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단순 노동’과 ‘복잡 노동’으로 분류한 것은 전형적인 19세기 고전 경제학의 사고방식이었다.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활동은 무진장으로 다양하지만, 삽질이나 똥푸기와 같은 단순 노동이나 변호사 의사의 일과 같은 복잡한 노동이나 인간 활동의 ‘지출’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는, 그래서 후자는 전자가 그저 양적으로 집적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즉 똥푸는 아저씨들이 의대 법대에 진학하여 똥지게를 들고 집집을 돌 시간과 정력을 법전과 의학 교과서에 투여하여 법률 상담과 치료 노동을 하게 되면 같은 시간을 일해도 그 전의 똥푸기에 비해서 몇 배의 생산성을 낳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러한 노동관은 자연스레 단순 노동 = 육체 노동 = 저학력 노동, 그리고 복잡 노동 = 정신 노동 = 고학력 노동이라는 사고 방식으로 연결되었고, 어떤 직종의 노동이 두 개의 기둥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가를 빌어서 그 임금 수준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임금 체계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산업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생겨난 이러한 사고방식이 과연 자동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20세기 후반 이후의 노동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OECD에서 각종 경제 통계를 맡아보는 경제학자였던 카스토리아디스는 그 반대의 현실을 발견하였다. 자동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관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작업장은 물론 사회 전반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일이 고학력 엘리트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엘리트들이 하는 일은 사실 학교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과 절차를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상황과 크게 유리되기 일쑤인 이 엘리트들의 명령을 실제 상황에 꿰어 맞추는, 지극히 골치 아프고 창의력이 필요한 작업은 고스란히 명령 서열의 아래에 있는 하급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전자의 노동은 사실 지극히 ‘기계적’인 것이며 후자의 노동이야말로 점점 ‘창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가 발견한 바였다.
한국 사회는 19세기적인 노동 관념이 대단히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임금 체계의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학부모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방끈 경쟁에 돌입한다. 누가 한국의 교육열이 높다고 하는가. 1년에 반지 목걸이 사는 만큼의 돈도 책에 들이지 않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이란 기실 이 임금 서열의 인간 피라밋을 기어오르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그 피라밋의 위쪽에 자리잡은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은 과연 ‘복잡 노동’을 수행하여 사회의 생산성에 몇 배 몇십배로 기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카스토리아디스가 발견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논리가 현실 상황과 얼마나 유리되었는가를 전혀 돌보지 않은 채 그저 그 형식적 합리성의 틀에 안주하면서 아래에 윽박지르고 있는가. 단순 노동/복잡 노동이라는 19세기의 이분법은 기계적 노동/창의적 노동이라는 틀로 바꿀 것을 생각해 봄직하다. 그저 학교에서 배운 바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이들의 노동은 응당 낮게 평가 받아야 할 것이요, 온 몸을 던져서 구체적 현실과 엉겨붙음으로서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게 하고 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내는 이들의 창의적 노동은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소위 일류대 교수라는 이가 쓴 신문 칼럼을 보면서, 벼라별 일 다 생기는 심야의 편의점을 밤새 홀몸으로 너끈히 지켜내는 앳된 노동자를 보면서, 대한민국은 그러한 ‘자기 혁신’이 절실하다는 것을 오늘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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