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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경제는 언론플레이 아니다
[인물과 사상의 눈] 지식인의 언론플레이와 대중적 영향력과의 관계
 
강준만   기사입력  2005/09/10 [03:18]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Paul Krugman의 모습     © 인터넷 이미지
나는 지난 97년 11월에 번역돼 나온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원제:Peddling Prosperity)』(김이수ㆍ오승훈 옮김, 부키)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나는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은 게 아니다. 미국 MIT의 경제학 교수인 폴 크루그먼이 다른 경제학자들과 경제 전문 언론인들의 실명을 거론해 가면서 거침없이 공박하는 게 흥미로웠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경제학도 못지않게 언론학도들에게도 중요한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크루그먼은 지난 94년 「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논문을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최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 위기로 인해 더욱 유명해지고 있는 인물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시아 경제의 전망을 낙관하던 시기에 그는 비관적인 견해를 내놓았고 현 상황은 그의 견해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니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그가 예견한 것은 지금과 같은 위기가 아니라 성장의 점진적인 둔화였지만 “아시아적 가치가 특별하다거나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그의 지적이 예전에 비해 더욱 많은 청취자를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크루그먼은 언론을 등에 업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 전문가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세’다. 왜? 정치가들은 경제를 쉽고 단순하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게 크루그먼의 진단이다.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클린턴 1기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냈으며 『국가의 일』이라는 베스트셀러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로버트 라이시도 크루그먼의 비판 표적 가운데 하나다. 크루그먼은 라이시를 ‘변호사 출신의 정책기획가’로 일축하면서 진지한 학자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을 열렬히 지지한 크루그먼에게 한자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크루그먼이 보복심과 질투심에서 클린턴 행정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경제학자들을 모두 싸잡아 비판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을 하기도 한다. 크루그먼이 이 책에서 라이시가 클린턴과 함께 옥스포드대학을 다녔다는 걸 강조하는 거나 이 책을 내고 난 뒤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국가경제자문위 의장에 선임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한 걸로 미루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탤런트 교수’에 대한 비판

크루그먼은 이른바 ‘탤런트 교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와 같은 경제학자도 하버드의 경제학 교수였지만 학계 동료들은 그를 ‘탤런트 교수’로 여겨 한 번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없으며 그의 책을 진정한 경제 이론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밝히면서 학계와 대중의 인식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또다른 저서 『팝 인터내셔널리즘』(김광전 옮김,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에선,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폴 케네디가 비교우위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걸 논한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글이 아주 우스꽝스럽다고 비난한다. 크루그먼은 또 TV에 자주 출연하는 전문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TV에 자주 나오는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일반 법칙이 있다. 다른 것은 각설하고, 진정한 전문가라면 연구에 바빠서 TV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또 TV에 적합한 자질과 뛰어난 연구에 적합한 자질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경향이 경제학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스티븐 호킹은 베스트셀러였던 『시간의 역사』의 저자이자 수많은 경탄할 만한 실화의 주인공이지만 세계적인 일급 물리학자는 아니다.”

일면 수긍이 가긴 가면서도 크루그먼이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학자의 ‘신성성’을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는 게 어째 좀 튄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언론계보다는 학계에서 훨씬 더 높기 때문일까? 그러나 자신도 이미 ‘탤런트 교수’가 아닌가. 게다가 이 책에서 그의 어투는 때로 과격하며 또 때로는 다른 경제학자들에 대한 인신공격도 불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의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건 아니다. 물론 대중적인 글에 심혈을 기울이는 나와 같은 사람이 크루그먼의 모든 주장에 다 동의하기는 어렵다. 경제학과 언론학은 성격이 다르며 교수가 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미국적 상황과 교수가 지나친 우대를 받는 한국적 상황은 다르기 때문에 크루그먼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도 큰일날 건 없지만, 어찌 됐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크루그먼의 실명 비판을 통해 치열하거니와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나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언론플레이에 대한 비판

『경제학의 향연』은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월스트리트 저널』을 포함한 언론의 막강한 역할과 경제 전문가들의 ‘언론플레이’ 메커니즘까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우선 크루그먼이 이야기하는 ‘정책기획가’의 언론플레이 솜씨에 대해 한 토막 들어 보자.

“1980년대 중반 워싱턴 소재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에서 언론 관계자를 위한 전화 ‘경보 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신문이나 TV 방송에서 어떤 정책 현안에 대해 한 말씀이 필요해서 연구소에 전화하였을 때, 밤이든 주말이든 박식한 연구원이 언제나 답해 줄 수 있게 한 시스템이다. 결국 대중적 지명도가 이 연구소의 생명줄인 셈이다.

CSIS가 언론의 환심을 사려고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유별난 편이지만, 그 동기 자체는 유별난 것이 아니다. CSIS 및 수십 군데의 엇비슷한 기관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교수도 정치가도 아닌 새로운 계층의 일원으로서, 사상과 정책의 상호작용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왔다. 바로 정책기획가들이다.

정책기획가란 무엇인가? 그들은 전문 지식인이란 점에서 교수와 같지만, 유형이 다른 지식인이다. 배경으로 보면 학자일 수도 있다. 가령 아서 래퍼나 레스터 서로 같은 이들은 경제학 박사 학위와 경제학 교수 직함도 갖고 있다. 보통 그들은 워싱턴의 싱크탱크나 또는 하버드의 케네디 스쿨 같은 비정규적 대학 과정에 몸담고 있다. 그러나 정책기획가인가 아닌가를 구분짓는 것은 출신 경력이 아니라 누구를 대상으로, 무슨 말로 강연하느냐 하는 점이다. 교수는 대개 다른 교수들을 위해 글을 쓴다. …… 그러나 정책기획가는 오로지 일반 독자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크루그먼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레스터 서로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서로를 다음과 같이 조롱한다. ‘국가경쟁력은 허구’라는 크루그먼의 주장과 관련된 대목이니 좀 길게 인용해 보자.

“현재 전략적 무역론자들은 미국의 대중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경제 문제는 세계 시장에서의 다른 선진국들과의 투쟁이라는 생각을 팔고 있다. 레스터 서로의 책 『대결』은 부제가 ‘일본, 유럽 및 미국 간에 벌어질 경제전쟁’이며, 겉표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독자를 현혹하고 있다. ‘금세기의 가장 결정적인 전쟁이 막 벌어지려 하고 있다. …… 미국은 이미 지는 쪽으로 결판났는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단언하는 미국의 경쟁력이란 문제는 낭비적인 큰 정부라는 레이건의 신화만큼이나 환상이다. 미국은 실제로 일부 비생산적인 관료와 복지 사기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경쟁력 상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미지를 통해 경제에 진정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린다고 하였을 때, 클린턴의 수사법은 레이건의 수사법만큼이나 핵심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전쟁으로서의 국제 경쟁력이란 신화에 토대를 둔 경제적 수사법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진다. 목표를 국가 안보에 둠으로써 증세나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삭감 등 고통스러운 정책을 유권자들이 지지하도록 동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연두교서에서 이 점을 대단히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경쟁력이란 수사법은 파괴적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너무 안이하게 대하여 나쁜 정치로 이끌고 또 실제 현실을 무시하게 해 버리기 때문이다.

전략적 무역론자들의 발흥은 두 가지 주요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세계시장에서 이기려고 애쓰다가 대신 세계시장을 파괴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에 따른 한 지역의 행위가 전 세계의 경제정책을 뒤흔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논쟁과 토론이 없는 경제평론

그렇다면 크루그먼의 책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선 현 경제 난국과 관련하여 경제학자들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경제 관료들이야 ‘경제 청문회’에 불려나가 책임을 추궁당하겠지만 경제학자들은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지는가? 한국경제학회는 대국민 사죄 성명서라도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경제가 이 꼴이 되기까지 경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직무유기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이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억울하게 생각할 경제학자들이 많을 것이다.
 
▲폴 크루그먼의 저서 '대폭로', 부시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리브로, 2004 
왜 그런가? 한국과 미국의 사정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바로 여기서 크루그먼의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경제학자라고 해서 아무나 권력이나 언론에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비단 경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국가 정책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 각 분야 전문가의 대표성은 권력이나 언론이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바로 그 결정의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메커니즘이 무엇이든 그걸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 나는 ‘비판실명제’가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즉, 권력과 언론에 접근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대해 그렇지 못한 전문가들이 실명을 거론해 가면서 비판하고 논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풍토가 전혀 돼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인물, 어떤 주장에 대해 검증할 길이 차단돼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게끔 쓰여진 경제 관련 책들을 살펴보자.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읽어보면서 깜짝 놀랐다. 전부가 ‘마이 웨이’다. 각자 자기 주장만 하기에 바쁠 뿐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실명 비판이 점잖지 못하거나 거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잘 나가는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헛소리를 하거나 특정 집단만의 이익을 배려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겁을 내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으니까 말이다.

언론 매체를 통해 맹활약하는 경제평론가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시라. 대부분 재벌들이 만든 경제연구소에 소속된 전문가들이거나 보수적인 경제학자들이다. 개혁 지향적인 경제학자들도 몇 명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활동 반경은 극히 제한돼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경제학자들 역시 좀처럼 실명 비판은 하지 않으며 경제평론의 판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문제 제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론의 ‘두 얼굴’

언론은 어떠한가? 완전히 겉 다르고 속 다른 ‘두 얼굴’이다. 재벌에 소속되지 않은 언론사들은 재벌에 대해 제법 비판적인 척하면서도 경제칼럼은 주로 친재벌적인 전문가들에게만 할애한다. 아마도 재벌 광고를 필요로 하는 현실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경제 분야만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조선일보』 98년 1월 1일자 3면을 보자. 이 지면은 <’98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제목을 내걸고 사회 원로들의 좌담회를 마련했다. 그런데 그 원로들은 남덕우 전 총리, 이영덕 전 총리, 이홍구 전 총리 등 한결같이 전직 총리들이다.

나는 그런 인물들의 목소리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조선일보』에선 주로 그런 인물들만이 원로로 대접받는다는 데에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조선일보』만 그러는 게 아니다. 우리 언론에서 사회 원로 또는 전문가로 대접받아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신, 5ㆍ6공 세력이거나 그 세력에 대해 전혀 비판적이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정권이 교체됐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여론을 만드는 언론은 수구 기득권 세력과 그 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은 보신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됐다. 반민주 세력은 대통령 후보들에 대해서조차 ‘사상 검증’을 하겠다고 날뛰는데 민주 세력은 반민주 세력에 대한 ‘사상 검증’은커녕 그들의 과거 죄과에 대해서조차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누가 듣건 말건 내 목소리만 우렁차게 내겠다는 것이다.

민주 세력은 언론에 대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관대하고 무관심하다. 대중이야 어떤 영향을 받건 말건 ‘나는 안 넘어간다’고 자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 대중 역시 언론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일까?

『월스트리트 저널』의 농간

크루그먼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건 그의 책은 영향력 있는 일개 신문 하나가 일국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고 있다.

크루그먼은 레이건 행정부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공급 측면의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1980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자유주의 신문은 지루하면서도 감각적이 된 반면, 보수주의 신문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설이 급진적인 우파 경제학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설을 담당했던 로버트 바틀리는 『저널』지가 경제 현안에 대해선 신중하거나 공정해서는 안 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그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고 한다.

크루그먼은 바틀리의 그러한 캠페인이 “1970년대에 걸쳐 한 줌에 불과하던 우상 파괴적인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공급 측면’의 경제학이라고 알려지게 된 주요 이데올로기로 격상시켜 냈던 것”이라고 말한다. 바틀리 주변에 모여 있던 몇몇 공급 중시론자들은 “처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신문을, 그리고 다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경제정책을 조종하게 되었다”는 게 크루그먼이 내린 결론이다.

크루그먼의 주장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에서 언론 매체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수요와 공급의 괴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크루그먼은 『팝 인터내셔널리즘』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1993년 하반기에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생겼다.”

크루그먼은 그런 기회를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크루그먼처럼 잘 나가는 지식인도 자신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를 잡는 데에 늘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지면은 한정돼 있는데 글을 싣고 싶다는 지식인들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언론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의 향연』에서 자신과 『뉴욕 타임즈』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92년 나는 『뉴욕 타임즈』에 기고문을 쓰면서 생산성 향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때 내가 상대하였던 편집차장은 나에게 미국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생산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는 그런 문구가 추가되지 않는다면 나의 글을 싣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생산성의 중요성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크루그먼이 왜 그렇게 언론을 등에 업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전문가들에 대해 비판적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미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간판’이 좋고 사교를 잘하고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지식인이 큰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가 훨씬 더 심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 ‘실명 비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

크루그먼이 지적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농간에 대해 ‘정말 그랬을까?’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정한 신문은 바로 『한겨레』다. 이건 내 평가가 아니다. 언론학자들과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여러 번 확인된 사실이다. 『한겨레』는 진보적 관점에서 잘못된 것에 대해 반격만 가할 뿐 주요 현안에 대해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신중성과 공정성을 내팽개치고 그 어떤 사상과 이익의 수호 또는 전파를 위해 가장 공격적인 캠페인을 전개하는 신문은 바로 『조선일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사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으로만 따지자면 TV가 신문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TV는 매우 소심하고 소극적이라 권력의 특별한 부름에 응하지 않는 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신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신문들의 발행부수의 총합이 『조선일보』 발행부수의 몇 배가 된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공격적인 『조선일보』의 영향력에 비해 떨어질 수 있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중앙일보』가 『조선일보』가 92년 대선 때 했던 못된 짓의 흉내를 내자 일각에서 『중앙일보』가 박력이 있어서 읽을 만하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도 결코 가볍게 흘려넘길 일이 아니다. 신문시장에선 신중성과 공정성을 무시하는 ‘악화’가 신중성과 공정성을 존중하는 ‘양화’를 몰아내게 돼 있다. 그간 『조선일보』는 이 점을 100% 활용해 한국 신문시장의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건 참으로 딜레마다. 모든 언론 매체가 시장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신중성과 공정성을 내던지고 각자의 편향성에 따라 공격적인 캠페인성 기사와 논평을 양산해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일부 언론 매체만 계속 그런 재미(?)를 보게 해 여론 형성의 리더십을 행사하게 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가 아닌가?

나는 차선의 선택으로 모든 언론 매체들이 그간 상호 비판을 금기시해 온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진정한 자유경쟁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비판과 반론과 재반론을 무성하게 쏟아내자. 가면을 쓰고 외곽을 때리거나 외부 필자의 선별을 통해 음모적인 캠페인을 전개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자.

각자 정체를 정정당당하게 밝히라. 엉뚱하게 박정희 미화를 하지 말고 유신시대가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하라. 5공 인사들을 필자로 내세워 엉뚱한 소리 하게 하지 말고 당당하게 5공 시절이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하라. 그래야 본격적인 반격이 가능하고 뜨거운 논쟁이 불붙는다. 현 경제난국의 근본적인 원인도 논쟁의 부재에 있는 게 아니던가? 나라 망치는 ‘가면무도회’는 이제 제발 그만 하자. ‘비판실명제’와 그에 따른 치열한 논쟁과 책임 규명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업이다.

 
* 본문은 『권력과 리더십 2』(인물과사상사, 1999년 4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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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9/10 [03:1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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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카 라퐁텐 2005/09/11 [22:40] 수정 | 삭제
  • 그런가요??
  • 미도리 2005/09/10 [19:44] 수정 | 삭제
  • 아주좋아!
  • 이성길 2005/09/10 [10:30] 수정 | 삭제
  • 난 듣는 것을 더 좋아해. 내가 나의 주장만을 한다는 소리는 잘못된 평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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