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실천적 지평 위에 쓰여진 이념의 기록이다. 모든 서평은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의 주제가 얼마나 많은 지평들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평이라는 평범하고 지루한 작업이 기쁨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경로를 거쳐서라도 그 세계와의 교전(encounter)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야 서평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특유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독자, 저자가 모두 변형(metamorphosis)되는 그 사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텍스트 자체가 이런저런 실험의 결과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텍스트를 통해서는 어떤 지평도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급진적인(radical, 뿌리까지 가 닿는) 질문도, 어떤 특유한 ‘해(解)’도, 요컨대 어떤 ‘지평융합’도 생겨날 수 없다.
▲ 정정훈의 신간, [인권과 인권들] © 그린비 | |
정정훈의 이 책은 그런 방면에서 대지와 같은 지평을 선사한다. 그 장소는 어쩌면 저자가 상정한 대문자 인권(HUMAN RIGHT, 절대적 인권)이 머무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인권(저자의 방식대로 절대적 인권은 이제부터 볼드체로 표시한다)은 단순히 정치철학의 고전들을 탐독하고, 그것으로부터 해석을 이끌어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 자신이 많은 실천들을 해 왔고, 그 ‘현장’에서 어떻게
인권이 아우성치는지를 직접 감각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러한 실천이 가져다주는 ‘대지’는 반드시 필자의 지역적 맥락에서 보편화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그가 대개의 장을 시작하는 그 부분에는 반드시 ‘어디’와 ‘언제’와 또 가장 중요하게도 ‘사건’이 기입된다. 용산 참사의 현장이든, 밀양의 숲길이든, 제주 강정 구럼비든 ... 그래서 그 모든 ‘장소’들이 바로 ‘절대적
인권’이라는 이념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곧 텍스트의 지평을 형성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장소에서,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장에서
인권이 어떻게 ‘물질화’되어야 하는지를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권의 정치는 ‘반체제-이론-감성의 정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론이란 이런 식으로 물질화 과정을 거쳤을 때 진정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법이다. 그리고 이 대지가 마련되고 나서야 독자는 텍스트의 ‘충실성’의 온도를 그 이론적 차원에서 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을 ‘휘말림’의 기록이라고 미리 전제할 때(5), 나는 ‘휘말림’을 촉발인 동시에, 느닷없는 ‘초대’로부터 비롯되는 비의지적인 ‘변형’을 초래하는 힘(역능)으로 파악한다. 최초의 변형은 인권이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이다(7). 이후로 행동과 사유의 방향은 언제나 이쪽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저자가 인권을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한다고 여기는 두 사람, 즉 아렌트와 아감벤은 저자가 애초에 출발했던 그 ‘대지’에서 만날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와 권력이 동일화될 때 인권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게 만드는 인물들이며(158), 이럴 경우 인권이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역능은 애초에 권력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권의 정치가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비판해야 한다.
또 하나의 비판지점은 인권을 ‘도덕적 차원’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인권이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으로 환원되면 그것의 자연권적 측면이 강조됨으로써, 변화된 현실 속으로 그것을 ‘구현’하고, 주장하며, 투쟁하는 역동적 형상이 제거되어 버린다. 이 정치적 주장과 투쟁의 맥락이 있기에, 당연히 인권은 또한 ‘국가제도적인 차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전략적으로 수행되는 인권의 정치, 또는 정치적 인권은 현재 한국 사회 속에서 세 가지 계기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 “①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그것과 결부된 시큐리티[안전] 통치방식 ②인권담론의 약화와 그 이론적 위기 ③공감능력, 즉 인권감수성을 후퇴시키는 시큐리티 통치의 감성의 분할”(63-64). 저자는 이 세 가지 계기를 어떤 식으로 혁파해 나갈 것인가를 차례차례 제시한다. 요컨대 그것은 세 가지 인권의 정치를 구성한다. 즉 ‘반체제의 정치’, ‘이론의 정치’, ‘감성의 정치’가 그것이다(64).
파리 꼬뮌에서 호모 사케르까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여기서부터 빛을 발한다. 저자 정정훈은 곧장 자신이 주장하는 이 정치의 세 형상을 철학적 차원에서 추상화하지 않고, 다시 ‘실천의 대지’ 그 시작점으로 되돌린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의 파리꼬뮌에 이르기까지의 그 기간은 유럽에서 ‘인권’의 형상이 어떻게 변모되어왔으며, 그것이 어떻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저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재해석,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전통적 규정이 아니라 여러 혁명들의 뒤섞임이라는 전진적인 해석을 통해 ‘재정치화’한다(2장). 이 끊임없는 재정치화, 탈영토화, 대지로의 회귀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생성되는 사유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론에 대한 성찰은 역사적-실천적 성찰 이후에 검토된다(3장). 사실상 이 이론적 논의들은 인권을 도덕도 제도도 아닌 정치의 차원에서 논하고자 하는 저자의 욕망에 비추어 봤을 때 상당히 긴 우회로를 거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정치철학자들(맑스, 아렌트, 아감벤, 바디우)은 결국 랑시에르의 이론으로 귀착되는 듯 보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아벤티누스 언덕의 커머너스(commoners, plebis, 평민들)들은 실제로 한국사회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말 그대로 ‘시민’, ‘평민’으로 재맥락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실천!(4장) 여기서 정치적 주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처럼 인권이라는 동일한 ‘대지’(실체)에 뿌리 내린 양태들, 그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주장하고 투쟁하는 그 시민과 평민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5장).
인권-정치의 원점, ‘절대적 잔여’ 마지막으로 저자가 향하는 실천-이론적 지점은 ‘(불)가능한 권리’라는 영역이다. 여기서 인권은 진정한 ‘보편성’의 차원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의 보편적 가치는, 그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하고, 현대 국가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저자가 인정하는 구절들에서 완전히 무화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기, 사유의 모험이 감행된다. “하지만 보편성의 허구적 성격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무의미함과 부당성으로 귀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렇게 되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보편성의 이러한 실현 불가능성이야말로 보편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그것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역설적’ 근거와 같은 것이 아닐까?”(256) 이 질문은 애초에 우리가 ‘급진적인 질문’이라고 했던 그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제 특유한 ‘해’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해들은 하지만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것은 드러날 수 있는데, 첫째로 ‘현행성’(actuality)과 ‘잠재성’(virtuality)의 장을 나누고
인권의 ‘절대적 형상’을 잠재성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둘째로 이제 앞서 말한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권의 불운을 애도하면서 그 자신의 죽음을 끝없이 미루어 놓는 것이다. 저자는 전자의 선택지를 뽑는다. 그리고 애도를 통해 죽음을 유예하기보다 투쟁을 통해 절대적 인권(대문자 인권)의 현행화(actualization)를 ‘영구혁명’의 과정으로 고양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영구혁명은 인권의 잠재적인 절대성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행적 인권들은 절대적 인권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제약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67). “그래서 인권과 그것의 현행적 실존 형태들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과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268). 이 간극과 긴장은 말 그대로 인권적인 잔혹극의 플롯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Fatum)처럼 여겨진다. 끝없는 인권의 영구혁명은 그 실천적 지평의 영원한 확장과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위기와 급변들이 이 플롯 안에 녹아 있다. 모든 참상들, 인권적인 홀로코스트들, 일상적인 추악함과 사각지대에 버려진 노인들과 아이들과 장애인들의 외로운 죽음과 또 저기 죽은 고라니들 ... 이 모든 세상의 ‘막대한 악’(tremendous Evil)을 어떻게 감당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것들이 인권의 정치가 인권이 되기 위해 개간해야 할 실천의 황무지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권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권리, 절대적 이념으로서 인권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정치적 실천”이기 때문이다(279). 이 ‘고집’. 나는 인권의 정치가 가지는 충실성(fidelity)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본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고집’은 바로 “(불)가능한 권리의 잔여들에 대한 (...) 실천”이기 때문이다(281). 그래서 이 고집은 늘 ‘정치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인권의 정치는 바로 정치의 원점이며, 이 원점에서부터 ‘절대적 잔여’(absolute residue)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 영원히 시작된다. 절대적 잔여로서의 인권, 그리고 투쟁의 과정으로서의 실천철학, 이 둘은 충실성의 동일한 두 얼굴이다.
- NomadIa-Redbrig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