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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위한 준비, 산골인가 수목장인가
[류상태의 문화산책] 언젠가는 우리 모두 돌아가야, 흔적도 남지않게...
 
류상태   기사입력  2016/12/05 [18:51]

 1. 언젠가는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한다


생명체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을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하는 우리말은 ‘죽음’이 되겠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사망했다’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이 말은 ‘죽어서 망했다’는 뜻이다. 그냥 죽었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죽어서 망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은 망하는 것,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공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망이라는 말보다 좀 더 부드럽게 예를 갖추어 쓰는 말이 ‘별세’다. ‘세상과 이별했다’는 뜻이 되겠다. 기독교에서는 ‘소천’이라고도 한다. ‘하늘(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긍정적인 뜻이 담겨있다. 죽음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자연’이라고 해도 좋겠다)의 부름을 받아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말 ‘돌아가셨다’는 말도 이런 점에서 괜찮은 표현일 수 있겠다.


언젠가 우리도 모두 돌아가야 한다. ‘언젠가 누구나’ 가야 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죽음 자체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을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 찾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나이와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내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올해 초부터였다. 우리 세는 나이로 60이 되면서 갑자기 찾아온 생각이었다.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너무 젊은 사람이 그날을 준비한다면 이르고 어색할 수 있겠지만 나이 60이면 그리 빠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는 것도 비극이지만 너무 오래 사는 것도 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따로 자세히 쓴 글이 이곳에 ‘가난한 사람의 노후대책, 이건 어떨까?’라는 제목으로 있다).


자연이 허락하는 생명체의 생존기간은 대체로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인 것 같다. 인간도 이런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지구마을 전체의 조화와 질서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하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살다가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삶’, 여기엔 적극적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것도 포함한다. 다친 부위를 치료하는 건 좋지만 깊은 병이 찾아오면 그냥 수용하고 싶은 것이다. 이빨이 아프면 통증을 치료하거나 썩은 부위를 때우는 정도는 하겠지만 임플란트를 하거나 틀니를 만드는 건 피하고 싶다. (내가 계속 ‘~하겠다’가 아니라 ‘~라고 생각한다’ ‘~싶다’고 쓰는 이유는 미래에 대해서는 장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다 사고기능은 쇠퇴하고 생존본능만 남아 살려달라고 주책을 부리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존엄한 죽음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2. 용미리 자연장지와 벽제화장터 내 유택동산


내가 용미리 자연장지를 처음 찾아간 날은 꼭 두 달 전인 2016년 10월 5일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용미리는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다. 서울시와 고양시 파주시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다. (그 외 지역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지만 화장을 포함한 시설 사용 비용이 훨씬 비싸다).


이곳은 원래 매장을 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매장은 받지 않고 화장 후의 분골을 안치하거나 묻는 곳이 되었다. 봉안시설은 지금도 운영하지만 일반인은 사용할 수 없고 몇몇 조건을 갖춘 경우(‘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또는 국가보훈법에 따른 공헌자’)에만 허락된다.

 

하여 사실상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산골과 자연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산골은 화장한 골분을 지정된 장소에 뿌리는(‘흘려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것이고, 자연장은 골분을 잔디밭이나 나무 아래 묻는 것이다. 나는 용미리 자연장지의 여러 곳을 살펴보고 사전에 정리해두었던 정보들과 비교하며 사진으로 담아왔다.


아내와 함께 용미리 자연장지를 다시 찾은 날은 10월 28일이었다. 첫 번째 답사 때 자세히 보아두었던 자연장의 몇 가지 형태를 아내에게 설명하며 다시 살펴보았다. 매립이 끝난 곳은 잘 정돈된 정원처럼 보였으며 안장된 분의 이름과 생몰년월일이 간단히 표시되어 있었다.

 

▲ 이제 그날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아닌지...     © 구글 이미지


매립 중인 곳도 살펴보았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공간은 사방 약 30cm 정도. 지름 15cm, 깊이 50cm 정도로 파놓은 곳에 골분과 마사토를 섞어 묻게 되어 있었다. 수목장은 작은 나무 둘레에 한 그루 당 36위 정도를 묻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매립이 끝난 수목장에는 그루당 12위인 것도 있고 24위인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루당 12위였는데, 수요가 늘어나면서 24위, 36위로 점차 그 기준이 바뀐 것 같다.


산골장소도 자연장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땅과 평행이 되도록 지어진 시멘트구조물이 몇 군데 있었다. 가로 세로 깊이가 3미터 10미터 3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구조물당 6개의 뚜껑이 있었는데 그것을 열고 골분을 뿌리는 것 같다.


이 구조물을 보기 전까지 나는 거의 산골 방식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설을 보면서 정서적 거부감을 느꼈다. 별세한 분을 이곳에 ‘모신다’기보다 그냥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연장 중에 수목장이 제일 좋겠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처음 가졌던 산골 방식에 대한 미련(?)이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도 땅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데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할까? 완벽하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가장 환경친화적인 방법은 단연 산골이다. 내 가슴이 원하는 곳은 수목장이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산골로 향했다.


12월 1일, 벽제화장터 내에 있는 유택동산이라는 곳을 찾아가보았다. 이곳은 화장한 유골을 용미리 시립묘지까지 직접 가지 않고 화장터 내에서 산골하는 곳인데, 한 달에 두 번 정도 용미리에 있는 추모의 집(산골장소)으로 옮겨 안장한다. 결국 용미리의 산골시설에 안장된다는 결론은 같지만 과정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심리적 거부감은 훨씬 덜했다.


3.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오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달라는 유언을 나는 이미 5년 전에 내 글방(DAUM 카페 <류상태 글방>)에 올려놓았었다. 지금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사후 저의 몸은 화장을 하고 벽제 화장터 내 유택동산에 산골하여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내용은 서너 번 수정했다. “법이 허용하는 곳에 산골” “용미리 자연장지” 등으로 바꾸었다가 지금은 위의 내용으로 정리했다. (마음이 바뀌면 다시 수정할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아내와 자세히 의논했다. ‘기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내는 내 생각을 납득해주었고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내 역시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몇 가지 염려되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면 아이들이 허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가끔 가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가 처음 산골장소를 보고 가졌던 정서적 거부감을 아이들도 느끼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 아내의 염려였다.


아내가 제기한 문제는 산골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거부감들이다. 산골은 여러 사람의 골분을 모아 마사토에 섞어 함께 안장하는 방식이다. 자연훼손이 가장 적지만 다른 사람의 골분과 섞인다는 것에 정서적 거부감을 가질 수 있겠다. 실제로 몹시 가난했던 나의 어느 지인은 “거기엔 강도도 도둑놈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과 섞이기 싫다”며 산골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유언하고 떠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함께 묻히는 일이 정서적으로 훨씬 좋을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동시대를 같이 살다 간 사람들이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사회에서 살다갔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 소중한 인연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니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닐까?


또한 그들 중에 강도도 도둑도 있겠지만 그건 지난 일이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본래는 모두 부처님들이고 보살님들인데 어쩌다보니 그 길로 빠진 가여운 이들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딸들이다. 예수님은 잘나고 힘세고 가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들을 더욱 보살펴주고 품어주시지 않았던가.


“가끔 보고 싶을 때 가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도 아이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념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을 꼭 죽은 그날, 묻힌 장소에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내가 아이들과 또는 아내와 함께 했던 내 삶 속에, 내 말 속에, 내가 써놓은 글들과 책들 속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게 더 좋다. 기일이 되면 묻힌 곳을 찾아가는 것보다 아이들이 카페에 모여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아빠의 삶과 글을 추억하며 보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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