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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는 한반도의 미국종속 신호탄
[홍기빈 칼럼] 동북아 지정학적 관계 무시, 미국 '말뚝국가' 자청하는 꼴
 
홍기빈   기사입력  2006/04/14 [09:51]
19세기의 일본은 밀려오는 서양의 외세 앞에 대응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복잡한 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어떠한 진로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였다.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연대하여 서양 제국주의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다른 아시아 나라들을 먼저 정복해버리고 그 기초 위에서 서양과 동등하게 맞설 것인가. 당시 서양 사정에 정통한 지식인으로서 이름 높았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각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가 내놓은 대답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것이었다.
 
그가 파악한바, 당시 정세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유럽 국가들 사이의 세계다. 여기에는 입헌 민주주의, 국제법, 최혜국 대우의 통상 조약, 문화 교류 등등의 온갖 ‘문명 세계’의 원칙들이 존재한다. 반면 이 세계는 자기 밖의 세계, 곧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유색인종들에게는 전혀 다른 원칙인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적용하여 행동한다. 이렇게 지구가 빛과 어둠의 두 누리로 갈라져 있는 것이 세계 정세라면 일본의 선택은 무엇인가. 아시아를 탈출하여(脫亞) 유럽으로 들어가는 것(入歐)만이 살 길이 아니겠는가.
 
일본인들은 외교 전략과 같이 중차대한 문제를 어느 하나의 원칙만으로 풀어갈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다. 위에서 본 아시아 연대주의, 대아시아주의, 탈아입구론은 모두 복잡하게 얽히면서 20세기에 걸쳐 일본의 명운과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동하였다.

그런데 그 이웃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오로지 ‘탈아입미’라는 원칙 하나만으로 민족의 살 길이 저절로 뚫린다고 믿는 이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외교 정책(이런 것이 존재했다면)을 결정해오고 있다. 현재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들이 드디어 눈 반짝이는 용이 되어 승천할 ‘화룡점정’이라 할 것이다.
 
후쿠자와가 본 것은 욱일승천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과 그 앞에 무력하게 짓밟히는 아시아, 즉 ‘서세동점’의 현실이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세계 최대의 잠재력과 시장 규모를 가지고 성장하는 지역은 어디인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할 지역은 어디인가? 급변하는 세계 에너지 수급 상황과 물류 유통 조건을 볼 적에 힘을 쏟아야 하는 지역은 어디인가? 이러한 여러 조건들의 총체적 표현이라 할 화폐 가치의 안정이라는 면에서 달러를 신봉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을 놓고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계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자유무역협정을 주장하며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이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관계에 어떤 충격이 미칠 것인지에 대해 어떤 대답과 대책이 있는가. 현재의 자유무역협정은 결코 ‘경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느 외무부 관리의 말처럼,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말뚝(stake)’ 국가 구실을 맡게 될 총체적인 지정학적 문제다. 현재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남북 경협과 개성공단은 어떻게 되는가.
 
동아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총체적 대안은 고사하고 숙의하는 단위가 있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무조건 내년 3월까지 매듭지어져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렇게 추진되는 협정에 탈아입미보다 적절한 이름이 있는가.
*홍기빈은 진보적 소장학자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캐나다 요크대에서 지구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와 <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2006) 등 경제연구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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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14 [09: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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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은 진보적 소장학자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캐나다 요크대에서 지구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와 <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2006) 등 경제연구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