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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와 지식권력
 
김동춘   기사입력  2002/06/17 [18:40]
1. 도입 - 지식의 생산과 유통

지식사회를 분석할 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 어떻게 유포되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근대사회에서 지식은 대학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교육, 출판,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유포된다. 대학 밖의 개인과 연구집단, 그리고 운동조직 등도 지식생산의 기지 역할을 하지만 역시 대학이 지식 생산의 가장 중요한 기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식의 범위를 넓혀서 정보도 지식으로 본다면 미디어도 지식 생산의 한 기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지식의 유통은 중.고등학교, 대학에서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주로 전파가 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미디어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교육을 통한 유통은 학문적인 내용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지만, 미디어는 일반인들이 접근가능한 것으로 가공하여 전파하기 때문에 실제 영향력은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의 생산와 유통은 일국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계적인 지식생산의 흐름은 세계자본주의, 국가간의 지배체제의 틀 내에서 진행된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제국주의 모국의 언어와 지식이 자국은 물론 식민지 학생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그것이 식민지의 지식 생산과 유통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금융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이들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이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서 생산되어, 그곳에서 수학을 한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자국의 대학, 미디어를 통해서 전파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물론 언어, 역사와 문화 등과 같은 인문학적 지식은 이러한 세계적 규정력을 덜 받지만, 국제적 자본의 힘이 커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역사문화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비중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지식, 특히 사회과학 지식의 경우 그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정치경제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체제옹호와 체제비판의 지식으로 이분화하는 것이 다소 무리는 있지만, 중심주 자본주의가 생산과 유통의 기지가 되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심부 국가의 공용어가  전달 매체로 자리잡아 모든 주변부의 학생과 지식인은 평생을 중심부 언어 학습에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 언어를 통해 자신이 처한 사회현실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주류'로 자리잡아 대학, 출판,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다. 이 경우 주변부는 독자적인 지식 생산 능력을 갖추는데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중심부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흡수하는데 치중하게 되고, 여기서 대학은 연구와 교육의 불일치, 영구적인 교육 중심 대학 제도가 구조화된다. 그리고 주변부의 미디어는 자국에 관한 정보는 자체 생산하지만, 세계정세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미국에 근거를 둔 거대 미디어로부터 직접 받아서 전파하는 창구역할을 하게 된다.          

2. 지식사회와 지식권력

지식과 권력은 형용모순이다. 지식 그 자체는 자유로운 논쟁과 소통을 전제로 해서 존립가능하기 때문에 권력을 지향하지 않으며, 지식이 곧 권력이 되는 법은 없다. 근대적 지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으며 비판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적 지식인 역시 이러한 해방의 정신으로 무장된 존재이다. 그런데, 지식권력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지식 그 자체가 지배질서의 유지의 하나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는 의미이며, 지식인이 권력자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지식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무기이자 자원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정한 사상이나 가치, 혹은 지식에 매료되고, 그러한 사상이나 가치, 지식을 주창하는 사람들을 따르려는 모습은 과거나 현재나 존재하고 있으나 이것을 우리는 권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만약 특정한 사상이 다른 사람을 사로잡는 것만으로 그것을 권력으로 본다면 예수와 공자는 최대의 권력자일 것이다. 지식권력이라 말할 때는 지식의 힘을 빌어 특정한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고, 권력의 창출과 유지를 도모한다는 것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을 삶의 이론적 형상화 능력, 복잡하게 얽혀진 현실에 대한 설명력과 설득력에서 오는 것이다. 지식의 힘은 언어의 힘에서 오는 것이며, 이 때 언어는 분명한 개념, 논리적 인과관계, 사실과의 부합성, 공유된 언어사용 합의구조 등을 전제로 해서 지식체계를 구성한다.  지식이 이러한 힘을 가질 때 우리는 그러한 지식, 혹은 지식인이 영향력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영향력은 권력과 다르다. 영향력은 사후적으로 획득된 것이며, 사전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향력은 변화를 추구하는 동력이 되기는 하나, 그 변화가 곧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주체에게 가시적으로 구체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상대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그의 행동이 자신의 이해의 추구에 기여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은 자신의 기획 하에 특정한 지식, 지식의 체계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게 되고, 권력의 그러한 속성을 이해한 지식인은 적극적으로 권력화의 시도를 하기도 한다. 즉 지식은 논리적으로는 권력밖에 존재하지만, 실제 정치경제 현실에서 권력과 지식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식의 내용과 방향은 권력과 함수관계를 갖는다.  

사실을 탐구하고, 현상 속에 숨어있는 흐름과 추세 법칙을 추구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를 추구하는 지식은 그 속성상 어떤 권력과도 거리를 두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지식이 자신의 정신에 투철할수록 권력과의 불화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많다. 특히 권력이 특정 집단이나 계급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편들 때, 그리고 '폭력'을 전면에 부각시킬 때, 지식은 한편에서는 권력에 저항하는 양상을 지니고 다른 편으로는 권력의 시녀가 되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정보, 혹은 선동적인 주장이나 언어의 유희가 지식을 대신할 때, 그것은 대단히 비판적인 목소리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중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신문의 논설이나 칼럼, 보도기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원천은 자본에 있다. 물론 자본의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 권력, 일시적으로 자본과 충돌하는 권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는 지식이 주류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자본의 힘은 노동자를 포함한 자본의 비소유자들에게 자본에 접근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켜, 자본축적과 재생산, 시장에서의 경쟁의 승리, 학력 자격 취득 등을 통한 노동력 상품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지식 재생산 기제에 대한 구매력을 높여주고,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학문과 출판, 미디어 생산물이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 경우 자본에 비판적인 지식이 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자본의 포용력을 과시하는 구색 맞추기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고,  그 정도는 아니라면 현실 정치경제적 역학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순수학문, 순수이론적 담론으로 존재한다는 서약하게 존립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지식사회는 상징적인 권력투쟁이 발생하는 장이다. 따라서 실제 정치경제의 장에 비해서 지식사회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식과 담론이 제기되고 다툼을 벌일 수 있다. 그리너 지식사회 자체가 부르디외(Bourdieu)가 말하는 바 어느 정도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진입이 가능하므로 이 지식사회에서의 투쟁도 엄격하게 말하면 공정하지는 않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식사회의 쟁투에 출전한 10명의 선수가 있다고 할 때, 노동자의 대표는 1명인데, 중간층의 대표자는 4명이며 자본의 대표는 5명인 식이다. 대학, 출판과 미디어가 점차 자본에 종속될수록 이 비율은 더욱 불균형하게 될 것이다.  
  
3. 한국의 대학과 미디어  

자본주의 세계체제하에서 주변부에 처한 한국은 독자적인 지식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지식의 일방적 수입국가로 존재해 왔다. 지식수입의 창구는 대학이었는데, 대학의 학제, 교수, 학문체계, 교과서 등은 모두 미국의 대학의 것을 수입하게 되었다. 일본 식민지 하에서 정착된 학문체계, 교재, 교수진은 50년대 말 이후 점차 미국의 것으로 교체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지난 40여년 동안 한국의 대학은 독자적인 이론생산 능력을 갖지 못한 채 주로 교육활동에 전념해 왔다. 한국 대학에서의 연구와 교육의 분리는 곧 노동과정 이론에서 말하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한국의 대학에서 왜 구상의 기능, 즉 연구기능이 부재한 것은 바로 한국의 대미 정치경제적 종속관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지적인 종속상태에 있으나 국내적으로는 국립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한 교육 독점체제가 구축되어 각종 연구 학술활동, 정책입안, 언론기고, 중고등학교의 교과서 편찬 등에 개입하였으며, 이러한 전달 과정을 통해 '수입 지식'은 한국사회를 지배하였다.  

과거에는 지배집단이 폭력적으로 지식의 생산 혹은 유통 기제인 학교와 미디어를 장악하였다. 물론 이 폭력은 물리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지만, 한국에서 87년 혹은 90년대 초반까지 학교와 미디어는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중.고등학교에서의 검정교과서 체계와 교과서에 실릴 내용에 대한 검열, 교사들간의 자율적인 교과 모임에 대한 엄격한 통제, 대안적인 교과서 사용 엄금, 전교조의 불법화와 '참교육' 담론에 대한 위험시, 체제 비판적 발언을 한 교사의 해직조치, 학생사찰기구로서 대학 행정제도, 비판적인 교수의 대학에서의 추방, 대학강의 내용에 대한 검열, 비판적 지향의 학자 지망생의 대학원 진학 금지, 도서관에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의 대출, 복사 금지, 강좌개설에의 통제 등을 통해서 우선 교육 제도에서의 폭력적 행사가 두드러졌다. 결국 학교에서 국가가 설정한 일방적 지식만 생산, 유통되도록 함으로써 교사와 교수, 학생들을 모두 정신적인 장애자로 만들었으며, 그들에게 비판의 용기, 지식추구의 열정을 빼앗았다. 이러한 국가의 지식검열은 한국인들에게 '달리 사고할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하게 하였으며, 권리의식과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시민의 등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창의적인 지적 생산물이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하였다.      

지식의 유통 창구인 출판을 통해서는 국가의 이념과 거리를 두거나 비판적인 모든 출판물을 검열하거나, 판매금지 하는 조치를 통해서 사상과 지식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제하였다. '이적표현물'이라는 국가보안법의 규정에 따라 비판적인 사상이나 이론이 '출판'을 통해 유통될 경우 잠재적으로는 이적성을 지닐 가능성을 안게 되었으며, 70년대 이후 계속되는 출판탄압, 출판인 구속 사태, 각종 필화사건 등이 모두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영향력이 막강한 신문 등 미디어에 대해서는 가장 노골적으로 검열이 실시되었다. 중앙정부부, 안기부가 신문과 방송에 실리는 모는 내용을 사전 검열하여 내용과 방향을 좌우하였으며, 필자가 목격한 바 편집권을 공안기구가 장악했던 가장 노골적인 경우는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전후 신문의 타이틀 활자, 내용 자체를 지우는 행위였다. 공안기구는 언론기관의 소유 지분 변경, 언론사 사주와 간부의 임용, 기자들에 대한 사찰 등을 통해 미디어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내용과 전달될 수 없는 내용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였다.

오늘의 한국인들 중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권력의 지식통제 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신문과 방송을 청취하였으며, 출판물을 접했기 때문에, 이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생각,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기억들, 이들의 철학과 가치체계는 모두 검열을 거처 임용된 교사와 지식인, 그리고 검열을 통해 공식적으로 유포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 경우 현실과 지식의 날카로운 괴리를 느끼면서 성찰과 학습을 병행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그러한 지식의 일방적인 세례를 받았으며,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판단의 기초가 되었다. 7,80년에 실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 그러한 일에 대한 판단의 기초 자료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을 성찰할 수 있는 역사지식과 철학적 지식등이 차단된 상태에서 얻어진 지식, 정보, 정치적 판단과 사회의식은 오늘날 '여론'의 이름,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으로 종종 이용이 되고, 국민들의 정치적 의견으로 포장되어 권력을 창출하고, 지식 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지식시장이 거꾸로 출판과 미디어의 지형을 좌우하는 형국이다.
    
4. 오늘의 지식사회와 지식권력

그러나 90년대 초반이후 한국 사회 특히 한국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는 이제 과거와 같은 물리적 폭력 대신에 점차 상징적인 폭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대자본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에 개입하여 지식생산과정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작업을 하고 있다. 대학의 이사회와 이사장, 큰 출판사의 사장, 언론사의 사주는 지식사회의 실제 권력자이다. 지식 생산지로서 대학은 이제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적극적인 요구, 지적 생산물의 가장 중요한 고객인 기업의 요구에 의해 점차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가게되었으며, 출판과 미디어는 소유주 혹은 광고주로서 자본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편 사회의 다원화에 따라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공급자보다는 소비자가, 생산보다는 유통이 지식의 내용을 더 크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종말'을 논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즉 자본이 출판과 미디어를 지배하게 되면서, 지식인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점차 박탈당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들 출판사와 언론사에 기생하여, 그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지적 생산물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거대 자본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게 되면서 오늘날 대학에서는 이러한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학과나 강좌는 폐쇄, 축소의 운명을 맞게 되었고, 교육과 출판 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훨씬 커지면서 지식인들은 미디어에 기대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보편적 지식, 교양적 지식, 인문학적 지식이 설자리는 점차 상실되었다. 자본의 대학 길들이기 작업은 기본질서를 비판하는 연구작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거나, 그러한 연구를 하는 연구자를 배제하고, 기존 질서를 칭찬하는 연구자들을 지원, 격려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의 '선택'이라는 양상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즉 학생들인 자본이 필요로 하는 전공과 지식을 학습해야 직업을 갖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는 지식 분야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대학교수의 충원에 있어서도 재단 이사회 등의 권력이 개입하여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심사'의 외양을 지니면서 비판적인 학자들이 진입하는 것을 차단한다.  

자본의 언론을 통한 지식사회 길들이기 역시 이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즉 그 언론이 대변하는 집단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지식인이나 학자들에게 지면을 주지 않고, 옹호하는 지식인들이나 학자들에게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미디어를 통해서 영향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을 길들인다. 그리하여 이들 지식인들은 영향력 있는 언론의 한 식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발언이나 주장을 생산해 낸다. 이 경우 거대 언론의 지면을 계속 타게 되는 지식인은 하나의 지식권력, 문화권력으로 등장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언론권력일 따름이다. 즉 지식인은 권력권에 접근하기 위해 언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언론은 자신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해주는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 한국의 경우 학자가 매스컴을 타게 될 경우, 정치권에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고, 설사 정치권 진출의 의사가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학교에서 충족되지 않는 영향력 확대의 욕구를 실현시켜 줄 수 있다. 언론은 이러한 의사를 가진 지식인들을 주목하고 있다가,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할 사람들로 이들을 활용하게 된다. 정치권도 그러하지만, 언론 역시 자신이 더 이상 이들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이들 지식인은 하루아침에 용도폐기된다. 이렇게 되면 그의 권력의 원천은 자신의 지적인 영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판명되기에 이른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은 생산을 지배하고, 이미지와 정보가 지식을 압도한다. 그리하여 원인을 탐구하는 지적인 활동은 점점 주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을 통해서 유포되는 언어는 인과관계, 사실판단을 흐리게 하고 대중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주장들, 악의적인 공격들로 가득차 있다. 이 점 때문에 오늘의 지식사회는 사실상 미디어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미디어가 지식권력을 창출한다. 그런데 미디어는 시장과 고객, 즉 자본의 요구에 점점 더 의존하기 때문에 미디어를 통해서 얻어진 지식권력이라는 것도 사실상은 자본의 힘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출판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미디어를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적 성과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각오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자본에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미디어가 대중들의 단기적 관심과 유행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다면, 미디어 상의 논쟁도 현상의 근본을 캐거나 공동체의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기 어렵다.

지식권력, 혹은 문화권력 담론은 바로 지식과 문화의 대중화, 미디어의 지배가 낳은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문화가 엘리트주의적이고 의례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었고, 그때 문화는 더러운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성격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확장 속에서 그런 미학적 전제는 거의 무너졌다. 지적 생산물이나 문화 작품이 그저 상품으로 환원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과 권력의 자장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을 것은 자명하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 문화는 어떤 영역보다 더 사회적 차별과 차이를 재생산하고, 심지어 정치적·경제적 차별을 미학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한다. 즉 지식과 정보가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고, 사람들을 그러한 방향으로 쇄뇌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안티조선, 이문열 비판들은 모두 과거 물리적 폭력의 대행자였던 [조선일보]가 오늘날에는 '언어'를 통한 폭력행사와 노골적인 지배질서 옹호에 가능 교묘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새로운 운동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권력의 기초 즉 대학,출판,언론의 의사결정 과정을 누가 지배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식인에 이들 문화권력 기제에 굴복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식인이 전통적인 도덕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입각해 있는데, 이러한 당위론이 도덕적으로는 힘을 가질지 모르지만, 권력의 정치경제적 재생산 기제를 문제삼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지식인들만의 운동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의 운동 역시 단순한 도덕적 순결성을 유지하는 것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어떻게 지식의 생산자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90년대 후반 한국 지식사회에는 이제 생산적인 정책논쟁, 이념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오직 그들의 정치적 자세만을 문제삼는 담론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담론적인 쟁투가 사실탐구에 익숙하지 않는 90년대 젊은이들의 취향과 부합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지식의 인프라 자체가 없다는 점에 더 눈을 기울여야 한다.

* 필자는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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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6/17 [18: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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