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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수 매케인 후보, 공화당 내 좌파인가?
[기획취재]UCC와 인터넷선거8.공화당 내 거대한 변화 이끄는 정통 보수주의자의 삶
 
김철관   기사입력  2008/02/10 [00:29]


<대자보>는 'UCC와 인터넷선거' 기획취재의 일환으로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8년 미국 대선과 UCC의 영향력’에 관한 미국 현지 취재를 다녀왔다. 공화당 경선 현장을 방문해 존 매케인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현지 취재했다. 다음은 현지 취재 내용이다.

 
 
오는 11월 4일 제 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 되고 있는 존 매케인의 정확한 이름은 존 시드니 매케인 3세(John Sidney McCain 3, 71세)이다. 해군 제독인 존 에스 잭 매케인과 그의 부인 로베르사 매케인 사이에서 1936년 8월 29일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존 에스 슬루 매케인도 해군 제독출신이었다.
 
매케인 후보는 최근 예비후보 경선에 임하면서 대선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생명보험을 담보로 융자를 한 인물이다. 전통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이민정책, 기후변화, 조세정책 등에 대해 진보적 입장으로 일관해 공화당 주류정치인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1월 31일 전통 보수파 논평가로 유명한 앤 쿨러 씨는 “매케인을 지지하느니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화당 내 주류 보수 정치인 사이에는 그를 ’좌파 공화당‘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관되게 일부 진보적 정책을 내놓은 등 우파로서 보기드문 괴짜 정치인이다.
 
▲지난 28일 플로리다주 잭슨 빌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악수를 하고 있는 매케인 미 공화당 대통령 예비후보.     © 김철관

 
보수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매케인은 롬니 후보와 허커비 후보에게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위기에 직면한 전통 보수파 정치인들이 나서 롬니 후보를 지지 호소에도 불구하고 지난 5일 슈퍼 화요일 예비선거에서 매케인은 당당히 승리를 했다. 지난 8일 2위를 달리던 상대 후보 롬니까지 사퇴를 하면서 매케인 지지를 선언해, 대통령 공화당 후보 낙점이 더욱 확실해졌다.
 
애리조나주 출신인 그는 현재 고희를 넘긴 노익장이다. 그가 만약 당선되면 현재까지 69세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기록을 경신하게 되는 등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보수주의자지만 그는 일부 개혁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보수주의 정치이념과 어긋나 공화당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선거초반부터 그의 출마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난 2000년 현 부시 대통령에게 공화당 후보에게 떨어져 당원 사이에 인기가 없는 데다가 지난 1월 초에 치러진 당원대회에서 4등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날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주지사,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에 밀려 4위를 기록해 낙마까지 점쳐졌다.
 
하지만 지난 1월 19일 사우스캐롤라이나와 29일 플로리다에서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연이은 1위를 기록했고, 지난 5일(수퍼 화요일)에도 1위를 기록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지난 30일 후보 사퇴한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지사의 지지선언은 대통령 후보로서 방점을 찍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언론사 여론조사에서도 공화당 후보로서 매케인이 1위를 달리고 있다. 사실상 공화당 유력한 후보로, 아니 이변이 없는 한 공화당 후보로 내정된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가 개혁적인 성향을 보인 것은 정치 입문시 친분이 있던 개혁성향의 공화당 게리 하트 상원의원과 월리엄 코언 상원의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83년 연방 하원 애리조나주 보궐선거에서 당선됐고, 86년 상원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본격 시작했다. 의원활동 중 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한 정치개혁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의 조부, 부친 그리고 매케인 그리고 막내 아들 등 4대에 걸쳐 해군장교 출신이라는 것도 주목의 대상이다. 특히 이라크 전이 악화될 때 미군 증파를 주장하면서 막내 아들을 해군에 입대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매케인은 54년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영문학, 역사 등의 과목에 흥미를 보였으나 성적은 밑바닥이었다. 졸업당시 899명중 894위로 뒤에서 5번째 등수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 후 67년 베트남전에 하노이 폭격의 임무를 받고 해군조종사로 참전해 작전 중 전투기가 격추돼 북 베트남군에 의해 5년여 포로 생활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할 당시 부친인 잭 매케인이 미 태평양함대 제독이 됐고, 이런 사실을 안 북 베트남은 외부선전을 목적으로 조기 석방을 미국에 제안했다. 하지만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 자가 먼저 나간다’는 군인 수칙을 이유로 먼저 잡힌 자를 석방하라면서 석방을 거부했다. 그래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독방에 감금되기 일쑤였다.
 
이 때 북 베트남 군에 의해 고문을 받으면서 강제로 ‘검은 범죄자’이면서 ‘공적’이라는 자백서를 쓰기도 했다. 강요에 쓴 것을 부각하기 위해 일부러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썼고 일부 철자도 틀리게 썼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73년 1월 파리평화조약에 따라 그해 3월 15일 포로가 된지 5년 반 만에 미국 국민의 환영을 받으면서 영웅으로 귀환한다. 그는 귀환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백악관에 초청됐고 당시 목발을 짚고 악수를 하는 모습의 사진이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73년부터 74년까지 국가전쟁대학에서 근무하면서 재활치료를 받았고 힘든 재활치료 끝에 다시 비행시험에 통과해 비행사령관이 됐으며 남부 플로리다주 잭슨빌 근처의 세실 해군 비행장에서 비행단을 지휘한 기록도 있다.
 
69년 교통사고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첫 부인인 케롤과 80년 4월 2일 집과 향후 치료비를 보조해줄 것을 약속하고 정식 이혼했다. 그해 5월 17일 부자 집안이면서 미인으로 알려진 현재 부인 신디 헨슬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81년 대위로 예편했고 군복무기간동안 여러 훈장을 받기도 했다.
 
84년 매케인과 아내 신디와의 사이에 첫딸인 멕한, 86년 존 시드니 4세와 88년에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1991년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에서 3개월 된 여자아이를 입양했는데 그의 이름은 브리짓이다. 94년 아내 신디가 진통제 중독에 빠진 것을 공개했는데 그는 이러한 고통에 빠진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고백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정치생명이 끝날 위기가 있었다. 87년 아메리칸 컨티넨탈 주식회사의 자회사인 링컨 저축 및 대출조합의 부동산 회사 찰스 키팅이 잘못된 대출로 인해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키팅이 정치적으로 지원하던 다섯명의 상원의원 중 한명이 매케인이었다. 잘못된 대출로 키팅이 망하게 된 것이다. 바로 키팅 파이브 스캔들이다. 매케인도 조사를 받았지만 다행히 살아났다.
 
94년 공화당 내 반대를 무릅쓰고 매케인은 당시 존 케리 상원의원과 함께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민주당 입장에 동의하면서 독자노선을 걷기도 했다. 91년부터 93년까지 전쟁포로와 실종자문제를 다루는 특별상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베트남을 방문했고 실종자를 찾는 활동과 베트남 관계정상화를 희망했다.
 
이 시기 그는 "이제 상처를 아물 시간이다. 그것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며 계속 살아가야할 시기이다"라고 밝혀 베트남 외교정상화를 강조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단절됐던 베트남과의 외교정상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바로 95년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시절이었다.
 
현재도 공화당 전통 보수주의 입장과 달리 그는 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해 정치자금법, 이민정책, 기후변화, 조세정책 등에 대한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등 북한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취재 : 기획취재팀(이창은, 김철관, 이준희 기자)
보도 : 김철관 기자
통역 : 안찬모 <온라인 비> 대표
 
* 본 기획취재는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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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2/10 [00: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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