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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사태가 남긴 것, 학벌지상주의
[이태경 칼럼] 소수 엘리트 아닌 학벌지상주의의 해체를 위하여
 
이태경   기사입력  2009/01/18 [21:37]
인터넷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가 구속된 이후에 벌어진 논쟁은 미네르바의 진위에서부터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거쳐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속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폭 넓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미네르바는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킨 역할을 한 셈이다.
 
주목할 것은 과점신문들이 이른바 '미네르바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들은 미네르바의 학력-전문대 졸업-과 직업-무직-에 집중했다. 학력이 일천한 백수에게 농락당한 것이 자못 분하다는 것이 이들 과점신문들의 논조다. 독학으로 갈고 닦은 미네르바의 실력은, 미네르바가 몇몇 굵직한 경제예측을 적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그리 깊은 인상을 심어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과점신문들은 경제 전망과 예측은 명문대 학위를 가진 전문가의 몫이라는 생각을 은연중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과점신문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학벌지상주의와 엘리티즘은 네티즌들에게 맹렬히 비판당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점신문들이 직설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학벌지상주의가 과점신문들만의 편견인 것은 아니다. 학벌지상주의는 한국사회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가 된 지 오래다. 유감스럽게도 가까운 장래에 학벌지상주의가 사라질 조짐도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     © CBS노컷뉴스

학벌지상주의에 관한 가장 큰 의문점은 학부모는 학부모들대로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으로 허덕이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시험기계로 전락하는대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왜 그렇게 학벌에 목을 매는가 하는 것이다. 명문대학 진학에 대한 막연한 선호정도로는 입시전쟁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학벌-특히 출신대학-이 경제적 보수, 상징권력, 고용의 안정성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가치 피라미드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학벌이 사회적 가치의 분배 피라미드에서 더 높은 위치를 담보하는 구조가 온존하는 한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건, 국립 서울대학교를 폐지하건, 공교육을 강화하건 학벌지상주의가 약화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는 지금과 같이 극소수만 승자가 되는 입시지옥이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사교육에 의존하지 말자는 외침이 아름답긴 하나 공허한 울림에 그치고 만다는 뜻이기도 하다.   
 
입시지옥을 끝내고 교육을 정상화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교육문제를 사회적 가치의 분배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교육 차원에서만 사고해서는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약 공업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직업을 얻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적정 수준의 경제적 보상을 받으며 사회적 시선도 차갑지 않은 사회가 된다면 애면글면하면서 명문대학을 가려는 사람들도, 입시지옥도, 과도한 사교육비의 사용 같은 자원의 낭비와 왜곡도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런 사회라고 해도 의사와 청소부가 받는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존경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나 지금처럼 격차가 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학벌지상주의를 퇴치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학벌지상주의의 수혜자들이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학벌지상주의 구조에 기대서 사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들도 학벌에 따라 사람의 위계를 정하는 사고방식이 굳어진 상태다. 한 마디로 학벌지상주의는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더해 이데올로기도 장악하는 있는 셈이다.
 
분명한 것은 학벌지상주의가 사회적 가치 분배 시스템의 획기적인 개선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네르바 사태는 학벌지상주의의 실상과 폐해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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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1/18 [21: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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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의진부 2009/01/20 [13:05] 수정 | 삭제
  • "한국사회에서 학벌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학벌-특히 출신대학-이 경제적 보수, 상징권력, 고용의 안정성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가치 피라미드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자본주의적 수렴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안 제시가 가능합니다.

    "다만 교육문제를 사회적 가치의 분배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교육 차원에서만 사고해서는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약 공업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직업을 얻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적정 수준의 경제적 보상을 받으며 사회적 시선도 차갑지 않은 사회가 된다면 애면글면하면서 명문대학을 가려는 사람들도, 입시지옥도, 과도한 사교육비의 사용 같은 자원의 낭비와 왜곡도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법과 제도적 강제를 동원해서라도 '부'의 재분배시스템과 '인재' 승인체계를 바꾸게 해야 합니다. 국가기관 '인재할당제'가 반드시 도입되어야 하고 '학력란 폐지'운동은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노동을 중시하게 해야 하고 공고(실업계)나 전문대에 많은 지원이 필요하고 대학은 분야별 특화로 구조조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교육운동 진영은 입시제도 논쟁에서 빠져나와 이러한 방향으로 한 목소리로 강력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거 말고도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학벌지상주의의 수혜자들이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학벌지상주의 구조에 기대서 사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들도 학벌에 따라 사람의 위계를 정하는 사고방식이 굳어진 상태다. 한 마디로 학벌지상주의는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더해 이데올로기도 장악하는 있는 셈이다."

    접근이 가깝습니다. 즉, 학벌(학력)우월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동장치인데, 다시 말해 한국의 학벌사회라는 특징은 단순한 삶의 안전장치인 경제적 보상이나 물적 소유라는 토대 이상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더 자본주의화가 진척된 사회임에도 '서울대 졸업한 엘리트 가난뱅이(?)'가 정당한 부던 부도덕한 부던지 간에 '부'를 혐오하듯 비난하는 한국 사회 내의 특징인 '도덕적 우위(?)들의 간섭'에 서슴없이 결합하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성과 양심은 천민자본주의와 대립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국의 모든 부모나 선생이 단순히 자기 아이(제자)를 모두 1등 만들려 하고 서울대 합격시키려 하고 나중에 큰 부자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만 그저 자식(제자) 억압하고 두들겨 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거기엔 그 이상의 철학과 사회와 문화와 인간관계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학벌'엔 물적 안전장치 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인격화'된 숭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 세력이 단시 사교육산업을 이끄는 이익집단이라거나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보수권 엘리트 학벌주의자들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좁은 단견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으로서 그것은 한국의 보수와 진보(좌파) 내부에 골고루 스며들어 향유되고 있으며 부자와 가난 사이의 공간에 공통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실속(실용)으로 향유하려는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고 대신 노동보다는 껍데기(신분)를 뒤집어 쓰고 군림해 온 사회로서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두터워진 결과입니다. 앞으로 사회 내 두 단면이 점차 갈등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학벌체제를 해체하여 사회의 고통을 줄이고 노동진보의 디딤돌을 놓겠다면 그것을 해부하고 해체하는 운동이어야 비로소 눈이 뜨이고 관건이 손에 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그 구도에서 음모를 즐기고 있거나 매몰되어 삐끼노롯이나 하고 있으니 허위의식의 또 다른 창조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