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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의 노후대책, 이건 어떨까?
[류상태의 문화산책] 존엄사에 대한 논의, 이제 적극적으로 시작해 보자
 
류상태   기사입력  2016/05/22 [15:06]

1. 바이러스와 인간의 공통점
 
“생명체는 거의 모두 상생하며 살아가지. 그런데 주변을 가차 없이 파괴하면서 오로지 자기 번식에만 몰두하는 놈이 둘 있어. 하나는 바이러스고 또 하나는 인간이야.” 영화 <매트리스>에 나오는 대사다.
 
3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마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7억이었다. 지금은 70억이 넘는다. 통계에 의하면 살아갈 공간을 인간에게 점차로 잠식당한 다른 생명체는 앞으로 50년 내에 30~50%가 멸종 될 것이라고 한다.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50살을 넘기지 못했지만 이제는 칠팔십도 아쉬워 ‘998824’라는 말이 등장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담은 말이란다. 최근에는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 안에 담긴 “못간다고 전해라~”라는 말이 크게 유행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모두 백 살 가까이 살고 싶어 하면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공간을 빠른 속도로 파괴하고 잠식해가면서도 인간은 과연 지구별에서 오래오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2. 나이 육십에 세운 완벽한 노후대책
 
작년까지 나는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아니, 세울 수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12년 전까지는 노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서울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게 될 줄 알았으니까. 20년 이상 교사로 근무하고 은퇴한 사람의 노후는 사학연금으로 충분히 해결된다.
 
그런데 2004년 가을, 나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갑자기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부었던 연금은 약간의 이자와 함께 퇴직금으로 모두 돌려받았다. 덕분에(?) 두 아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후대책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들은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 혹 언짢은 마음이 드시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나는 올해 우리 세는 나이로 육십이 되었다. 육십년을 살았으니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의 집착이나 미련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지고 있던 여러 가지 마음의 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육십이면 팔구십 어르신이 보기엔 아직도 팔팔한 나이겠다. 하지만 하늘이 인간에게 준 생명의 연한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할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별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 아름다운 별에서 인간만이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삶의 질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매 순간순간 즐겁게 살다가 하늘이 부르면 언제든지 기꺼이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면 인생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노후를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어지니 젊었을 때의 인생을 더 멋지고 신명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만일 큰 병이 찾아오면? 수술을 하지 않고 통증치료만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명보험이나 사설건강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적은 생활비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일산 변두리에 내 집이 한 채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 없는 이웃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일 게다. 하여 우리 사회가 노인과 청년층의 주거문제만이라도 해결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다음 선거부터는 이 문제 해결에 진정성을 보이는 정당을 찍어주고 싶다. 
 
3.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하여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다. 언제든 하늘이 준 내 생명의 연한이 다 되었다고 판단될 때, 더 이상은 존엄한 인격체로 살아가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 주변의 축복을 받으며 내 인생의 문을 스스로 닫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가능할까?
 
고대 로마에서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존엄한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삶을 정리하는 걸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영화 <쿼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에 네로 황제의 책사로 나오는 페트로니우스가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페트로니우스는 그 자리에서 네로의 비위를 맞추는 추한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하인이 놓아주는 주사를 맞으며 최후를 맞이한다.
 
서구사회에서 존엄사에 대한 논의는 벌써 시작되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명확한 기준을 세워 이미 시행도 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 이건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내 아내와 아이들도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도 대화는 계속 하고 있지만 아직도 아내와 아이들의 동의를 완전히 받아낸 건 아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노년의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고통스런 삶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거기서 절약되는 돈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분들을 더욱 돌보고 치료하는 데 쓴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텐데...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두려워하는 건 때를 놓치는 거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족이나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비참한 노후로 이어지는 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아, 정말 이런 상황은 꼭 피하고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이런 대화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농부철학자 윤두병 선생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 중에 <내가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혁명공약으로 걸어놓은 글이 있다. 그 공약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이 육십이 넘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안락사를 허락한다.”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출마한다면 꼭 그를 찍으리라.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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