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비전 2030'은 터무니없이 큰 주제라 자세한 논의를 할 수는 없지만, 아이디어의 핵심 중 하나는 다음이다. 진보담론은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그 기준은 산업 발전의 현황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어떠한 가능성과 가능성의 한계가 존재하는가이다. "사회주의"socialisme는 1827년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들의 문헌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이 말은 근원에 있어서 공산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와도 필연적인 관계가 없었다. 오웬, 생시몽, 푸리에 이 들의 공통적인 문제 의식은, "산업 혁명이라는 엄청난 도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형상이 유지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사회의 재조직을 이루어 낼 것인가"였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문제 의식만이 진보 담론의 내용은 아니다. 아나키즘이나 공산주의의 전통에서는 인간과 우주와의 근본적인 화해와 같은 영성적 문제라든가 급진적인 평등의 실현과 같은 좀 더 오래된 전통적 주제들이 담겨있고 그 자체로서 고민하고 담아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좁은 의미의 사회주의적 문제 의식과 결합되지 못한다면, 이는 기껏해야 자유주의 좌파이든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넘지 못하고, 대중 투쟁을 일으킬 수 있는 현실적 사회적 대안으로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90년대를 통과하며 생겨난 소위 "진보담론"이라는 것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사회경제적 내용이 빈곤하고, 산업의 현황에 대한 연구와 천착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적 문제 의식을 오히려 대단히 등한시 했던 이들이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를 외치던 "생산력주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공산주의 = 사회주의 + 전력"이라는 무식한 도식으로 자본주의의 테일러주의 포드주의를 그대로 가져다가 전 사회에 실현시키는 악몽을 만들기도 하고, 또 자본 측 지배 계급의 "생산합리화"를 그대로 지지하는 수동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G.D.H. Cole이나 스웨덴의 Wigforss 같은 "기능적 사회주의자"들이 오히려 산업의 현황을 천착하고 거기에서 노동자들의 자유와 복지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현현하려는 현실주의적 모범을 보여준 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2030 어쩌고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진보"의 청사진이라고 믿을 것이다. 답답한 일은, "진보 세력"이 그것을 확실하게 대체할 수 있는, 산업의 현재 상태의 연구에 기반하여 대안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청사진 만드는 작업을 그간 방기하고 있었다는 점이리라. 진보담론은 사회 경제적 문제, 그것도 구체적인 산업 현황에 대한 천착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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