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개혁진영의 대선참패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했다. 이 후보의 승리는 진작부터 예상됐던 바이지만, 진보.개혁 진영 입장에서 보면 선거결과는 자못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가히 ‘움직이는 화약고’라 할 이명박 후보가 이토록 압승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 싶다. 진보.개혁 진영이 대선에서 참패한 원인을 분석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왔지만 복기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참여정부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너무나 컸다. 17대 대선은 과거의 대선과는 달리 회고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참여정부는 전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과 계급, 세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말았다.
특히 뼈아픈 것은 참여정부를 출범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진보.개혁 성향의 유권자들이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를 대거 철회하고 보수 진영에 투항하거나 기권했다는 사실이다. 분명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균형을 잃은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조중동 탓으로 돌리는 건 옳지 않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에도 조중동은 이회창을 당선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지만 많은 유권자들은 조중동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frame)에 갇히지 않고 노무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참여정부가 유권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수다(數多)한 정책적 오류-이라크 파병,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백기투항, 양극화 해소 실패,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한.미 FTA 체결 추진 등-에 더해 국민들을 가르치려는 통치 스타일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특히 ‘진리의 정치’를 추구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국민들에게 오만하고 독선적인 그리고 반성할 줄 모르는 지도자로 비쳐졌고 결국 국민들의 윤리적 미감을 크게 거스르고 말았다. 만약 노 대통령이 보다 겸손하고 포용력 있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민심이반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경제 성장에 대한 욕구가 다른 모든 의제들을 압도했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물신숭배(fetishism)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확고한 시대정신이 됐다는 사실이 이번 대선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가뜩이나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상태에서 고용마저 불안해지고 부동산과 주식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지자 국민들은 완전히 원자화돼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이것이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 풍경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게 사회적 양극화 해소 등을 기대하며 전폭적 지지를 보냈지만, 오히려 이들 정부에서 양극화가 심화되자 더 이상 진보.개혁 세력을 양극화 해소의 적임자로 인정하지 않게 됐다. 국가가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공정한 재분배 정책을 펼 것이라는 국민들의 기대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경험하면서 시나브로 퇴색하고 만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수도권 유권자들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사실인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현재 부동산과 펀드가 없는 사람들은 참여정부를 심판하는 마음으로 이 후보에게 표를 던졌고, 부동산과 펀드가 있는 사람들은 이 후보가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통해 자신들의 자산을 불려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이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셋째, 영남의 압도적 지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영남패권주의자들이 끼치는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평균적 영남인들은 정권은 항상 자기들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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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07대선의 특징은 비한나라당 세력 추락, 사상 최악의 호남고립 구도의 고착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사진은 MBC 출구조사에서 보여준 후보별 지지지역 구도. 호남고립이 극명하게 보인다. © MBC |
유사(類似) 인종주의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영남인들의 멘털리티가 아니고는 영남인들의 한나라당에 대한 지극한 애호와 지지를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다. 이번에도 이들은 똘똘 뭉쳐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빼앗긴 정권을 되찾았으니 영남패권주의자들은 소원을 성취한 셈이다.
문제는 영남패권주의가 유사 인종주의의 일종인지라 퇴치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조금 누그러지는 듯 했던 영남패권주의는 다시 공고해지고 있다.
진보.개혁 진영의 재기를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 진보.개혁 진영은 사실상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은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조중동을 탓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일각에서는 국민들의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번 대선은 중우정치 혹은 폭민정치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이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지금 진보.개혁 진영이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진보.개혁 진영은 국민들 앞에 통절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보.개혁 진영은 국민들에게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였던 과거의 구태를 철저히 청산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기실 지난 두 번의 대선 승리와 2004년 총선의 승리는 진보.개혁 진영의 실력 때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우호적 외부 조건과 보수진영의 실수에 편승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비유컨대 진보.개혁 진영은 운이 좋아 자신이 지닌 실력 보다 더 좋은 시험점수를 받고 기고만장해 한 학생과 다름이 없었다.
진보.개혁 진영이 보수진영에 비해 우위라고 자부했던 윤리성과 도덕의식도 새롭게 점검하고 벼릴 필요가 있다.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진보.개혁 진영의 도덕성이 보수진영의 그것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불거진 권력과 연관된 추문(醜聞)들이 과거 권위정부에서 만연했던 권력형 비리와 부정에 비해 훨씬 경미하고 조직적이지 않다는 항변은 진보.개혁 진영의 부도덕함을 자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국가발전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진보.개혁 진영은 유권자들이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시장근본주의 혹은 성장지상주의를 대안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이 후보가 지닌 숱한 도덕적 흠결과 낮은 준법의식에도 불구하고 그를 17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유는 그가 표방한 국가발전전략이 진보.개혁 진영이 내세운 국가발전전략 보다 나은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진보.개혁 진영의 주장처럼 이 후보의 국가발전전략이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반환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보.개혁 진영의 국가발전전략이 오죽 변변치 못했으면 국민들이 이 후보를 선택했겠는가? 진보.개혁 진영이 한국사회 전 부면에 대한 근본적 개혁 프로그램 혹은 신뢰할 만한 국가발전전략을 마련해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 진보.개혁 진영의 정권탈환은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다른 어떤 정당 보다 국가발전전략 혹은 정책에서 앞서 나갔어야 할 민노당은 이런 점에서 대오각성 해야 한다. 민노당은 이번 대선에서 코리아 연방제라는 용어부터 수상한 슬로건을 간판으로 내걸어 고립을 자초했다. 만약 민노당이 시급히 노동자, 농민,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 정당이라는 정체성 확립 및 이들을 위한 국가발전전략을 마련하지 않는 한 민노당은 원내에서 잔존(殘存)하는 수준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셋째, 새로운 정치세력을 조직해야 한다. 여러 정파들이 단기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한 지금의 민주신당이나 자주파가 득세하고 있는 민노당을 가지고는 도저히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성악(性惡)의 나무에서 성선(性善)의 열매가 맺히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주신당과 민노당은 어설픈 봉합으로 조직을 안정시키는데 골몰하지 말고 대대적인 수술을 통해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설령 대대적인 수술이나 분당 등을 통해 소수정당으로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희망의 구심이 되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르투(virtu)없이는 포르투나(fortune)도 의미 없어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9장에서 “운명(fortuna)은 스스로 무엇인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좋은 기회를 찾아다니는 정신력이 강하고 재능(virtu)이 풍부한 인물을 선택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즉,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이 없다면 그 기회는 그냥 지나가고 만다는 뜻이다.
마키아벨리의 이 말은 대한민국의 진보.개혁 진영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진보.개혁 진영이 뼈를 깎는 반성과 함께 새로운 정치 조직을 구축하고 국민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국가발전전략을 차근차근 설계하지 않는다면 설령 이명박 정권이 허다한 사고(?)를 치고 실정을 거듭한다 해도 자연스럽게 진보.개혁 진영이 집권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부터 진보.개혁 진영은 비르투(virtu)를 키워나가야 한다. 포르투나(fortune)가 올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