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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등장은 진보반동의 결정체이다
[시론] 껍데기 진보운동이 '극우파' 불러, 참진보세력 결집기회 삼아야
 
이동연   기사입력  2007/11/09 [10:36]
이회창씨!! 참보수 정치인이 되어 주오.
 
인간은 ‘참’이라는 접두어를 붙여도 될 만큼 성숙한 존재일까? '참 인간', '참 보수', '참 진보'에 대한 기대는 원래부터 허망한 것이었을까? 참 보수의 기치를 높이 든 이회창의 등장을 보면서 참 진보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접고있는 국민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지난 10년은 과거 타락한 보수 정권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다. 타락한 보수는 참으로 지켜야 할 전래적 가치는 무시하고 버려야 할 악습은 체제유지라는 이름으로 지키려 한다. 즉 정신적 가치는 내팽개치고 기득권의 형식유지에 목을 매단다.
 
이것은 진보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참 진보’정권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국민들이 그들을 선택했을 때는 분명히 타락한 보수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였고 참진보정치의 맛을 보기 원했다.
 
 그러나 ‘참 진보적 정치’를 보기 원했던 국민들은 진보 정권기간동안 지배 엘리트들의 상호 교체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서 서민 대중은 누가 정권을 잡든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삶의 이해관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정권 내부의 사람들은 지난 10년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하면서 몰라도 너무 몰라 준다고 사람들이 강변해도, 일반인은 전혀 수긍을 못하고 있다. 단지 일반인의 눈에는 지난 10년간이 권력 상층부의 지배엘리트와 소외엘리트의 교체행사만 열린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진보세력을 지지했던 익명의 다수는 진보 정권내에서 수직적으로 위와 아래가 바뀌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했다. 주류명망가와 소외명망가의 임무교대가 아니라 익명의 내 이웃, 나와 툭 터놓고 지낼만한 사람들도 주류에 들락거리는 것을 원했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서울대 교수와 그 대학 출신이 아닌 타 대학 출신과 교수들. 지방에서 떠돌던 사람들도 중앙의 핵심부에 진입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국민들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전히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는 서민층으로부터 충당되지 않고, 권력의 주변부에 맴돌며 중앙에 진출하려고 시민단체에 맴돌고 언론에 기생해 있던 그렇고 그런 낭인들로 충원되었다. 그렇게 기득권으로 충원된 진보 낭인들은 강남에 입성하여 자본의 단맛을 누리면서 변질해 갔다. 그들은 포장지는 진보이나 이미 생활과 취향은 자본의 주구로 전락해 갔다.
 
그들 중에 '나는 내 사회적 존재가 내 의식을 결정하지 않게 할 자신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은 다 변한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적은 소유의 삶에서 나왔던 진보의 가치는 부유한 여건에서는 회개해야 할 과거의 아집으로 이해된다. 성직자조차도 변한다. 당연히 정치인이 안 변할까? 개척교회 목사일 때 가졌던 치열한 개혁의식이 초대형 교회가 되면 온데 간데 없어지고 수구꼴통들과 어울려 신선 노름하기 시작한다. 서민들은 진보 정치인들에게서 이런 유형의 모습을 보아 버렸다.
 
정권 바꿔줘봐야 정권 바꾸어 준 주역인 기층민중의 사회적 위치는 불변하고 비판적 정치인들의 배만 불려줘 진보의 전체적 동력만 계속 상실되었다. 이런 체험을 한 서민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려주겠는가. 누구를 위해 돈도 안되는 재주를 넘으려고 하겠는가?
 
기층민중이 지배엘리트로 당당히 들락거리고 지배엘리트가 다시 기층으로 내려오는 선순환구조가 혹립되지 않는한 더 이상 서민은 진보정치인들에 대해 환호하지 않을 것이다. 앞장서서 데모하고 최루탄가스 마시고 곤봉맞던 사람은 지금도 소시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반면 데모를 부추기고 뒷산너머 도망 다니던 누구는 명망가의 맛을 톡톡히 누리는 경우를 족히 보았다.
 
이런 사정을 알아버린 서민앞에 이회창! 그가 선뜻 나섰다.
 
그의 등장은 분명히 진보진영의 진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항구성을 촉구한다. 거짓 진보에 반동하는 새로운 역사가 이회창을 등장 시켰다. 이회창의 등장과 함께 수단의 진보, 거만한 진보,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진보, 이기적 진보는 껍데기를 벗어야만 할 것이다.
 
참 진보로 인정받으려면 권력을 잡기 위해 서민을 이용하지 말고, 권력을 잡든지 못잡든지간에 영원히 서민을 위해 서민과 함께 낮은 삶을 살아 갈 각오를 새롭게 해야만 한다.
 
거짓 진보에 반동하고 있는 역사가 어떻게 이회창을 얼마나 파격으로 이끌고 가는지를 보라. 보수 정치인인 이회창의 첫 대권 행보에 이회창은 양복을 점퍼로 바꿔 입고 차도 바꿨다. 그것뿐이 아니다. 이회창은 기존정치의 격식을 깨고 원로정치인, 원로 종교지도자를 만나지 않았다. 대신 장애인 부부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초등학생 형제를 만났다.
 
아니 이런 파격적 발상이 왜 진즉 여당 정치인에게서는 못 나왔던가? 이미 배부른 원로정치인. 이미 입술의 잔치에 능란한 원로 종교인들을 무엇하러 만나는가? 어느 국민이 감동 한다고 그런 식상한 행보를 아무런 자아비판도 없이 반복했단 말인가. 그들을 만나야만 정치행보를 할 수 있다는 법조항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참 진보는 시뮬라시옹을 벗겨 낸다. 거짓 진보나 거짓 보수는 상징에 기생하고 상징 조작을 하여 대중을 현혹한다. 학벌이라는 상징, 원로라는 상징, 성직자라는 상징, 대학자라는 상징, 스타라는 상징. 참 진보가 깨트려야 할 상징 권력을 이회창이 깨트리고 있다.
 
마침 국민일보의 쿠키 뉴스가 미국의 CBS를 인용하여 베니힌 등 유명목사가 헌금을 유용한 혐의로 미 의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성령의 기적을 행한다는 베니힌, 한국에도 열광적 팬이 많은 베니힌, 매년 수천만 달러의 헌금을 받아 호화생활을 해왔다는 혐의를 받고있다. 한국안에는 예수닮는 청빈한 삶은 없이 입으로만 기적을 외치는 유명목사가 더 많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처럼 생활 없는 진보. 뽀다구 내고 싶은 진보. 말뿐인 진보는 골수깊이 공동체적 의식에 젖어있는 한국사회에서도 외면받고 있다.
 
나는 이번에 이회창의 등장을 역선택의 차원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마음으로 축하한다. 이회창의 등장이 수단으로 진보 운동하는 껍데기는 다가고 참 진보가 결집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필자는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삼별초>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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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1/09 [10: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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