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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의 산실 목포정명여중을 가다
독립만세시위 주도, 2012년 광복절에 7명의 여성 애국지사 포상
 
이윤옥   기사입력  2012/10/18 [10:11]
터졌고나 죠션독입셩
십년을 참고참아 이셰 터젓네
삼쳘리의 금수강산 이쳔만 민족
살아고나 살아고나 이 한소리에

피도죠션 뼈도 죠션 이피 이뼈는
살아죠션 죽어죠션 죠션것이라
한사람이 불어도 죠션노래
한곳에셔 나와도 죠션노래

▲ 1983년 교실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된 독립가(왼쪽) 격문(원본, 독립기념관 소장)     © 정명여중

위 노래는 목포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학생들의 독립가이다. 이 자료는 1983년 2월 중학교 교실 보수작업 중에 발견된 것입니다. 바로 이 건물 천장에서 발견된 것인데 보관상 어려움이 따라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있으며 우리 자료관에는 복사본이 있습니다. 어서 가서 보시죠” 정명여자중학교 정문주 교장 선생님은 10월 16일 서울에서 단걸음에 찾아간 필자를 친절하게 자료관으로 안내했다.

자료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목포지역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지은 것으로 선교사 사택으로 쓰던 곳이다. 이 건물은 목포의 석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곳에는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학교답게 독립가 등 당시의 함성을 알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목포정명여중 독립자료관     © 이윤옥
  
목포정명여학교는 1919년 4월 8일 목포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교로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국가보훈처는 이 학교 출신 7명을 광복 67주년인 올 8월 15일 애국지사로 포상했다.

이들은 곽희주(19살), 김나열(14살), 김옥실(15살), 박복술(18살), 박음전(14살), 이남순(17살), 주유금(16살)으로 “1921년 11월 13일 전남 목포의 정명여학교 재학 중 독립만세시위를 감행할 것을 협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다음 날 목포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체포”된 분들이며 각각 징역 6~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 속에 지내던 뜨거운 피의 낭자들은 1차 세계대전 후 세계열강 사이에 동아시아 질서 재편 등을 논의한다는 워싱턴회의 소식을 듣고 조선의 독립문제가 상정되도록 촉구하는 마음에서 태극기를 들고 교문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전략) 아! 우리 동포들아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때를 당하여 맹렬히 일어나 멸망의 거리로부터 자유의 낙원으로 약진하라. 동포들아 자유에 죽음이, 속박에 사는 것보다 나으리라, 맹렬히 일어나라!”

-1983년 천장 공사 중 발견된 격문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가운데-

격문을 읽고 있노라면 피가 끓는다. 이천만 조선인 그 누구의 가슴에도 끓어올랐을 피! 그것도 나 어린 여학생들이 앞장섰음을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해로 12회째 목포에서는 4·8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고 있으며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그날의 함성을 새기고 있다.


▲ 정명여학교 보통과 제9회(1922년) 졸업생들((저 가운데 1921년 목포독립만세운동을 한 분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 정명여중

구한말 격동의 시기인 1903년 9월 9일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설립한 이 학교는 1910년 6월 보통과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2011년 2월 81회로 327명의 졸업생을 냈으며 이 학교 출신 졸업생은 모두 21,439명이다. 현재 23대 교장인 정문주 선생님은 “1937년 9월 2일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정명학교는 폐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뒤 10년의 세월이 지난 1947년에 다시 재개교를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하신 분들의 자료가 많이 손실되었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한편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정명학교에 근무하게 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애국지사들의 삶을 학생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다고 했다.

오래된 아름드리 팽나무와 느티나무 속에 자리한 자료관을 둘러보고 아담한 학교 교정을 거닐어 보는데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푸른 가을하늘에 살랑대는 바람이 몰고 온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항구도시 목포를 실감케 했다. 지금도 목포는 서울에서 먼 곳인데 91년전 이 땅의 여학생들이 왜경의 총칼을 두려워 않고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찾고자 만세운동을 주도 했다는 사실에 필자는 가슴이 찡해왔다. 

▲ 1922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목포만세운동 재판” 기사 일부. 곽희주, 주유금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정명여중


▲ 2012년 4월 8일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프로그램 표지     © 정명여중
  
보훈 역사상 한 학교에 7명의 애국지사가 포상을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어찌 7명뿐이었으랴. 아직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더 많은 애국지사들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일에 정부는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그 나마도 여성들의 자료는 거의 산실되어 오늘날은 재판 기록 등으로 밖에 이 분들의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14살의 댕기머리 소녀들이 만세를 부르던 현장은 고스란히 남아 그 후예들이 오늘도 밝고 힘차게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잘 정돈된 아담한 교정을 걸어 나오는데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 중인 학생들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91년 전 여자의 몸으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던 댕기머리 소녀들인 양 필자는 다시 교정으로 고갤 돌렸다. 그 자리엔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른 모습으로 정명여학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자는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독립운동가의 역사가 있는 곳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달려가 이분들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번 옛 정명여학교 출신의 7명의 잔다르크 이야기를 필자는 내년 2월 펴낼 예정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에 실을 것이며 이 책으로 60명에 이르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게 된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 목포정명여중 정문주 교장 선생님과 독립기념비 앞에서 필자     © 이윤옥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
*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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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18 [10: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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