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들을 아주 싫어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려고 애는 쓴다.
우리말에서 ‘아저씨’, ‘아주머니’는 원래 특정한 친족을 가리키거나(지칭) 부르는 말(호칭)이었다. 1970년대 교과서에서만 해도 흔하게 나왔던 이 호칭은 지금은 쓰임새가 사뭇 달라졌다. 더이상 아버지의 2촌, 4촌 형제를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아버지 형제의 배우자를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신 그 의미를 생판 남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타인에게 친족 호칭을 쓰는 건 타인을 자신의 가족인 양 대하고 싶다는 친근감의 표시일 것이다. 한국처럼 친족과 친족 아닌 사람의 경계가 뚜렷한 폐쇄적인 사회에서 피 안 섞인 타인을 친족의 일 원인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른다면 대단한 호의다. 인간관계를 꾸리는 데 큰 이득으로 작용할 것이다.
‘오빠’도 아저씨, 아주머니처럼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성 타인을 친족처럼 대하고 싶을 때 쓰지만, 여성이 자기 남편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타인에게 가족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족에게 다른 성격의 가족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말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들다. 우리말에서 오빠라는 말 외에 친족 용어가 이런 식으로 가족 관계 안에서 탈바꿈하여 쓰이는 일은 없다. 남편의 형제를 ‘삼촌’으로 부르거나 남편의 여자 동기를 ‘고모’라고 부르는 경우가 비슷한 사례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자신의 아이 기준에서 (아이) 삼촌, (아이) 고모로 부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자가 자신의 배우자 남편을 오빠라고 하는 건 아내로서 자신과 동등한 남편 지위를 한 칸 격상시키는 행동이다. 남편에서 오빠로의 지위 상승, 듣는 남편은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엄연히 있는 말을 고분고분 주어진 대로 쓰지 않고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말에 기웃거리는 것. 이는 그 말을 쓰는 사람 처지에서는 주어진 언어 담론이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이라는 용어가 주는 평등한 뜻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보게 만든다.
더욱이 오빠는 주로 젊은 여성, 정확히는 결혼 이력이 길지 않은 여성의 입에서 집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중장년 이후의 여성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 나이 때의 여성은 결혼 이력이 길어지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는 평등하게 바뀌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빠라는 호칭은 성장기 시절 가족 내에서 평등한 지위를 누려보지 못한 여성이 비록 자신의 의지로 새로 개척한 가족 관계일망정 배우자와 대등한 권력 관계가 적용되지 않음을 발견한 결혼 생활에서 등등한 부부 관계를 정립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까.
언어의 생김새만으로만 본다면 부부 관계는 적어도 평등하다. 남편과 아내의 각각 고유어는 ‘지아비’, ‘지어미’로서 이름에서부터 짝을 이룬다.(용어의 어원과 실제 쓰임새의 차이를 찾는 발상은 철학자 김용석의 한겨레 칼럼 '엔터테인먼트: OTT 삼매경에 잊은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아비와 지어미의 ‘지-’는 ‘집’이 변한 말이다. 한 집안을 운영하는 아비, 어미 한 쌍이니 평등함이 넘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 현실에서 지아비와 지어미는 동등하지 못했다. 부부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 그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 여성의 성장기 또는 친정 가족 관계에서 관철된 가부장적 구도가 결혼 이후 새로 형성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여성의 ‘오빠’ 지칭이다.
성장기 시절 아버지 대신 또는 아버지에 준하여 자신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오빠의 위상으로 남편을 대하려는 여성에게, 결혼으로 이룬 가족 관계는 결혼 이전 자기 생애의 주로 미성년 시절을 점하는 원 가족 관계와 다르지 않으며 그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읽힌다. 이 지경이면 두 사람의 독립된 성인이 자신의 자율 의사에 따라 형성한 가족으로서 결혼 제도는 무색해지는 데까지 이른다. 미성년이든 성년 이후 새로 가족을 일구든 여성의 전 생애에서 가족 관계가 얼마나 자신에게 가부장적인지 알 수 있다.
오빠 못지않게 해괴하다면 해괴한 느낌을 주는 가족 용어가 북한에 있다. 남편을 ‘나그네’라고 부르는 것. 이 경우는 자신의 가족을 아예 가족 범주 바깥에 옮기는 행위로서, 아내에게 남편은 허물없는 가족이 아닌 어쩌다 오는 손님으로 깍듯이 대접해야 할 가족 아닌 가족이 되고 만다.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보다 더 남편을 격상시켰으니, 남한의 가부장 제도보다 더한 것을 북한에서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오래전 TV의 북한말 알아맞히기 퀴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는 남편을 어떻게 나그네라고 부를 수 있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나그네는 비단 북한에서만 쓰이지는 않는다. 남쪽 바다 섬 출신인 엄마한테서 똑같은 말을 듣고 자란 내게 나그네는 전혀 낯설지 않은 말이다.
다행히 요즘은 자신의 남편을 오빠라는 부르는 사람이 예전보다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오빠라는 오글거리는 말은 이 말이 쓰이는 촌스러운 시대의 본색을 보여주는 초상이라는 점에서 곱씹어볼 가치가 많다. 말에는 목숨이 달려있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 뻔한 용어를 당대에 고찰해 두지 않으면 때를 놓칠 수도 있다. 먼 훗날 세대가 배우자를 오빠라고 불렀던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이 죽어버린 다음에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제때 해놓으라고 촉구하는 이 대단한 일을 여론 역량이 엄청난 집권 여당이 해냈다.
더욱이 여당은 대통령 부인을 남편에게 결코 스스로 차별하는 말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 시대 여성들이 부디 모범적인 대통령 부부 관계를 잘 보고 평등 의식을 배우기 바란다는 숭고한 뜻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여당은 오랜만에 정당의 소임에 충실한 역할을 해냈으니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