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미FTA가 타결되었을 때 '노무현에게 <300>이 있다'며 한미FTA와 비전2030, 그리고 DJ독트린 이 세가지가 얽히며 풀무질할 거센 바람을 우려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300>은 시쳇말을 비틀어 '세박자 국가론'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묘하게도 유시민이 최근에 내놓은 세가지 국가비전으로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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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의 평화와 복지 이슈 선점은 민노당에게 악몽이 될 공산이 없지 않아 있다. 민노당 후보의 전략은? © 돌베게, 2007 |
유시민이 쓴 <대한민국 개조론>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사회투자국가론'이다. 이것은 성장지상주의에의 대항인 동시에 전통적 복지국가론과의 차별화를 표방하고 있다. 사회투자국가론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생산적 복지론'에 젖줄을 대고 있는 것 같다. 생산적 복지론은 얼핏 '비생산적 복지'의 대안으로 비쳐지지만 엄밀하게는 '소비적 복지'와 대조를 이룬다. 과감한 조세와 적극적인 생계지원으로 요약될 소비적 복지와는 달리 생산적 복지는 일자리를 마련해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복지라는 기조를 담고 있다. 물론 유시민의 사회투자국가론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소비적 복지에 조금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론은 생산적 복지론과 마찬가지로 복지를 계급적 평등의 첫 단계로 보는 진보좌파적 시각과 선을 그으며 고도 또는 고차원의 성장을 향한 도구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하다.
두번째는 '선진통상국가론'이다. 여기에는 숙명 앞에 고개숙이며 더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개척하겠다는 우스꽝스러운 철학이 숨어 있다. 그의 선진통상국가론은 박정희 이후의 대세를 받아들인 것이다. 유시민과 결별한 정태인은 사회투자국가와 선진통상국가를 같이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유시민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나를 구현하는 한편으로 상대(기득권세력)가 요구하는 것 하나를 수용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마구잡이식 FTA체결을 순리 겸 이상으로 인식하고 있고 전임자인 DJ 역시 틈날 때마다 이 구상에 맞장구친다. 노무현 정부의 'FTA 허브론'은 '동북아균형자론'의 변태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륙과 해양의 열강 사이에 낀 구도를 역이용하자여 평화와 안보를 보장받자는 발상이 미국과도 중국과도 EU와도 FTA를 맺어가며 한반도를 거대 경제력의 경합장으로 구성하자는 기획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세번째 '평화선도국가론'.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을 잇는 정책이다. 냉전을 걷어내고 평화체제를 건설하자는 견해야 대다수의 지지와 공감을 이끌었으므로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는 정책이기도 하다.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등 유시민의 당내 경쟁자들도 한반도평화의 적임자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누구의 정책이든 김대중-노무현-민주신당으로 계승되어온 평화국가론은 이를테면 평화군축이나 노동 환경조건의 남북한 공동 개선보다는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터전과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다는 경제협력을 앞세우고 있다. 노태우 정부부터 시도됐던 스포츠대회 단일팀 이후 경제적 드나듦이 남북교류 유력한 방안임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이 아닌 화폐의 원리로 진행되는 평화와 통일은 '우리 민족은 하나다'라는 구호 뒤에 숨은 '너희를 착취할 기회를 (남이 아닌) 우선 우리에게 달라'는 음습한 속셈을 밑절미로 삼기 마련이다.
유시민의 비전은 한미동맹의 현재와 미래를 이용하여 한미FTA를 체결하면서 중국, EU등과도 FTA를 맺어 ‘FTA허브국가’를 건설하고, FTA로 인한 손실을 이유로 들어 적극적인 복지재정확대를 설파하며, 남북교류로 평화체제를 건설하면서 경제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노선이다. 이미 이 복합적 설계도는 기초공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들어가며 '남북FTA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유시민도 얼마 전 대놓고 공약에 내걸었다. 실제로 남북이 FTA와 같은 형태의 경제협약을 맺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은 중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평화를 빙자한 대북 접근이며, 그것은 바깥으로도 개방지상주의를 풀무질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자 북한으로! 오라 미국이여! 만나자 개성공단에서!" 사회투자국가와 평화선도국가는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비전이다. 진보진영으로서도 찬반을 명확히 밝히기가 어렵다. 선진통상국가가 사회투자국가와 평화선도국가에 얽힐 경우, 한미FTA가 남북교류에도 유리하다는, 그로 인한 양극화 심화는 다른 해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질 때, 민주노동당의 소극적 지지층조차 비판적 지지로 옮겨갈 공산이 있다. 그래서 한미FTA반대운동을 주요 집권전략으로 놓는 정태인의 견해에 나는 선뜻 찬동할 수가 없다. 적의 급소를 알고 있지만, 적은 쉼없이 꿈틀거리며 재주를 부리고 있다.
나는 유시민이 범여권 컷오프를 통과할 것이며 나아가 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할 확률이 꽤 높다고 점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문국현변수가 끼어들었다. 그의 정책 또한 사회투자국가와 평화선도국가에 가깝다. 또 하나, 그가 말하는 '한미FTA'는 교묘하다. 범여권 대선 주자 중 유일하게 반대의사를 밝히는 천정배와 손잡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애초의 비판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특히 '개성공단'이라는 실마리 쟁점을 붙드는 모양새는 선진통상국가와 평화선도국가의 연결을 주선하고 있다.
문국현은 물론 유시민의 지지율을 나눠먹을 공산이 높다. 그러나 피해는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으로 돌아올 것이다. 청렴한 부자, 혁신적 CEO의 이미지는 이명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랜드사태가 일으킨 회오리 속에서 그는 '비정규직의 전도사'로 나타났다. 허구만은 아니다. 유한킴벌리 경영실적이 뒷받침하고 있다. 문국현은 책임성과 현실성의 측면에서 민주노동당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문국현과 유시민의 만남은 민주노동당에게 악몽을 선사할 것이다.
한미FTA의 단일이슈로 따지면 아직까지도 민주노동당에게 썩 불리한 환경은 아니다. 논쟁에서 밀린 부분은 없었다. 농업을 살리느냐 공업을 키우느냐 따위로 왜곡된 구도를 바꾸는 것이 과제다. 투자자의 이득이 다수 국민이나 국내 헌법을 짓밟아 공공성 확대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쪽으로 ISD(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해악을 선전하는 일이 그 첫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시민의 '사회투자국가론'이나 문국현의 '사람중심의 진짜경제'에 맞설 수 있는 총론이 절실하다. 나는 쟁점은 평화가 아니라 경제가 될 것이라는 손호철의 예측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와 사회를 이간하는 이명박의 시도가 한낱 희망사항인 것처럼 경제와 평화의 분리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전략에 뒤쳐진 다수 국민들을 설득할 총체적 철학과 이를 한눈에 전달할 홍보전략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100만민중대회'는 내부용이고 '7공화국'은 시운을 잘못 만났으며 '사회공공체제'론은 퉁명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늘상 내세워왔던 '사회연대국가'가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당원들이 무엇보다 가져야 할 것은, 정책의 '점오'와 표현의 '돈오'에 도전하는, '카피라이터'의 정신이다. 세가지 국가론을 들고 나온 유시민이 일깨워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