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이 제사에 쓸 돼지들을 정성을 다해 길렀다. 매일 지푸라기를 갈아주고 귀족들이 먹는 음식을 대접하며 심지어는 비단옷으로 몸을 감싸주었다. 요즘 애완견들에게 먹이는 음식과 겉에 입히는 개 패션이 성인용 음식이나 의상보다 값이 비싸다고 하는데 2천 년 전에도 귀하다고 여기는 짐승에겐 이런 호사가 베풀어졌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제삿날이 다가오자 제관이 돼지를 끌어내 도살장으로 데려가려 하자 돼지는 길길이 악을 쓰고 버둥거렸다. 이 광경을 본 제관은 분노가 치밀어 "네가 너를 제사에 쓰기 위해 가난뱅이 백성들의 이부자리 보다 깨끗한 띠 풀을 매일 갈아주고 최상의 음식을 제공하며 왕족이나 먹는 기름진 음식을 제공했다. 그런 데도 죽는 것을 거절하다니 너야 말로 은혜를 모로 갚는 미물이로구나!" 라며 돼지를 준절하게 꾸짖었다. 돼지에게도 목숨은 하나다. 돼지는 미물이기에 자신이 왜 특혜를 받는 줄 몰랐을 것이며 도살장으로 끌고 가자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제 똥에 밟힌 지푸라기 속에서 뒹굴고 인간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나 구정물로 목숨을 유지할망정 비단옷 따위나 왕이 먹는 음식과 목숨을 맞바꿀 돼지는 없다. 장자(莊子)편에 나오는 얘기다. 새장의 새를 잡아다 새집을 순금과 상아로 장식하고 산해진미를 주어도 새들은 문만 열리면 공중으로 달아나고 만다. 왜 그럴까? 비록 나무 위에서 서로 빼꼭하게 몸을 기대며 추위를 면하고 영양가 없는 잡초 씨앗을 주워 먹고 살아도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가장 큰 존엄성은 먹는 게 아니라 보장된 인격권이다. 저 제관과 돼지가 생각하는 차이에서 우리는 세상사의 보편적 단면을 깨닫게 된다. 자칭 국가와 민족을 다스리는 치자(治者)라 하는 사람들은 선거 때면 하나 같이 국민이 주인이라며 평생을 소나 말처럼 봉사할 것을 맹세하고 다짐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당선되고 난 뒤, 대다수 치자들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 달라서 순식간에 그들은 주인인 제관처럼 으스대고 백성은 소모품인 돼지가 돼 버린다. 사이비 위정자들이 백성을 속이는 방법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수법이 대동소이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백성과 국민을 위한다는 감언이설과 교언영색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들과 자신을 지지했던 군단들에게만 부와 명예를 할애했고 국민들은 그들에게 놀아난 꼭두각시나 제사상에 오를 돼지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다. 한국인은 홀수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 특히 셋이나 다섯 아홉이란 숫자를 선호한다. 그리고 유별스레 검은 것보다는 희고 푸른 것을 좋아한다. 깊고 신비한 연못이나 계곡과 포구는 거의가 용(龍)이란 신비의 동물과 연관 짓는 이름을 부여했다. 홀수를 좋아하는 민족답게 구룡폭포, 구룡계곡, 구룡포니 해서 깊은 연못이나 포구와 폭포에는 필히 아홉 마리의 용을 등장 시켜 신비로움을 곁들인 전설과 신화를 만들어 냈다. 또한 백룡이나 청룡은 착한용이고 검은 흑룡은 싫어하는 별스런 편견도 지니고 있다. 까마귀는 부모를 봉양하는 효조(孝鳥)로 이름이 높아 옛 효자문에는 까마귀 머리를 목각으로 만들어 세울 정도였다. 그런 데도 한국인의 기호에 안 맞는 검은 색을 지닌 이유 때문에 흉조(凶鳥)로 푸대접을 받는다. 사물은 겉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내용물의 값어치가 중요하고 까마귀는 속조차 검은 건 아닌데도. 어쨌건 이번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대선후보자 역시 열두 명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자가 한민족의 선호도에 맞는 길수(吉數)인 아홉 명이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기야 아홉이건 열둘이 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그 열두 명 모두 한 달 여를 나라 전체의 고을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다 보면 볕에 그을려, 검은 흑룡이나 까마귀처럼 얼굴이 검게 타 까마귀인지 백로인지, 흑룡인지 백룡인지 식별하기가 난해할 것이다. 비록 겉모습은 모두 검게 그을렸을지라도 그 가운데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국민을 돼지가 아닌 주인답게 섬기고자 하는 의롭고 정직한 후보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 충직하고 의로운 주인공을 찾아내는 날이 오는 12월19일이다. 편견과, 편당, 학연과 지역 색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얼마나 도탄에 빠뜨렸는가를 모르는 국민들은 없다. 그런 치들은 사이비에 불과하다. 눈을 지닌 사람이라면 흑백을 구분하는 것이 같듯 천리안을 지니지 않은 국민들은 없다. 배부르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며 배고프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비단 이불은 따뜻하고 무명 이불호청은 춥다는 말은 궤변에 불과하다. 이번에는 한 눈 팔지 말고 경제 논리니, 클린 논리니 하는 말 보쌈보다는 국민을 주인 대접해주는 진정한 지도자를 한 번 뽑아보자. 미물의 눈이 아닌 사람 눈을 가진 현명한 국민들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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