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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는 '광주의 영화'가 아니다
[비평] 쿠데타 세력의 눈으로 본 광주항쟁, 진실은 왜곡되고 허상만 남아
 
이봉형   기사입력  2007/08/04 [14:06]
생애 최악의 영화를 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극중 인봉(박철민 분)이 "쉭쉭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라고 확실히 낯익은 '패러디 연기'를 펼치는 순간엔 정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영화 <목포는 항구다>라는 '조폭 코미디 영화'에서 독특한 웃음을 주며 적잖은 유명세를 떨쳤던 바로 그때 그 '명대사(?)'였기 때문이다!
 
아... 그럼 감독은 이 영화를 아예 희극으로 승화시키고자 마음먹었던 것인가.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소재의 무게감을 다소 덜어내고자, 더불어 최소한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여기저기 유머와 평범성을 버무려 넣었다 들린다. 그러나 정치색의 배제는 리얼리즘과 반목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빛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 수 있는 효과인데 어째서 이 영화는 그 밝디밝은 색조를 가지고도 그야말로 '몽상적 만화' 수준도 못되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냈을까. 무엇보다 감독 자신의 잘못된 역사인식이 그 주된 원인인듯 하다.
 
감독은 8월 3일 자 한겨레 신문 인터뷰에서 "광주항쟁의 역사적 정치적 평가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학생"에도 못미치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제 국민을 살해하면서까지 위헌적 쿠데타를 관철시켰던 독재자가 후기 정파들의 편법적 시혜로 그 죄를 경감받았다. 그 '주변부'가 현재까지도 정치적 사회적 실력을 행사하고 있는 와중에 역사의 평가는 김감독 자신에게만 끝난 것인가?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조금도 진지하지 않다. 주인공들의 '진지한 공포와 절규'는 '실재했던 인물들의 환기(喚起) 때문'이지 결코 영화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의식을 지우면서 진정성도 함께 지워진 탓일까. 이러한 '실패적 관조'는 이 영화의 섣부른 태만과 기만에 따른 결과다. 
 
▲광주 5.18 항쟁을 그린 <화려한 휴가> 정치의식의 거세는 진정성도, 광주의 정신도 지워지게 만들었다. <화려한 휴가>를 패러디한 <화려한 장난>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해 작품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대놓고 말해서 이 영화의 예술성은 "말짱 꽝"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엉성한 플롯과 동화적인 캐릭터 ㅡ 감독이 주장하듯 평범한 캐릭터는 결코 아니었다 ㅡ 는 영화 전체의 개연성과 호소력을 떨어뜨려 감정이입을 도무지 어렵게 만든다. 그럼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관객들은 외계인이라도 되는가? 아니 나조차도 두어번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특히 신애(이요원 분)가 도청에서 밀려나와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잠들어 가는 시민들을 향해 비통의 호소를 울려대는 모습에서 시나브로 눈물이 났다.
 
그럼에도 영화 상영시간 중 7할 이상을, 내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바로 옆의 한 여자 관객은 끝부분 30분 전부터 구시렁구시렁 뒤척이기 시작해 이곳저곳 부산스레 둘러보며 억지로 억지로 견뎌내는 모습이 역력했다. 해서, "눈물의 관객 중에는 광주사태 이후의 젊은 세대도 꽤 많았다"는 식의 몇몇 기사들을 대하자니 선뜻 믿어지지도 믿고 싶지도 않다.
 
그네들은 '정말' 울었을까? 혹시 뜨거운 통곡이라도? 만약 그 눈물들이 진짜였고 또한 이 영화에 대한 폭넓은 동조와 감동의 의미라면 '비난에 가까운 이 비평이야말로 쓰레기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중 많은 양이 '우는 엄마를 무심코 따라 울고마는 아가의 눈물'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반응이지 이해는 아니다. 반응의 눈물은 일상의 망각 속으로 매우 빠르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광주학살은 '현재 진행형의 응어리'이다. 응어리란 놈은 가만 놔두면 자기증식을 꾀하는 암과 같다, 끝내 검은 분노를 뿜어 내고야마는 휴화산과도 같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중항쟁'으로 전이되는 순간 이미 정치적 사건으로 확립된 것이 분명한데 '정치적인 문제'에서 억지로 그 '정치'를 지워버리면 진실은 왜곡되고 대신 거짓이 고개를 쳐들지 않을까.
 
<화려한 휴가>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그것도 100억 원이라는 엄청난 투자를 감행하면서... 여기서 우리는 '과도한 투자비'에 대한 안정적 회수를 위해 김감독 또한 '과도한 타협'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의심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망친 장본인은 '자본의 힘' 즉 '상품성 지향의 힘'인 것이다. 힘은 제대로 발휘돼 관객이 벌써 2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문제가 심각하다. 나는 처음 이 영화가 미래세대의 아이들에게 적어도 한 편의 교과서 정도는 되어주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무했었다. 아이들은 아마도 '이런 영화'를 통해 "아, 국가와 군대가 항상 그 국민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역사적 진실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적어도 '저학년용 수업교재' 정도만 돼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아차 싶다. 그 정도도 못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트장만 '커다랗게 잘' 지어놨을 뿐 의식의 카메라로 '전체를 직시하지도 못'했다.
 
투입된 진압 군인은 '헐리우드적 악마로서만 존재했'으며 반면 피눈물로 저항하는 시민군들은 '오롯한 피해자로서만 성분분리 돼' 있었다. 그렇다면 그 '눈'은 당시 쿠데타 세력의 눈과 '성질적 일치'를 이루게 되고 만다. '그들'(전두환과 휘하의 총잡이들)에게 당시의 광주는 전체 국토에서 오려내야만 할 '빨간'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천추의 한이 될만한 시민들의 고통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자동굴복 장치'에 의해 폭력의 색안경을 끼고 맞서야 했던 말단의 공수부대원들 또한 사태의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마주한 양편의 총싸움 액션 르와르'를, 6-70년대 6.25 영화 수준에도 못미치는 구도로, 곳곳에서 반복 재생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유치찬란한 동화가 아이들의 깨우침과 감성에 과연 좋을까 나쁠까.
 
김지훈 감독에게 말하고 싶다.
 
영화 제작 초기 당신이 두려워 했던 '내공의 부재'는 이제 완벽히 증명되었다고. 관객 동원수와 언론들의 '주례사식 비평'에 속아 어떤 착각 속에 빠져 있다면 어서빨리 헤어나오길 바란다. 그러지 못하면 당신은 또다시 '뭔가'를 증명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진정 부족했던 것은 '내공' 따위가 아니었다. 흥행실패 따위를 두려워 하지 않을 소박함과 예술적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의 영화'가 아니다, 외려 '안티광주에 가까운 영화'이다. 당신은 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역사'를 상품으로 그것도 저질의 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있다. 양심이 있다면 아예 영화감독을 포기하는 게 어떨까 싶다, 나 또한 이런 글을 또 쓰고 싶진 않으니까.
 
 이맹물 씀.
 김장은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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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04 [14:0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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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덕에서 2007/08/12 [22:53] 수정 | 삭제
  • 그날은 일요일이라 나의 아내가 친구들과 우리집에서 계중을 하느라 혼자서 등산가방을 메고 등산이나 갈참에 집을 나섰다.
    마치 5,18 그 날 광주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한 광주시민처럼..

    나는 "화려한 휴가"를 보고왔던 어떤 분과 얘기를 나눈 바가 있다. 그는 어떻게 아직까지 전두환이가 살아있는가에 대해 울분을 토했으며, 나 또한 "김구"를 저격한 "안두희"를 응징하고 응징한 한 의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공감의 뜻을 보내기도 했다.

    문득 생각 난 그날의 일화때문에 혼자서라도 영화를 보아야겠다고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보는데 꼭 누군가가 가야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날은 혼자라는게 조금 쑥스러워 등산가방을 친구 삼아 가지고 갔다.

    나는 두 번 정도 울었다.
    두 번 이면 조금 인간미가 흐르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쉽게 흘리는 횟수이다.
    80년 찌라시로 책으로 너무도 많이 울어버린 까닭일까?

    좋은 영화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선뜻 이 영화를 친구들이나 후배 선배들에게 딱히 권하고 싶지 않았다.

    이맹물님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한다.
    10여년전인가, 십년도 넘었던가 어느날 신문에서 "체"라는 맥주가 나와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상징을 상품화 시켜버린 자본주의의 화려한 네온과 음흉하고 거대한 블랙홀을 느끼게 한다.

    무덤과 언덕이 많은 도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