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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선원, 노예, 해적, 무법자들이 만든 해양역사
[갈무리의 눈] 레디커의 『대서양의 무법자』,역동적인 해상세계 분석
 
오항녕   기사입력  2021/12/28 [14:42]

‘뱃동지’에 대한 연대

 

우연

 

어떤 사건이든 구조, 의지에 반드시 ‘우연’이 개입한다는 게 내 지론인지라 운(우연의 낭만적 표현)이 낯설지는 않지만, 그 운이 유난히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사실이다. 레디커의 《대서양의 무법자》를 만난 일이 그랬다.

 

대개 나에게 서평을 의뢰하는 언론 또는 출판사는 착한 곳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서평을 써주면 책 2권을 준다는 접근도 신선했다. 비(非) 자본주의적 접근, 즉 물물교환인 셈이다. 상품화하지 않는 방식.

 

‘역사 없는 사람들’

 

이번 학기 강의 교재로 에릭 울프의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박광식 역, 뿌리와이파리, 2015)을 썼다. 울프는 자본주의 팽창이든, 본원적 축적이든, 세계체제든, 인간 사회들이며 문화는 우리가 이들이 시간 속에서 또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 의존하는 구체적인 양상을 그려볼 수 있게 돼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친족제 생산양식, 공납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도로 600년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라나지트 구하는 아예 책 제목을 《역사 없는 사람들》로 잡았던 덕이 있다.(이광수 역, 삼천리, 2011) 헤겔은 비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마르크스도 농민을 비롯한 비 유럽을 대상으로 ‘역사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이 태도에 대한 비판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인도 역사가들의 ‘서발턴 역사’로 개념화되기도 하였다.

 

바다

 

▲ 마커스 레디커의 '대서양의 무법자' 표지     ©갈무리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역사가들은 종종 세계가 얽혀서 향료, 금, 모피, 노예 무역을 매개로 각 대륙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서술했다. 19세기 이후 역사학은 유럽-비유럽으로 세계를 나누는 유럽 중심주의만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 속에서 중앙 중심주의도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인구의 수도권 집중에 한국사(역사) 교과서의 중앙 중심주의가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브리스틀 기록보존소에 있다는 유명한 그림, ‘아프리카 노예선의 하갑판 그림’(레디커 21쪽)이 영국 군함이 베드포드호 하갑판 그림과 같다는 데 나는 놀랐다. 노예와 ‘자유’노동 모두를 포함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 계급 관계는 이처럼 배를 통해 마련되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영토

 

유럽 중심주의, 중앙 중심주의에 이어 레디커는 근대 역사학의 육지 중심주의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언젠가 “육지중심주의는 이성-남성-국가-서구 중심주의보다 훨씬 더 뿌리 깊고, 그 흔적은 더 은폐되어 있는 의식”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땅에, 그것도 내륙 깊숙이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있던 나는 뭘 그런 걸 다, 하는 식으로 넘겨버렸다. 하지만 육지 중심주의가 바다에서 이루어진 ‘역사 없는 사람들’의 삶을 은폐한 것은 은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근대 국민국가의 영토성이 그 경향을 부추겼을 것이다.

 

패도(覇道)

 

레디커의 이 책을 보기 전에 나는 그가 피터 라인보우(얼마 전 갈무리출판사에서 온라인 강의를 주선했던, 《도둑이야》의 저자)와 함께 쓴 《히드라》를 읽은 적이 있었다. “(잠바띠스따 비꼬나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사상가는 물론) 지배자들은 여러 머리의 히드라에게서 헤라클레스와 반대되는 무질서와 저항의 상징을, 즉 국가, 제국 및 자본주의 건설에 가해지는 강력한 위협을 발견하였다.” 사실 근대 국민국가의 강력함을 내면화한 현대인들에게 히드라라는 다른 중심=부분의 이미지는 과거보다 훨씬 떠올리기 어렵다.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주자(朱子)나 그 선배들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판했다. 그때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해주는 듯했던 신법을 비판한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해석했다: 주자(朱子)에게 '현(縣)'은 중앙정부의 연장이자 국가권력의 표현이었다. 가난한 농민에게 곡식이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돈은 국가에서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역시 국가(이 경우는 중앙집권 국가) 중심의 해결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주자는 시폐(時弊)를 국가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지역(향촌, 마을)의 자율성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않는 시도를 거부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은 곧 국가권력의 강화, 법제의 강화를 의미하였고, 패도(覇道)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자나 후대 조선 사람들은 근대인들보다 '국가'에 훨씬 덜 포섭되어 있었다. 사유나 존재 두 측면에서 모두 그랬다. 나라=왕조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관리의 대상,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긴장성을 놓치면 우리는 근대 국민국가의 전일성(專一性)에 포섭된 채, 아니 그 획일성을 내면화한 관점으로 역사를 포맷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왕안석의 신법을 ‘개혁정책’으로 이해하는 역사학자들을 이해한다. 근대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기 쉽다.

 

늘 국가 제도가 공정한 것은 아니며, 또 제도가 공정하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공정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포식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근대국가는 더 심하다. 물론 ‘시민사회’에 해당하는 히드라가 어떤 모습을 띠느냐에 따라 포식성=강제성=폭력성을 제어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될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공통장(commons)

 

피터 라인보우의 《도둑이야》를 보면서도 ‘공통장’이라는 번역어가 낯설었다. 그동안 ‘공유지’로 번역해온 용어일 것이다. 이때의 공유지는 인디언의 말대로 ‘사고 팔 수 없는 대지’를 말한다. 그런 면에서 공유지의 맞은 편에는 사유지와 ‘언제나 사유지가 될 수 있는=사유화할 수 있는’ 국가 관할의 국유지가 있다.

 

육지의 경우라면 공유지라고 번역해도 상관이 없겠는데, 《대서양의 무법자》의 경우처럼 ‘광대한 해상 공통장’(19쪽) 식으로 바다의 commons라면 ‘공유地’라는 번역어가 적절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바다의 경우 공해(公海)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건 국제법상의 용어일 뿐이다.

 

노예선

 

에릭 울프의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제7장이 ‘노예무역’이었다. 여러 차례 강의 교재나 세미나 읽은 적 있는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유강은 역, 이후, 2008)의 제9장 ‘복종 없는 노예제, 자유 없는 해방’을 중심으로 노예무역을 설명했는데, 그 도움도 받았다. 울프를 통해 ‘색깔 구분이 없던 노예제’에서 ‘아프리카 노예’로 바뀌는 과정, 인디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잡혀온 이유,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임노동자로 대체되는 과정, 유럽 상인+회사에 협력하는 아프리카의 왕국, 친족집단들을 알았다.

 

정작 나는 노예선을 놓쳤다. 나는 레디커의 《노예선》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브리스틀 기록보존소에 있다는 유명한 그림만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말았다. 이번 《대서양의 무법자》를 읽고 알았다. 6장 ‘아프리카인의 반란:노예에서 뱃동지로’. 다행히 학기가 끝나기 전 서둘러 6장을 요약하여 보충 강의를 했고, 노예무역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노예선의 ‘인간’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서평 의뢰가 고마웠던 이유이다.

 

덕분에 우리는 노예선 위의 단식투쟁, 뛰어내리기, 봉기,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뱃동지 의식이 그후 아메리카의 황야에서, 농장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노래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음도 알았다. 노예들이 겪은 그 어떤 고통에 대한 고발이나 묘사보다도 ‘검은 노예’가 나와 같은 인간임을 자각하게 해준 서술이었다. 농민들의 소작쟁의, 노동자 파업, 그리고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의 숨겨지거나 드러난 삶의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인간 공통의 느낌을 되살려주었다. 이렇게 노예선에서의 조직과 저항, 유대는 기말고사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 글쓴이는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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