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사는 대통령 부인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의 표기를 ‘씨’에서 ‘여사’로 변경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요구와 질책, 시대의 흐름에 따른 대중의 언어 습관 변화 등을 심각하게 고민한 결과입니다.”
8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나온 안내문이다. ‘언어의 탈권위화, 성차별적 표현의 배격,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언어의 추방’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한겨레신문은 창간 이래로 대통령 부인 이름 뒤에 붙는 존칭을 ‘씨’로 써왔는데 시대의 흐름과 독자들의 요구를 참작하여 이같이 변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해당 신문사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신문사 결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호칭문제의 불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 좀 더 편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칭에 담긴 권위주의
나는 13년 전까지 개신교 목사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거의 언제나, 거의 어디서나, ‘목사님’이라고 불렀고 호칭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아졌고, 내 허락(?)없이 알아서 부르는 호칭도 많아졌다. 예를 들면, 목사님, 박사님, 교수님, 작가님, 선생님, 사장님, 기사님...
‘사장님’이나 ‘기사님’이라는 호칭은 부업으로 화물차운전을 할 때 들었던 말이다. 기사님이라는 호칭이 제일 적절한 말이고 듣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운전을 했으니 사장님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를 배려해서 불러준 호칭이었기에 불편하고 거북했지만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님’이나 ‘교수님’이라는 호칭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박사 학위도 없고 대학 교수를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 호칭은 목사를 그만둔 나를 부를 적절한 호칭을 찾지 못한 분들이 지레 짐작으로 부른 호칭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설명을 하고 더 이상 그 호칭을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부장님, 과장님, 팀장님 등의 호칭은 그 직책을 부여한 사업체 내에서, 또는 그 사업체와 거래하는 곳에서 부르는 말이다. 그 사업체와 관계가 없는 곳에서 부르면 어색해진다. 마찬가지로 교수님, 박사님 등도 해당 공동체 안에서 또는 연계된 일을 할 때 써야 할 말이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은 학교 내에서 또는 학문적인 일과 관계된 곳에서, ‘박사님’이라는 호칭 역시 그의 전공분야와 관계된 일을 할 때 써야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해당 공동체 내에서 써야할 ‘직책’이 일반적인 호칭으로 둔갑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 특유의 권위주의 때문이 아닐까? 직책을 호칭으로 사용하면 그 호칭이 갖고 있는 차별성과 권위가 드러난다. 하여 대화의 상대를 높이고 존중한다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관습을 우리 사회가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그런 호칭이 사람을 차별하고 계급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라 형과 아우로 나누고 어법을 달리하는 문화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는 나이에 따라 (때로는 특정 공동체에 들어온 순서에 따라) 형과 아우, 또는 선배와 후배를 가르고 어법을 달리하는 문화가 고착되어 있다. 과거보다 지금은 더 심한 것 같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형이나 언니가 되고, 나이가 적으면 동생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본다.
그렇게 관계정립을 하고 나면 형이나 언니는 동생에게 반말을 하고, 동생은 대체로 존대말을 쓴다. 동생이나 후배가 형이나 언니, 선배에게 반말을 하기도 하지만 위계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쓴다. 여기서 끝나면 좋은 점도 많다. 친구나 선후배가 가족처럼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수직적 관계정립과 호칭으로 인해, 둘 사이의 생활양식이나 대화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데 있다. 정서적 갑을관계가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때로는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져야 할 대화나 토론을 방해하기도 한다.
‘님’과 ‘씨’로 단순화하면 어떨까?
우리말은 존대어가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어 불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영어로 대화할 때는 존대어가 따로 없기에 나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정서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성립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분이나 직급이 높은 사람이라도 처음 만났을 때 “Nice to meet you" 등으로 인사를 나누면 인격적으로 대등한 기분이 들고 대화도 동등한 관계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말로는 어떤가.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손아래 젊은이들이나 회사 후배에게 나이 드신 분이나 회사 상사는 “그래, 잘 지내나?” “나도 만나서 반갑네” 등으로 인사를 나누다보면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진다. 그건 예의에 관한 문제고 사람의 인격은 동등하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서는 거의 언제나 합리성보다 앞서간다.
하여 호칭이라도 좀 단순하게 바꿔보면 어떨까. 간단히 두 가지만 우리 사회에 제안하고 싶다.
1. 직책은 해당 공동체와 관계된 곳에서만 사용하자.
2. 호칭은 ‘씨’와 ‘님’으로 단순화해서 사용하자.
사전적 의미로 보면, ‘씨’는 하대가 아니라 존칭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엔 ‘씨’가 나이가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손아래 사람에게 쓰는 말이 되었다. 하여 나이가 엇비슷하거나 손아래 사람에게는 이름 뒤에 ‘씨’를, 나이가 많은 분에게는 ‘님’을 붙여 사용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