더 늘어나기에 오늘 새벽의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농성자들과 경찰....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아마 햄릿의 고민도 나만큼 깊지 않았을 거야! 햄릿! 그는 왜 세상을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오랜만에 New Trolls 'Concerto Grosso' 를 몽땅 들어봐야겠군. 쓰다 보니 글이 이상한 데로 새버렸구만.
  • 정문순지지 2009/01/17 [11:48] 수정 | 삭제
  • 현학의 글은 대학 강좌나 학술 세미나 장이나 학원 논술강의 시간에 보다 쓸모있겠습니다. 치기어림이 아닌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글, 경박하지 않으면서 차분한 성찰의 글, 시류영합이나 균형잃은 선동이 아닌 담대한 비판정신이 담긴 글, 정치적 입장이나 계급적 이해를 분명히 하는 투명한 글이 좋습니다. 대자보가 그런 중심무대가 되길 바라는데.....

    볼륨/다는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 정말 많고 진보바닥이 다분히 그런 경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도 사실입니다. 창피한 일이죠. 그건 좌파사상을 가졌거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허세의 명망가?)을 이 바닥에서 단호하게 척결해 내면 되는데 쉽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불행하게도 정치과잉의 한국에서 소위 진보는 보수에 대응하는 정치적 상대개념으로서만 진보일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진보(좌파) 가치로서의 진보(좌파)는 희박하다는 것 다시 말해 진보(좌파) 내 부조리나 패권에는 저항력이 떨어집니다.

    노동을 비숭상하고 문벌(학벌)은 숭상하는 신분주의(명망가숭배)에 포섭되어 있어 자기진보의 역동성이 없고 그러다보니 허세의 멱물 명망가들이 진보바닥에 설 수 없도록 도태시켜야 함에도 그 지점에 무기력하다는 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는 '진보 자체의 한계'로 인해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 볼륨 2009/01/17 [05:37] 수정 | 삭제

  • 진보의 동력은 학벌타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현 진보진영은 출세하지 못한 학벌주의자들이
    출세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곳 같습니다.
    시미단체도 시민이 주인이어야 하는데
    사회 부적응자인 학벌쟁이들이 웅크리고 ...
    간판 팔어 먹고 살려는 *들 보면 징그럽습니다.
    솔직히 전문가 행세하는 사람들 토론이마 글보면
    누구나 다 할수 있는 말을 간판으로 포장한 경우가 많죠
    간판쟁이, 간판장사, 학벌 장사꾼들이 싫습니다
    어>>>> 나 엘리똥이야
  • 궁금 2009/01/17 [00:20] 수정 | 삭제
  • 변희재가 그리 싫어하던 포털 야후에 미네르바 끝장토론이 상품으로 걸리는데, 생뚱맞게 두 사람의 끝장토론이라니? 진중권과 변희재는 왜 저렇게 마케팅 상품으로 잘 팔려 나가는 거지? 서울대 나왔다고 팔려 나가는 건가? 안티조선하다 조선일보에 포섭되고 포털 비판하다 포털 마케팅에 동원되고, 몸의 매춘과 생각의 매춘은 뭐가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