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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박정희콤플렉스와 지적 사기
[논단] 박정희와 근대화, 좌파적 지성과 참다운 지식인의 자세를 생각함
 
무위   기사입력  2005/03/22 [02:45]
진중권이라는 사이비 진보 논객이 언론과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자타가 알다시피 진중권은 안티조선 운동으로 세간에 이름을 알린 논객이다.
 
그 이후 몇몇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질렀던 지만원-한승조 등의 논리를 공박하는 선봉대를 맡는 일을 자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서 발견되는 한가지 공통점은 진중권은 지독하게 박정희 콤플렉스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단행본) 그의 물건은 서지 않는다(-동아일보, 2004-08-08 12 ) 보수우익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박정희가 한승조-지만원-조갑제의 배후”(-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3-14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천박성(- 국제 신문, 2005-03-16 )에 깃든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논리로 박정희가 만악의 근원이며 노골적으로 그런 배후라고 말한다.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진중권이 박정희에 대한 콤플렉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그런 콤플렉스를 피력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논리적 과정이 너무나 황당무계하다. 필자는 이런 일련의 글에 나오는 진중권의 논리적 사기술을 밝혀 보고자 한다.
   
진중권의 구술문화와 활자문화
 
진중권이 말한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법에는 철저하게 엘리트 먹물의 위선이 깃들여 있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구술문화는 미천하고 열등하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 시대적 상황에 맞게 사회화 과정을 거쳐 체계적으로  양육된 엘리트들이 만들어 낸 활자문화가 우월하다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진중권의 뇌리 속에는 민중은 자신과 같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잘 교육시키고 선전하고 계도해야 할 대상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민중이 외면하는 정권은 하늘도 외면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라는 구술문화양식의 표현은 천박한 무지랭이들의 아우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술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반 민중들은 세상물정도 모르는 룸펜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다음과 같이 보기좋게 비웃는다. "양반도 3일을 굶으면 담장을 넘는다"
 
또한 진중권은  활자문화라는 것이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철저하게 통제되고 지식인들을 만들어서 지배층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기획된 것이라는 모른다. 그러므로 구술문화가 구스타프 칼 융 박사가 말하는 공동체적 무의식을 담고서 자연 발생적이라서 오히려 더 생명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것은 남이 써놓은 책을 읽되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배양하지 못한 진중권 같은 지식인의 한계다.
 
벽초 홍명희는 활자문화 세력들이 공식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도적무리의 수괴라고 명명한  임꺽정을 '시대의 모순에 항거하고 의로운 도적'이라는 구술문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살려낸다.
 
중세시대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활자문화세력들에 항거한 방식은 재판정을 나오면서 갈릴레이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좌파적 지성은 휴머니즘에 기반하며 교육으로 형성된다
 
내가 살았던 시골 초등학교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 집안은 몹씨 가난했었는데 주위 친구들은 그 학생을 왕따시키고 손가락질하면서 놀려댔었다. 또 대학시절 한 친구는 언제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우연히 그 친구가 담배를 피우려고 라이트를 켤 때, 나는 그 친구가 호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던 나머지 한 손을 보게 되었다. '아! 그 친구는 쌔끼 손가락 밑에 손가락이 하나 더 있었다.'
 
일순간 그 친구가 얼마나 남 보다 하나 더 있는 손가락 때문에 맘을 조려 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한 것은 "어, 너 왜 육손이니?"라고 묻거나 다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못 본 체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가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가 시키고 있는 지극히 본능에 충실한 행위일 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 충실한 행위다. 이런 행동은 홀어머니와 산다고 해서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 부르거나 혼혈아가 지나가면 여럿이서 "노랑머리"라고 손가락질하고 놀리면서 언어 폭력을 가하는 행위가 만연했음에도 잘 나타난다. 이렇게 남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게 해서 쉽게 공격성을 표출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비겁한 행위라는 것은 그 다른 사람이 소수의 힘없는 자이고 공격을 가하는 우리는 다수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독일이나 러시아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로 집단폭력을 가하는 스킨 헤드족들이 있다. 하지만 지식과 교육을 통해서 지성이 높아질수록 이런 행동이 비인간적이며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으로 역지사지할 수 있는 방법상의 수련을 요한다.
 
의적 임꺽정 / 식민지 근대화론 / 개발 독재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말하는 진중권은  논리 공부를 더 하기 바란다. 진중권의 논법은 전혀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 지독히 편협한 감정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논리가 옳다는 사기술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의적(義賊) - 식민지 근대화론-개발독재는 참 특이한 용어다. 도적질(賊)-의롭다(義), 식민지-근대화, 독재-개발은 정(正)과 부(負)로 가치평가가 판이하게 다른 테제가 한꺼번에 놓여 있다. 즉 도덕질과 식민지, 그리고 독재는 나쁜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의로움(義)과 근대화와 개발은 좋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은 양쪽을 사심없이 형량해서 평가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도덕질과 식민지, 그리고 독재는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형량하여 평가하자는 과학적인 인식을 가져보자고 한다.

그런데 진중권의 논리는 오로지 한 쪽만 보고자 강변한다. "도덕질과 식민지배, 그리고 독재는 천하에 나쁜 것이다!" 라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확성기로 되풀이하면서 세뇌한다. 심지어는 "이걸 두고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다 천하의 나쁜 놈이다"라는 주장까지 확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도 인민재판이라도 이끌어 내려는 듯 너무나 감정적이다. 이성과 합리적 판단과 지성은 온데 간데 없다.
 
진중권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여러 학자들이 도적질이 나쁘고 식민지배가 나쁘고 독재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이것들이 나쁘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1+1=2 다.'라는 사실처럼 너무나 뻔한 일에 수학자들이 애를 쓰면서 학술논문을 발표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실제로 학자들이 애써서 관심을 가지면서 학술지에 발표까지 하는 부분은 '1+1=2'가 아닌 경우다. 정치학이나 행정학의 리더쉽 이론에서 조직을 잘 이끄는 능력있는 리더가 있으면 1+1=3이 되기도 한다고 발표한다. 경영학에서 생산요소를 잘 투입했더니 '1+1=2'가 아니라 1+1=5가 되고 금융이론에서 투자가의 현명한 판단으로 1+1=20이라는 대박을 터트린 비결들을 발표한다. 이렇게 '1+1=2 다.' 라는 이런 뻔한 사실은 접어두고 우리의 감정을 좀 더 배제시키고 이성적으로 그 당시 역사에 접근해보자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체다. 진중권은 이들을 두고 왜 "1+1=2라고 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주장을 하느냐?"고 볼멘 목소리로 감정적으로 선동한다.

박정희와 히딩크 : 올바른 사회과학적 방법론
 
진중권의 논리적 사기술은 자기 자신의 무식하고 천박한 인식능력을 피력한 다음의 대목에서 극치를 이룬다. 
 
'식민화'가 진정한 근대화가 아닌 것처럼, '군대화'도 제대로 된 근대화가 아니다. 일본이 없다고 아직도 조선시대며, 박정희 없었다고 아직도 보릿고개를 넘을까?--진중권
 
얼핏보면 별 문제가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 텍스트에 나와 있는 문장은 진중권이 어떤 물(物)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파악할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거나 아니면 술수를 부려서 논리적인 사기술을 부리고 있는 대목이다. 둘 다 지식인으로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양식에 속하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란 다음의 논리이다. '식민지는 나쁘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근대화가 이루어 진 것은 사실이다.' 21세기의 현재에서 박정희 시대를 개발독재시기로 규정하는 것은 다음의 구조를 띠고 있다. '독재는 나쁘다. 하지만 그 시절에 한반도의 43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보릿고개를 넘게 되었고 개발이 이루어진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진중권은 뜬금없이 '나쁜 식민지화가 어떻게 좋은 근대화냐?' 고 질문을 던지면서 Yes, No로만 대답하라고 윽박지른다. 마찬가지로 악한 독재(군대화)가 어떻게 선한 근대화이며 개발이냐?는 해괴한 명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또 다른 말은 하지 말고 Yes와 No로만 대답해야 한다고 몰아 부치며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단순 무식한 논리를 펼치도록 강제한다. 이거야말로 야바위꾼들이 하는 전형적인 폭력이다. 식민지(A)와 근대화(B)가 같이 있었고 독재(A)와 개발(B)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했던 시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식민지(A)=근대화(B), 독재(A)=개발(B) 이냐 아니냐에 대답하라는 무식하고 단순한 논법을 구사하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동시에 칠해져 있는 그림을 평하면서 "어떻게 빨간색이 제대로 된 파란색이냐"고 묻는 사람이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말하는 학자들이 진중권을 두고 특별한 반론을 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우파적인 민족 감정을 격분시켜 이성적 사고체계인 논리를 뒤엎으려는 짓은 더럽고 치사한 짓이다. 자칭 진보 좌파라는 상품을 팔아 먹고 있던 진중권이 자진해서 우파적인 대열의 중심에 들어가서 인민재판식 이지메를 가하고 있는 현상은 결코 우연히 나온 일이 아니다.
 
진중권이 진정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지만원-한승조 같이 망언을 일삼는 사람을 이지메하는 대열의 선봉에 서서 더 강한 타격을 가하는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논리에 자신이 있다면 망언이 아니라 치밀한 논리로 식민지 근대화 이론을 주장하고 있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나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자 교수의 논리를 깨야 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할 일 이다. 이영훈 교수의 정신대 발언에는 뿅망치 정도의 타격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물러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정을 격분시키는 일에는 자신이 있지만 자신의 논리에는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진중권이 말하는 '제대로 된 근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국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도로와 다리가 건설되는 등 사회기간 시설이 완비되고 교육제도가 완비되고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근대화를 말할 때 전 세계에서 최초로 고도 산업화의 역사를 선도했던 영국의 경우를 빼놓을 수 없다. 식민지 영토가 너무나 광범위해서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건설했다는 영국의 경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곳은 영국이 건설한 식민지 영토가 아니라 영국 본토에서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았던 잉글랜드 민중들의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영국이 근대화, 산업화되던 시기는 영국의 자본가에 의한 영국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착취하던 시기였다.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에 의하면 그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은 겨우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한 달에 단 한번 교회에 나가 예배도 못 볼 정도로 노동을 착취당했다. 즉 전세계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동시에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진행된 시기였다. 조선에는 근대화가 일본에 의해 타의로 진행되었기에 착취란 말 대신 수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진중권의 시각에 의하면 전 지구상에서 '착취가 없었던 근대화'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 실증적인 예가 있다면 보여주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착취가 진행된 근대화나 수탈이 진행된 시기의 근대화나 둘 다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화라는 용어 자체가 민족감정이나 독립이나 주권국가라는 말과는 별개로 평가하는 기술 문명사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착취가 근대화냐?' 라는 식의 논법을 구사하지 않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단지 역사적으로 착취와 근대화가 동시에 진행된 시기라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단지 이때의 근대화가 비록 착취를 수반했다고는 하나 산업화 이전에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라는 계약의 형태가 아니라 지주와 농노라는 형식으로 신분으로 예속되었던 시기의 착취보다는 발전된 형태라는 문명사적인 전제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착취와 수탈
 
필자는 조선의 근대화 시기를 재단하면서 학자들이 착취란 용어 대신에 수탈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를 잘 안다. '착취'란 용어에는 맑시즘적인 좌파 계급사관이 반영되어 있지만 '수탈'이란 용어에는 우파적인 민족 사관의 시각이 숨어 있다. 민족 사관에 의하면 일본지주에 의한 착취는 수탈이다. 이에 반하여 조선인 지주에 의한 조선인 동족인 기층민중을 착취한 것은 수탈이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시각에서 보는 계급사관에 의하면 일제 지주나 조선 지주나 둘 다 착취거나 수탈이지 굳이 이를 구분하여 말하지 않는다. 민중의 입장을 중시하는 좌파 진보의 시각에서는 착취와 수탈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진중권은 일제시대는 수탈의 시대이므로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너무나도 우파적인 시각을 피력한다. 그것도 식민지는 근대화가 아니라는 무식하고 단순한 시각을 우파처럼 피력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 시절 한족(漢族)의 복권을 노리며 반청복명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의 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운동이 철저하게 민중들의 삶과 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술문화를 신봉하던 피지배층인 기층 민중의 입장에서는 만주족이 지배하든 한족이 지배하든 간에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비록 만주족이었지만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치세는 조선의 영정조 시대 이상으로 평가받는 덕치(德治)의 시기였기에 반청복명 운동은 오히려 활자문화를 신봉했던 한족 지식인들의 내부로부터 자멸해 갈 수밖에 없었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몽양을 했을 때 성난 민중들은 왕궁을 불지르고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구술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이 정당하지 않은 반역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고도로 통제된 활자문화에 젖은 사람들의 그릇된 신화다. 이에는 남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엘리트 의식이나 그릇된 허위의식이 한껏 깃들어 있다.
 
진중권의 논리적 사기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대와의 대화"라고 했다. 이는 현재에 있는 사람이 과거의 시대의 사람의 위치로 역지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역사가 보통의 학문과는 다른 점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무려 25명에 이르는 축첩을 했지만 그 당시는 15세기 초기의 중세였기에 이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이 사실을 크게 다루지도 않는다. 또한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을 해도 그것을 오히려 권력을 안정시켜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일지언정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의 세습체제는 비난을 받아 마땅함은 21세기 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동일한 세습을 두고서 다르게 평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편파적인 차별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함수인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태도다. 하지만 진중권의 논리에는 이 점이 없다. 진중권의 의식세계를 자신만만하게 나타낸 다음 질문을 보자.
 
"박정희 없었다고 아직도 보릿고개를 넘을까?-진중권"
 
백번 맞는 말이다. 박정희가 없었더라도 한국인은 우수한 민족이므로 2005년인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릿고개 정도는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릿고개를 넘은 박정희의 업적은 별것 아니다. 그런데 박정희를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구술문화에 젖은 무지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진중권의  교묘한 논리적 사기술이 숨겨져 있다. 즉 이 명제에는 시간의 트릭( The Trick of Time )이 있다. 독자를 과거와 현재가 혼돈된 가상의 세계로 끌고 간다. 박정희가 한반도의 역사이래 처음으로 보릿고개를 해결한 시대는 5.16 군사 쿠데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과분하다) 이후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1960년대 말이었다.
 
박정희가 한국의 민중들에게 보릿고개를 넘게 했던 시기는 마을에 전기도 제대로 없었고 관개가 제대로 안되어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둑이 무너져서 이재민이 무수히 발생할 시기였다. 밤이나 농한기 때는 마을 어른들이 노름을 하면서 지내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넘은 보릿고개를 고속도로가 뚫리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2005년인 현재(아직도)에 대비시켜서 사기논법을 펼치려 하다니 실로 기가 막힌다. 이것은 무식의 소치인가? 양심불량의 소치인가? 차라리 "세종대왕이 없었다고 아직까지 한글을 안 쓰고 있을까?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뛰어난 리더가 아니었다" 라는 논법을 구사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인은 무능하다. 박정희가 독재로 민족성을 개조해 경제 발전을 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말이 안된다- 진중권"
 
이 논법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파악해 내기 힘들만큼 교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먼저 이 말은 박정희가 한 말을 비난하려 한 것이 아니라 진중권의 표현대로 박정희 옹호론자들, 즉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하여 만든 문구라는 것은 자기 자신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의도는 좋은데 그 과정이 너무 비겁하다. 이 비난이 역사철학적인 객관성을 담보하려면 "한국인은 무능하다"라는 현재형을 취할 것이 아니라 "1960년대의 한국인들은 무능했다" 식으로 과거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반론을 할려면 사실 1960년대의 한국인들이 무능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밝히면서 논거를 구성해 가야 한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진중권이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진중권의 박정희 평가논법은 사람의 감정을 격분시켜서 자신의 논리의 빈약함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 다음의 두 문장을 보자. "20년 전의 너는 코흘리개였고 정말 지저분한 아이였다" "너는 코흘리개고 지저분한 사람이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과거형인 전자는 2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로 인해서 비교적 자기 자신이 냉정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듣기에 조금 기분 나쁘지만 기껏해야 20년 전의 이야기지 현재의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형인 후자는 듣는 사람의 자존심을 묘하게 긁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다. 그래서 냉정하게 논리적인 판단을 해야 할 사안에 과도한 감정의 스파크가 흘러서 "그래, 너는 얼마나 잘났냐?" 는 반발심과 더불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시절의 1960-70년도의 한국인들의 교육수준은 낮았으며 가난하고 무능했다."는 용납할 수 있어도 이것을 살짝 바꾸어서 "한국인들의 교육수준은 낮고 가난하고무능하다."는 현재형을 쓰는 사람의 말에 적개심을 가지지 않고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드물다. 그래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시절의 1960-70년도의 한국인들의 교육수준은 낮았으며 가난하고 무능했다. 그때 박정희라는 리더가 국민들에게 비젼을 제시하고 뛰어난 지도력으로 단기간에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라는 주장에 일견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사람들조차 다음과 같은 함정에 빠뜨린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위대한 한국 민족을 무능한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며 하늘보다 소중한 당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수긍하는 당신은 도대체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냐?" 라는 식으로 끌고 가서 이성적 판단의 문제를 순식간에 자존심이나 감정상의 문제로 전치 시킨다.
 
과거를 과거로 보지 않고 현재의 논법으로 보기를 강요하는 진중권은 마치 박정희가 2005년에 정치권에 등장하더라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또 개발독재를 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하다. 당연히 2005년에는 박정희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라도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리가 없고 또 개발독재논리를 주장할 리도 없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
 
‘조선 민족은 스스로는 발전을 할 능력이 없다. 자기들끼리 당파 싸움이나 했다.'
 
여기서 왜 앞 문장은 현재형을 쓰고 뒷 문장은 과거형을 썼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의 지식인의 양심이 있다면 위 문장도 '조선 민족은 스스로는 발전을 할 능력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당파 싸움이나 했다.'로 둘 다 과거형의 문장을 써 주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니면 두 문장 다 현재형을 쓰면 읽는 사람들은 "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해 낸다.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개발독재 논리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왜냐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거나 개발독재 논리로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공히 "조선인(한국인)이 무능하다"가 아닌 "조선인(한국인)이 무능했다"는 요지의 과거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를 원하는 측에서 "민족성이 그렇다"는 식의 논지를 펴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이렇듯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진중권의 미학적 술수에 의해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이 되어 읽는 사람에게 감정적 배설을 경험하게 하는 판타지 소설로 변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구한말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조선 민족은 스스로는 발전을 할 능력이 없다" 식으로 민족성의 문제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단순하지도 않음은 물론이고 반상차별, 적서차별,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조정의 무능, 국제 정세에 어두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지표를 종합해서 판단한 객관적 상황표를 들고 시작할 뿐이다.
 
역사적인 귀납법적 논리는 진중권의 논법에 따라 시공을 추월한 연역법적 논리가 된다. 하지만 한반도의 한쪽에서는 보릿고개 신화는 여전히 귀납법적인 논리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가 말한 "아직까지" 인 2005 년 현재 한반도 북쪽에서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탈북자 행렬이 있다는 현상조차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다. 진중권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인이 위대한데 어떻게 아직까지 보릿고개를 못 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진중권같은 사이비 진보 지식인들이 애써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무능한 것이지 박정희가 이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뛰어난 리더였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하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하는 것조차 김정일이 무식하기 때문일 뿐이다.
 
더 쉬운 예들 들어보자. 2002년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이라는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히딩크가 퇴임한 후 25년 쯤 후인 2027년에 누군가가 "희딩크가 없었다고 아직까지 월드컵 4강 고개도 못 넘었을까? 그러므로 한국 축구사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히딩크는 연습장에 흑인 애인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순수한 한국의 문화를 무시했던 바람둥이에 불과하며 게다가 파란 눈의 외국인 히딩크는 선수 선발조차도 한국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자기 취향대로 했던 독재자이자 한국 축구의 자발적인 발전을 가로막은 원흉이다". 라는 논리로 바꾸면 무언가 감이 잡힐 것이다.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4강에 올린 시기는 한국이 월드컵 16강에도 목을 매던 시기였기에 위대한 리더였다고 말하는 것이지 25년 후 한국의 축구가 더 성장했기에 히딩크는 그저 그런 감독이다. 히딩크가 아닌 차범근이었더라도 그 정도는 했을 것이기에 히딩크에 환호하는 사람들은 구술문화에 젖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함에 불과하다는 논법을 용감무쌍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떻게 평해야 하나? 세상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멍멍 짖는 것이나 무식한 사람은 용감한 이치는 불과 반걸음 차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박정희나 히딩크는 보릿고개를 없애는 시기와 한국 축구의 월드컵 4강 달성을 앞당겼기에 대단하게 평가받는 것이지 그가 아니라도 누군가 했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5년인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히딩크를 강렬히 원하게 될 때는 아마 본프레레 호가 국민들이 기대하고 있는 성적을 내지 못하고 좌초하게 될 때다. 현재 국민들이 박정희를 이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져서 그 기대치를 너무나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김없는 구술문화의 생리다. 이렇듯 구술문화는 솔직하고 원초적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꾸밈이나 간사한 이해타산이나 사이비식 억지 논리가 없다. 국민들의 70% 이상이 박정희를 위대한 리더였다고 말한다. 교수 등 전문가 그룹이나 지식인들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진중권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은 박정희가 친일 행적을 가진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또 독재가 바로 개발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들이다. 이것은 진중권이 황당할 리 만큼 지독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거나 진중권 자신이 수준이하로 무식해서 제대로 된 분석도구나 평가잣대를 못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프레레가 평가전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 준다면 히딩크를 찾지 않게 되듯이 한국의 기층 민중들의 경제 상황이 나아진다면 박정희를 이토록 찾지도 않을 것이다. 현재 본프레레 감독이 맡고 있는 한국은 희딩크가 맡은 때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희딩크가 만들어 준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자산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본프레레가 다음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다고 한들 히딩크가 위대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때는 본프레레도 위대한 감독의 칭호를 받게 될 것은 자명하다.

사실 박정희에 대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진중권같이 허위의식에 가득찬 사이비 좌파 지식인의 능력으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영역일 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싱가포르 이광요 전 수상이나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북한의 故 김일성 주석이나 노무현 현 대통령이나 김정일 국방 위원장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박정희란 사람이 어떠한 리더쉽을 발휘한 사람인지 제대로 평가해 줄 시각과 경험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국의 리더(Leader)의 위치에 서서 현장을 경험한 그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다. 그런데 이들이 평가하는 박정희는 진중권의 평가처럼 그렇게 조악하지도 않고 편파적이지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마저도 박정희를 위대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마치 적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평하면서 "나를 넬슨 제독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나도 조족지혈이다" 라는 평가를 내린 것과 비슷하다. 적어도 이들은 진중권처럼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없었다고 아직까지 우리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을까?"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무식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들은 전문가적인 시각과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건전한 시민적 상식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과 바람직한 리더상
 
나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박정희 신드롬이 마음에 안든다. 게다가 그의 후광을 입은 박근혜의 부각조차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진중권의 말대로 박정희는 죽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향수가 나오는 것은 민중들이 우매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 집권세력들이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이고 또 그만큼 민중의 실생활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더욱 기분이 안좋다. 죽은 박정희가 박근혜일 리는 더욱 불가하다. 박근혜의 등장은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는 세력들이 박정희를 폄훼할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구술문화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그 향수의 열기를 활자문화로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만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유력한 대선 후보 중의 한 명인 박근혜 대표에게 관심을 가질 점을 굳이 찾아내라고 하면 그것은 그가 여자라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빨리 나오기를 빈다. 아직까지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고 실리보다 명분주의가 너무나 과도한 한국의 유교 문화의 틀 속에 여자가 대통령이 되어서 국정을 수행하는 일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뛰어난 남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차라리 평범한 여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필자는 이 일을 달성할 적임자로 추미애에게 기대를 걸었었다. 굳이 그 다음으로 한국 사회의 리더를 뽑는 척도를 말하라면, 머리에 든 것도 없고 경험도 없이 입만 나불대는 정치 백수들 출신보다는 이명박 같은 CEO출신이거나 고건 같은 행정관료 출신이나 문화계의 거목이 국정의 리더로 부상하기를 바란다.
 
박정희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단히 뛰어난 리더였다고 평가할지언정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주권자인 국민은 권력자를 존경하거나 추종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아무리 존경했던 사람일지라도 권력자의 위치로 이동하는 순간 마치 곧 부패할 도둑놈을 대하듯이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소평과 박정희
 
작년에 중국에 갔을 때 북경에서는 등소평 100 주년 행사가 한참이었다. 중국에서 등소평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물론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의 대부분도 등소평을 한 시대의 획을 그은 거인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과 중국은 상황이 좀 다르다. 한국이 중국보다는 민주화나 인권의식에서 훨씬 앞서 있다. 요즘 특히 등소평과 관련하여 박정희를 많이 연관시키고 있다. 비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인류의 이성에 비추어 다행한 일이다. 등소평과 박정희 두 사람 다 경제 부흥과 인권탄압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권탄압과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학살한 일이라면 등소평이 중국 민주화 운동의 싹을 짤라버린 천안문 학살 사태에 비길 수 없다. 하지만 등소평과 박정희에 대한 비교는 획일적인 관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서 등소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게 한국의 일이 아니므로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물론 필자도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저울에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등소평보다 훨씬 범죄를 덜 저지른 박정희를 더욱 중범죄자로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은 한국의 인권사항이나 국민의식이 높다는 지표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중국 인민들의 등소평에 대한 평가처럼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저울에 달지 않고 자기가 만든 편협한 원칙만을 따르려고 하는 짓이야말로 야바위꾼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 것은 원칙이 아니라 신앙이나 아집, 또는 술수라고 불려야 제격이다. 재판을 할 때도 그 이유를 적시한 판결문이 있어서 두고 두고 또 다른 평가를 받듯이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란 자기 취향이나 기분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난 누가 뭐래도 박정희를 한국사의 거인(巨人) 중에 한 명이라고 본다. 그래서 한국에서 박정희 100 주년이 어떻게 진행될 지 궁금하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박정희가 세종대왕 김구 이순신을 넘어선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때로는 그 지지도가 80%에 이른다. 이것은 박정희가 김대중과 함께 한국의 지역감정을 표출해 온 한 축을 담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가공할 지지율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기의 텃밭인 부산에서의 최고 지지율이 70% 남짓이었고 전국적인 지지율과는 큰 편차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전국적으로 박정희가 받는 80% 가까운 지지율은 호남 쪽에서조차 많은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몇몇 사이비 지식인들이 구술문화와 활자문화를 운운하면서 백안시하는 것은 지나친 엘리트 의식이나 허위의식의 발로에 불과하다고 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100년이 더 흐르면 대한민국 역사상 박정희를 따라갈 만한 인물들이 거의 없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현재도 그러한데 지역감정 같은 유치한 인간의 감정이 한 발 짝 쯤 물러나고 저울 같은 균형의 시각을 가진 이성이 좀 더 예민하게 작용하게 되는 100년 후에야 오죽 하겠는가? 진중권 같은 사람이 박정희의 무덤에 아무리 침을 뱉는다 한들 세월이 지나면 빗물에 씻겨 갈 뿐이다.
 
참다운 지식인과 리더의 자세
 
1년 전에 끔직한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다. 무지랭이들이야 지하철 방화를 일으킨 사람을 죽일 놈이라고 극도로 증오할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시각은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단 한 사람의 미친 짓에 의해서 그 많은 사람이 생지옥 속에서 죽어가야 했는가를 냉정하게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영국이나 홍콩의 지하철에는 광인이 방화를 해도 불이 붙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을 연구하여 밝히며 한국의 리더들은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했냐? 를 따져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자세다.
 
이렇게 신랄하게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지하철의 내부에 있는 섬유질의 파란 색의 의자를 불이 붙지 않는 알미늄 스타일의 의자 교체할 수 없다. 화재 발생 시에 작동해야 할 경보 시스템이나 안전 체계도 제대로 갖출 수 없다. 실제로 한번의 역사적 참사에서 얻은 교훈 때문인지는 몰라도 1 년 후 올해 서울에서도 지하철 방화사건이 발생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대구의 경우처럼 불길이 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더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이렇게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또 이런 사람만이 리더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진중권은 나라를 망친 것이 이완용 같은 을사 오적 때문이고 일본의 황군에 충성했던 박정희 때문이라는 무식한 논리를 편다. 그런데 이완용과 박정희가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살할 힘은 가지고 있을 지언정 특히 박정희가 그 당시에 한 나라를 망칠만한 힘이라도 갖고 있었는가? 하지만 진정한 지식인이나 리더의 책임의식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황당한 접근을 하지 않는다. 조선의 조정이 강하고 관리들이 부패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교육을 잘 시키고 근대화를 미리 이룩해 놓았더라면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 20적이 있었더라도 그렇게 맥없이 주권을 뺏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지 말라. 이완용은 천하의 나쁜 놈으로 욕을 들어야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인간이 위기에 닥쳐야만 그 본색이 제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이완용은 그 위기의 순간에 민영환처럼 자결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매국노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충분히 비난받을 짓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식인이 되어서 이완용이 죽일 놈이고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 그 방화범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랴? 이런 이야기는 지식인이 하지 않아도 초등학생들이 더 잘 안다. 지식인이 1+1=2  라는 식의 뻔한 주장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서야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녀에 대해서 사랑이 있고 양식 있는 부모라면 어린 아이를 위험한 물가나 불가에 내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리더가 있었다면 러시아 미국 청나라 일본 등의 맹수들이 우글거렸던 시대에 자신의 백성들을 아무런 방비도 없이 토끼 상태로 만들어 놓은 채  방치하지 않는다. 물론 토끼보다 사자, 호랑이, 늑대, 이리, 승냥이들 같은 맹수가 나쁜 족속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의 수준이 고작 이런 맹수들의 탐욕이 나쁘다고 탓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는 그들이 국민에게 돌려 줄 것은 또 다른 비극일 뿐이다. 지식인은 욕들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진단서라도 제대로 발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 으로 중국인에게 경각심을 울렸던 뤼신(魯迅)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사이비 진보 지식인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
 
최근의 상황은 짝퉁 진보와 명품 진보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 차이를 명백하게 드러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노동귀족의 존재, 전교조의 이익집단화, 민노총의 취업 알선 뇌물 시비, 부산 항만노조의 집행부의 부패, 국가인권위원장의 부동산 투기, 민주 노동당의 신나 폭행시비 등 우리 사회에서 성역처럼 여겨졌던 진보진영 그룹이 그 부패의 일각을 보여 주면서 국민들의 모니터 속으로 들어오고 있음은 많은 것을 예정해 준다. 이권이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 몰려있는 인간들이 부패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한계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 저변에 드러나고 있음은 더 이상 사이비 지식인들이 진보 진영에 있다는 사실이나 그런 식의 이미지 조작만으로는 버틸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마치 성스럽게 여겨졌던 성직자가 면죄부를 파는 행위를 하다가 역사 속에서 심판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 이럴 때 마틴 루터 같이 순수하게 성서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이 나타나듯이 진정한 진보 사상을 충실하게 주창하는 사람만이 생존하게 될 것이다. / 문명비평가
 
덧말) 진중권 같은 황당한 지식인들의 기우를 덜어 주기 위해서 몇 마디 한다.(뒤에다가 "맞습니다. 마꼬요"를 첨부하여 읽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1. 식민지는 나쁘다.
2. 독재도 나쁘다.
3. 도적질도 나쁘다.
4. 친일청산법을 흐지부지 하지 말고 정말 제대로 해서 친일 청산 확실히 해라. (정략적 의도가 있든 없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대신 공정하게 해라)
5. 국가 보안법도 폐지하라.
6. 일본의 식민지가 없었어도 근대화는 되었을 것이고 박정희가 없었어도 보리 고개를 넘었다.
7. 한국인은 무능하지 않다.
8. 대구 지하철 방화범은 나쁘다.
9. 이완용 등 을사오적도 매우 나쁘다.
10. 그런데 국민들은 진중권의 생각만큼 그렇게 우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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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22 [02: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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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29 [18:03] 수정 | 삭제
  • 무위글도 정말 명문이고 아래 글(출전 : 오마이뉴스)도 짧지만 명문입니다.

    죽은 박정희가 산 노무현을 이기다!
    필명 : 애국(uri8989) 날짜 : 2006/02/27 오전 7:59:03 조회 : 4181, 찬성 : 4, 반대 : 69

    죽은 박정희가 산 노무현을 이기다!

    작성자 chacer07
    조회수 405 추천수 35 입력시간 08.21 6:07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돌아 가신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 정신 병원의 환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이 사람들의 정확한 병명은 "박정희 콤플렉스" 이다.


    과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불과 십 수 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세계의 석학들과 전현직 지도자들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부정하고,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게으르고, 불순하고, 망상적이다. 특히, 이들의 일부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자유민주주의 공화제 체제에 대하여 반기를 든 사람들의 후손 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와 우리 가정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음흉한 목적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10대, 20대, 30대 )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망상에서 깨어나 넓은 시각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탄생, 과거, 현재를 직시하길 바란다. 젊은 세대들이 꿈에서 깨어나 올바른 판단과 책임있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세계의 정상에 서게 될 것이다.



  • 무위님팟팅! 2005/10/12 [08:21] 수정 | 삭제
  •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2005-10-12 01:39:35, Hit : 41, 추천 : 4)


    제목
    한강의 기적 평가 왜곡됐다"--무위주장 표절했다


    \무위 주장\
    1) 박정희 평가가 왜곡되는 것은 "무식" 때문이다.(무위) --우리 사회의 비판론자들은 국제 비교사적 안목이 너무나 부족하다.(이교수)
    2) 산업화 선진국이란 영국도 산업화 초기과정에 착취를 했다. 착취가 없는 근대화는 없었다.


    한강의 기적 평가 왜곡됐다"

    '새 한국경제발전사(共著)' 낸 진보학자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민주화정권 이념적 지향 국민들 역사관 눈멀게 해"
    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05.10.10 18:25 28' / 수정 : 2005.10.11 04:47 00'

    ▲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관련 검색어 이대근, 박정희 개발 모델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거둔 경제발전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임에도 국내 일각에서는 그것을 인정치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경제에 대해서까지 이처럼 무모하게 자행되는 이념적 왜곡과 편향은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한다.”

    경제사학자 이대근(李大根·66)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박정희 개발모델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평가에 직격탄을 날렸다. 경제사학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이영훈 서울대교수) 학자 15명과 함께 지난 주 출간한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나남출판사)에서다. 이 교수는 총론에서 “이른바 민주화 정권의 이념적 지향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 역사의 객관적 사실에는 눈을 멀게 하고, 반대로 나르시시즘적 자기 도취사관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면서 “지난 날의 역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하여도 오로지 ‘민족이란 창(窓)’을 통해 바라보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난주 국사편찬위원회와 역사 관련 4개 학회가 공동주최한 광복 60년 학술대회에서도 발표에 나서 ?식민지 유산의 긍정 ?1950년대 경제 성장에 대한 재평가 ? 대일 청구권 자금의 경제개발 기여 등 민감한 이슈를 제기,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그의 주장 중 식민지배 유산과 박정희 개발 모델에 대한 평가 등은 상당한 논란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1980년대 고 박현채 교수와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는 등 진보적 학술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경제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중진 학자다. 지난 8월 성균관대에서 정년 퇴직했지만, 더 정열적으로 학문에 매달리고 있다. 10일 낮 경기도 과천 자택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60년대 이후 경제발전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경제학쪽과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 비(非)경제학 분야의 시각이 너무나 달라서 그런 것 아닌가. 경제보다는 정치적 입장이나 민족주의적 이념이 개입돼있기 때문에 논쟁조차도 어렵게 되어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관련돼 있기 때문인가.

    “그렇겠지. 어떤 학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고 장면이나 다른 사람이 맡았더라도 이 정도로 잘 됐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추론은 무책임하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가를 보자. 장제스나 장징궈, 리콴유 등 우리만큼 독재 안 한 나라가 있는가. 산업화 초기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통제와 억압이 따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왜 박정희의 경우만 매도하려고 하는가.”

    ―산업화 초기에 자본의 동원과 배분을 위해 정치적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지나친 합리화 아닌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나 소득 불균형 등의 후유증도 만만찮다.

    “산업화 선진국이란 영국을 보자. 산업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방직 노동자들이 폐결핵에 시달렸는가. 독일이나 일본도 1930년대에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 한국은 오히려 이들 경우에 비해 착취의 정도가 훨씬 덜했고, 기간도 짧았다. 우리 사회의 비판론자들은 국제 비교사적 안목이 너무나 부족하다. 소득 불균형도 구체적 수치에 의존하지 않은 주장을 펴고 있다.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를 보면, 우리는 대단히 낮다.”

    ―97년 이후 IMF식 구조조정 이후 우리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식 노사관계나 경영기법의 일방적 도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노동 시장 유연화는 근로자의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는 등 폐단이 있다. 기업에서는 기회만 있으면 사람을 자르려고 하는데, 종업원들이 왜 온몸을 던져 일하겠는가. 한국이 지금 이런 미국 기업을 따라가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 관계 기조변화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비판했다.


    “2차 대전 이후, 국내 분업을 강조한 나라 경제는 실패했고, 국제 분업에 치중한 나라는 성공적이었다. 실패한 경우의 대표적 사례는 북한이다. 그런데, 남북한간의 6·15 선언을 보자. 민족 경제를 육성하자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한국을 놓고 보면, 국제 분업체제에서 북한을 포함하는 국내 분업체제로 넘어가자는 소리다. 따라서 한국 경제에는 나쁠 수 밖에 없다.”




    a971fc0640

    T
    무위님 주무세요............ㅠ.ㅠ 2005/10/12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원문/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3&article_id=0000151323§ion_id=103&menu_id=103

    무위글 원문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9960§ion=section3§ion2= 2005/10/12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무위글 1>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진중권이 말하는 '제대로 된 근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국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도로와 다리가 건설되는 등 사회기간 시설이 완비되고 교육제도가 완비되고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근대화를 말할 때 전 세계에서 최초로 고도 산업화의 역사를 선도했던 영국의 경우를 빼놓을 수 없다. 식민지 영토가 너무나 광범위해서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건설했다는 영국의 경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곳은 영국이 건설한 식민지 영토가 아니라 영국 본토에서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았던 잉글랜드 민중들의 이야기다. 2005/10/12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무위글2>

    불행하게도 영국이 근대화, 산업화되던 시기는 영국의 자본가에 의한 영국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착취하던 시기였다.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에 의하면 그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은 겨우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한 달에 단 한번 교회에 나가 예배도 못 볼 정도로 노동을 착취당했다. 즉 전세계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동시에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진행된 시기였다. 조선에는 근대화가 일본에 의해 타의로 진행되었기에 착취란 말 대신 수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진중권의 시각에 의하면 전 지구상에서 '착취가 없었던 근대화'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 실증적인 예가 있다면 보여주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착취가 진행된 근대화나 수탈이 진행된 시기의 근대화나 둘 다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화라는 용어 자체가 민족감정이나 독립이나 주권국가라는 말과는 별개로 평가하는 기술 문명사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착취가 근대화냐?' 라는 식의 논법을 구사하지 않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단지 역사적으로 착취와 근대화가 동시에 진행된 시기라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2005/10/12

    일치점추가
    무위님과 이대근 교수의 일치점은 여기서도
    무위)) 이것은 진중권이 황당할 리 만큼 지독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거나 진중권 자신이 수준이하로 무식해서 제대로 된 분석도구나 평가잣대를 못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근 교수))이 교수는 총론에서 “이른바 민주화 정권의 이념적 지향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 역사의 객관적 사실에는 눈을 멀게 하고, 반대로 나르시시즘적 자기 도취사관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면서 “지난 날의 역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하여도 오로지 ‘민족이란 창(窓)’을 통해 바라보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10/12

    일치점추가
    무위)) 진중권의 논법은 전혀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 지독히 편협한 감정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논리가 옳다는 사기술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인민재판이라도 이끌어 내려는 듯 너무나 감정적이다. 이성과 합리적 판단과 지성은 온데 간데 없다

    이대근교수))그렇겠지. 어떤 학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고 장면이나 다른 사람이 맡았더라도 이 정도로 잘 됐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추론은 "무책임하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무위님 파이팅! 시간이 흐를수록 허위는 벗겨지고 참이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2005/10/12

    무책임은 가라!!
    "무위님이 말한 몇몇 지식인들의 무책임과 무식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대근교수와 용어조차 똑같네여.

    사실 박정희에 대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진중권같이 허위의식에 가득찬 사이비 좌파 지식인의 능력으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영역일 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싱가포르 이광요 전 수상이나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북한의 故 김일성 주석이나 노무현 현 대통령이나 김정일 국방 위원장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박정희란 사람이 어떠한 리더쉽을 발휘한 사람인지 제대로 평가해 줄 시각과 경험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국의 리더(Leader)의 위치에 서서 현장을 경험한 그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다. 그런데 이들이 평가하는 박정희는 진중권의 평가처럼 그렇게 조악하지도 않고 편파적이지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마저도 박정희를 위대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마치 적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평하면서 "나를 넬슨 제독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나도 조족지혈이다" 라는 평가를 내린 것과 비슷하다. 적어도 이들은 진중권처럼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없었다고 아직까지 우리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을까?"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무식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들은 전문가적인 시각과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건전한 시민적 상식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 무위님팟팅!! 2005/10/12 [08:20] 수정 | 삭제

  • 무위님)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대와의 대화"라고 했다. 이는 현재에 있는 사람이 과거의 시대의 사람의 위치로 역지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역사가 보통의 학문과는 다른 점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역지사지란 뜻이 무슨 의미인 줄이나 알아? 그 재해석이란 것이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야 한다는 뜻이냐? 진짜 한심한 중생이로고..
  • 무위님팟팅!! 2005/10/12 [08:20] 수정 | 삭제

  • 무위님)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대와의 대화"라고 했다. 이는 현재에 있는 사람이 과거의 시대의 사람의 위치로 역지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역사가 보통의 학문과는 다른 점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역지사지란 뜻이 무슨 의미인 줄이나 알아? 그 재해석이란 것이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야 한다는 뜻이냐? 진짜 한심한 중생이로고..
  • --; 2005/10/05 [11:37] 수정 | 삭제
  • 카의 "역사는 ...대화"는 그런 뜻이 아니여.
    역사란 유일무이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끊임없이 재해석 하는 것이란 뜻이여.
    자네도 남의 전공을 건드릴 땐 공부 좀 제대로 하게나.
  • 연합뉴스(펌) 2005/03/31 [21:40] 수정 | 삭제
  • 김근태, 박정희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했다 발언


    궁금 (2005-03-31 18:08:47, Hit : 61, 추천 : 5)


    제목 / 김근태, 박정희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했다 발언


    김근태 장관 "빈곤 퇴치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


    OECD 사회정책장관회의 기조발제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은 31일부터 4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사회정책장관회의에 참석, 30개국 장관들과 사회정책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발전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김 장관은 이번 회의의 부의장으로서‘빈곤퇴치 및 사회통합’이라는 기조발제를 통해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임을 역설할 예정이다.

    앞서 김 장관은 스코틀랜드를 방문, 복제양 돌리를 만든 이언 윌무트(Ian Wilmut) 교수와 짐 월리스(J. Wallace) 부총리 등을 면담하고 향후 생명공학 관련 협력을 강화해나갈 것을 합의했다.




    OECD 사회정책장관회의는 지난 92, 98년에 이어 세번째 개최되는 회의로서 90년대 이후 OECD 회원국들이 경험했던 사회정책개혁을 집대성하고 성과와 한계를 점검하는 회의다.

    이번 장관회의는 '기회의 확대 : 적극적 사회정책을 통한 국민의 편익 증진방안'이라는 주제로 의장국인 네덜란드 사회고용장관 주재 아래 가족ㆍ아동정책, 빈곤 경감을 위한 대책, 연금개혁방향, 사회복지에서 민간참여 활성화라는 4개 소주제를 논의한다. (서울=연합뉴스)

    2005.03.31 12:20 입력





  • 오마이뉴스(펌) 2005/03/26 [01:06] 수정 | 삭제
  • 자식 죽인 아버지 마음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오마이뉴스 2005-03-25 12:07]

    [오마이뉴스 이승욱 기자]

    ▲ 노점일을 나서던 아버지를 배웅하다 그 차에 치여 숨진 정아의 영정이 쓸쓸히 놓여있다.

    ⓒ2005 오마이뉴스 이승욱

    "아이고, 아이고! 도대체 웬 날벼락이야."
    "왜 죽어. 며칠전까지 웃으면서 잘 다니던 아이가…."


    노점상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갔다가, 그의 트럭에 치여 숨진 정아(가명·8)의 빈소. 정아의 안타까운 소식을 TV뉴스를 통해 들은 이웃들이 정아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자, 유족들은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서민들의 애절한 삶과 아픔 드러낸 사건


    정아는 지난 23일 오후 5시 30분쯤 부산 북구 금곡동 한 아파트 앞 도로에서 일을 나가던 아버지 고아무개(45)씨의 1톤 트럭에 치여 숨졌다. 정아의 안타까운 사연은 세인들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정아를 친 트럭은 정아의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아버지 고씨와 어머니(38)는 4년여전 부터 이 트럭을 몰고 집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오징어 회를 손질해 파는 노점을 해왔다.


    이날 정아는 할머니(72)와 함께 근처 가게에서 과자를 사오다 아버지 고씨가 트럭을 몰고 나오는 모습을 봤다. 정아는 반가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배웅을 하기 위해 트럭 옆으로 뛰어가다 변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 고씨는 24일 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책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정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자식을 죽인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꽃다운 나이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가버렸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맘껏 해주지도 못했어요. 이런 마음 어떻게 다 표현합니까."


    노점상 부모 배웅하다 변 당해..."맘껏 해주지도 못했는데"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고씨는 초등학교 시절 부산으로 이주했다. 부산에서 주욱 자란 그는 젊은 시절 12년 6개월 동안 영업용 택시기사로 일했다. 개인택시 허가를 받기 위해 수년째 영업용 택시기사로 일했지만 비전은 없었다. 매년 경력 규정이 늘어나고 개인택시 허가도 줄어들어 미련을 접어야 했다.


    결국 4년여 전부터 그는 오징어 회를 즉석에서 손질해 파는 일을 선택했다. 1년여 동안은 그나마 장사가 잘 된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해 몰아닥친 콜레라 파동에다 장기화되는 경기침체는 빚덩이로 몰아갔다.


    거기다 지난해 12월말 아버지 고씨는 오토바이 사고까지 겪었다. 당시 고씨는 오징어 회를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다 지나가던 자가용을 피하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한쪽 무릎을 크게 다친 고씨는 그후 2개월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완치될지 모르는 와중에 늘어나는 병원비와 막막한 생계로 아픈 몸을 이끌고 퇴원했다. 한달여 전부터 퇴원해 통원치료를 받던 고씨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부인을 대신해 아픈 몸을 이끌고 최근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점 시작 4년...불운 겹쳐 형편 어려웠지만


    아버지 고씨는 "아직 성하지 않은 다리로 운전을 하다 보니 제대로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었다"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고 몸이라도 성했다면 아이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자책했다.


    4년여 노점 생활 동안 고씨 부부에게 첫째 딸 정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찾게 해주는 아이였다. 힘든 가정형편 탓에 학원 하나 제대로 보내지 못했지만 정아는 어느 아이 못지 않게 영특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족들 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귀염을 받으며 자랐다.




    ▲ 3월초 초등학교에 입학한 정아가 사용하던 책과 운동화가 흰 국화와 가지런히 영정 앞에 놓여있다.

    ⓒ2005 오마이뉴스 이승욱
    가족과 이웃들은 정아를 힘든 생활 속에서도 의기소침하기 보다는 명랑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아의 어머니는 "다른 아이같으면 노점 일하는 엄마 아빠를 부끄러워 할 법도 했지만 직접 나와 일을 도우기도 했다"면서 "오징어 횟감이 떨어지면 큰소리로 '오징어 말고 다른 고기도 많아요'라며 지나가던 손님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정아가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기 얼마전부터 정아에게 즐거운 일도 많았다고 한다. 정아는 올해 그토록 기다렸던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거기다 가정형편 때문에 다니지 못하던 태권도 학원도 관장님의 도움으로 일주일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 가족들은 아직도 일주일 전 태권도 도복을 받고 즐거워하던 정아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승에서 못 한 것 저승에서 누리길"


    하지만 더이상 정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은 없다. 정아의 가족들은 세상의 여느 가정처럼 죽은 정아의 아픔을 딛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아의 아버지 고씨는 하루라도 더 빨리 일을 나가야 한다며 눈물을 삼켰다.


    "정아가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이승에서 할 수 없었던 즐거운 일들, 저 세상에서 누리고 살길 바랍니다. 그나마 남은 가족들 생계에 정아가 그토록 좋아했던 우리 막내 딸…. 슬프지만 우리 가족이 잘 살아야 저 세상에서 정아도 그나마 안식을 찾겠지요."


    한편 부산 북부경찰서 한 관계자는 "검찰의 지휘를 받아야 아버지 고씨에 대한 처분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보통 인명 사건의 경우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지만 이번 경우 사연이 딱한데다 과실이 분명한 만큼 선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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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간독자 2005/03/25 [21:22] 수정 | 삭제
  • 지식인이 근원적인 대안도 마련않고 초딩들처럼 "누구 죽여라" 하면 누가 지식인 역할을 하죠? 나도 대구 지하철 참사 부분을 특별히 감명깊에 읽었습니다.

    비판이야 쉽지만 지식인들까지 비판하면서 열만내고 흥분만 하면 제 2 제 3의 지하철 참사가 올뿐이죠. 그때도 또 비판만 할껀가요?

    나라 잃은 것도 근본적인 질병을 치유할려면 지식인들만은 사명감이 좀 있어야죠. 그래서 지식인의 길이 어려운 거라고 생각해요. 무위님은 그런 불들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 지나가다2 2005/03/25 [09:28] 수정 | 삭제
  • 유명인사들은 사소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전에 도올이 그 특유의 히스테리칼하고 다혈질적인 기염을 토해내며 일반 사람들에게 행동할 것을 주장하면서 선동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거 같은데..

    남들 다 아는 얘기에 집착하고 열불내면서 신경질적으로 흥분하는 사이비들과는 다르게, 문제의 대안을 먼저 고민하고 마련하려는 자세가 사회를 사랑할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아니겠어요...?

    그리 어려울것도 없는데 비비꼬아서 음모론을 내세우시네~~
  • 지나가다 2005/03/25 [02:59] 수정 | 삭제
  • 의쟁이님 말은 또 뭔지 모르겠네여. 리더를 책임자 정도로 보면 되겠어여.
  • 의쟁이 2005/03/24 [17:27] 수정 | 삭제
  • 님이 말씀하신 "참다운 지식인과 리더의 자세"란 뭡니까?

    "1년 전에 끔직한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다. 무지랭이들이야 지하철 방화를 일으킨 사람을 죽일 놈이라고 극도로 증오할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시각은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단 한 사람의 미친 짓에 의해서 그 많은 사람이 생지옥 속에서 죽어가야 했는가를 냉정하게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영국이나 홍콩의 지하철에는 광인이 방화를 해도 불이 붙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을 연구하여 밝히며 한국의 리더들은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했냐? 를 따져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자세다."

    님의 글 한 부분만을 보고 이런 말씀을 올려 죄송합니다만, 이 부분이 마음에 안드는걸 어쩝니까? 개인적으로 싫은거야 물론 제 자유겠습니다만, 전체적인 글의 논조와 상충하는듯 느껴지는 것은, 님 또한 기존의 "구술문화/활자문화"의 상위에 있는 "새로운 활자문화의 지식인 계급"에로의 저의가 있는 것 아닙니까?
  • 대자보독자 2005/03/24 [07:28] 수정 | 삭제
  • 내가 대자보에 자주 오는 이유 대자보 독자 05/03/24 [07:20]


    좋은 글입니다.

    내가 대자보에 자주 오는 이유


    1.무위님같이 해박한 지식과 민중에 기반에 역사철학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편향됨이 없어 보여서 더욱 좋다.

    2.오동명 기자 분 같이 차분하고 좋은 시각의 글이 있다.

    3. 란보라님의 중국기행을 볼 수 있다.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이 없으면 좋은 기행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4. 발해 탐사같은 좋은 기사를 볼 수 있다.

    5. 기타 취재부의 좋은 정리 기사가 있다.

    이 이외에도 장점이 참 많은 언론이라고 봅니다.

  • 무위 2005/03/23 [12:57] 수정 | 삭제
  • 뤼신도 맞고 노신도 맞습니다. 노신은 한국식 표현이고 뤼신은 중국어의 발을 중시하여 후진따오라고 부르는 방식입니다. 등소평을 등사오핑, 모택동을 마오 쩌뚱이라고 부르듯이 노신을 뤼신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최근에는 이 방식이 주된 추세라고 보시면 됩니다.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 어허~ 고거 참.. 2005/03/23 [00:13] 수정 | 삭제
  • 쩝쩝/

    '무위님 글 읽을때마다 왠지모르게 아슬아슬하다는 생각 많이 해왔는데...서서히 자본가중심의 부르주아적 근성이 한올한올 벗겨져 나오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무위의 글 어떤부분을 보고 자본가중심의 부르주아적 근성이라고 생각되는지..
    최소한.. 자신의 추론을 이야기 할때는 그런 추론을 하게된 이유있는 근거를 논리있게 대야, 비난이 아니라 비판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근거없이 매도하는 거야말로 위태위태하지않나.....?


    가람/
    가람말대로 진보누리에서 검색해보니 무위가 한국일보 기사를 보고 잘못 인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게재했더구만... 모..

    진보누리 게시판은 제대로 보고 무위를 비난하는건가....?
    가람은 속좁은 소인배인가~ 아니면 무위컴플랙스를 가진 사람인가~

  • 이미경(펌) 2005/03/22 [19:05] 수정 | 삭제
  • 진중권씨의 오류 | 聽談峻論 2004/08/16 15:52

    http://blog.naver.com/yinde/140004975100

    고스톱판이 왜 야바위판으로 변하나?

    사람을 알고 싶으면 같이 고스톱을 쳐 보라는 말이 있다.. 고스톱을 치다 보면 돈 몇 푼에 숨겨진 인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돈 딸 때야 그래도 양반이다.. 돈을 잃기 시작하면 손부터 부들부들 떨리게 마련이다.. 옆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짜증을 낸다.. 그 시비에 상대방이 맞대응이라도 할 라시면 얼씨구나 하고 판을 뒤엎는다.. 이런걸 일컬어 “깽판을 친다”라고 한다..

    옆 사람이 시비에 반응하지 않으면 어떨까? 그 때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판 자체를 “짜고 치는 고스톱 판”으로 매도를 한다.. 상대방은 ‘구라꾼’이고 고스톱판은 ‘야바위판’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판을 뒤집어 깽판을 친다.. 설사 그 판이 자신에 의해 벌어졌다고 해도 상관 안 한다.. 깽판 치는 애들은 원래 그렇다.. 작정하고 깽판 치는 마당에 무슨 염치가 있겠는가? 판을 누가 벌였는지 따위의 생각은 접어두게 마련이다..

    진중권이 박정희 논란을 야바위판으로 몰아 부쳤다.. 보수세력이 좌파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만든 야바위 판이라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깽판 치는 애들의 논리이며 염치 없는 행동일 뿐이다.. 박정희 판은 누가 깔았는가? 박근혜를 음해하기 위해 친일문제 인권유린 문제를 거론하며 좌파 애들이 만든 판이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안다.. 판을 벌여 놓고는 끝빨이 붙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야바위판이라 이 판 깽판이란다.. 아무리 애무해도 서지 않는 것은 진중권의 깽판 논리가 아닌가 싶다..


    진중권과 유인촌의 대화…

    내가 즐겨보는 TV프로그램 중에는 유인촌이 진행을 하는 “신화 창조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KBS에서 방영되는 몇 안 되는 볼만한 교양 프로그램의 하나로, 대규모 난공사 등과 같은 프로젝트를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수행하여 성공신화를 창조하는 우리 사회의 숨은 일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에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를 설립하는 내용이 방영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인촌은 공교롭게도 진중권과 마찬가지로 중앙대의 교수이다.. 교내 식당에서 우연히 진중권과 유인촌이 만나서 같이 밥을 먹는다면 어떤 대화가 오고 갈까? 재미있는 설정 같으니 한번 연출해 보자..

    유인촌: 얼마 전에 여의도 해양과학기지 공사를 방영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통상적으로 3미티 이상의 파도 위에서는 해양공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 공사팀이 그 불가능을 깨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해양과학기지를 이어도에 만든 것이지.. 이거야말로 신화창조가 아니겠나?

    진중권: 조셉 캠벨에 의하면 신화는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 라더군.. 그래서 신화의 어원인 'mythos'도 원래 '제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네.. 신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자네도 예배당 다니는 모양이군? 해양기지교 예배당 다니는가?

    과장은 아니다.. 진중권의 박정희 관련 글을 읽어보니 이런 사오정류의 문답이 충분히 가능할 듯 싶다.. 내가 좌파 찌질이들을 상대할 때 흔히 쓰는 말이 있다.. 현자는 문맥을 비판하고, 범자는 문장을 비판하며, 둔자는 단어를 비판한다는 말이다.. 박정희 논란에 대하여 진중권의 인식은 “신화”라는 단어 하나에 매몰되어 있다.. 그로 인해 신화학자의 신화란 단어에 대한 개념정립을 끌어다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어원까지 파헤친다.. 그리곤 그 개념을 바탕으로 장황한 논리를 풀어나간다.. 이 어찌 바보 찌질이의 사오정류 논리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런 식이니 사오정류의 진중권 논리가 아무리 애무해도 설 리가 없는 것이다..


    진중권식 오류..

    중국 요임금 시절의 일이었다.. 요임금은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민생투어를 나갔다고 한다.. 길을 가던 중 한 노인이 땅바닥에 주저 앉아 배를 두두리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서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帝力于我何有哉)”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마지막 구절은 구족을 멸할 망언이었다.. 그러나 요임금은 그 노래를 듣고는 만족하여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흔히 격앙가로 알려진 이 고사는 치자의 도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명한 치자일수록 국민들이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게 만드는 법이다.. 국민들은 태평성대를 피부로 느낄 뿐이고 현명한 치자는 다스림이 물과 공기 같아서 국민이 느끼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사라지기 시작하면 국민들은 그 고마움을 안다.. 그래서 요임금이 후세에 천하의 명군으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교훈이 어찌 과거의 왕도시대에만 적용일 될 수가 있겠는가?

    박정희에 대한 국민의 예찬은 그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사라지는 지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이러한 감정을 “구술문화”로 매도를 한다.. 설사 그것이 구술문화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이해욕구와 당리당략을 위해 왜곡과 편파를 일삼은 “활자문화”보다는 오히려 공정하지 않겠는가? 박정희를 존경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의 정치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당시가 먹고 살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알량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그런 국민들을 광신도로 몰아 부치는 진중권의 행위에서 나는 먹물의 한계를 느낀다..

    진중권은 끊임없이 정치의 실체를 국민들이 알라고 종용한다.. 그리곤 그 실체를 모르는 국민들을 예배당에 다니는 광신도로 모독을 한다.. 그런데 그 정치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이란 소린가? 시시콜콜하게 정치문제를 따져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게 올바른 일일까? 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리고 진중권 스스로는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그렇게 느낄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이다.. 정치의 덕은 국민이 피부로 느낄 뿐이다.. 왜곡되고 편파적인 진중권식 지식보다는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부분이 훨씬 현명하다고 할 수가 있다.. 허접한 지식의 나열에 앞서 진중권은 “민심이 천심”이란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경제문제

    지금 경제문제가 어렵다.. 어려운 경제문제에 대하여 허접한 좌파적 논리가 판을 친다.. 작금의 경제문제가 박정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을 설파하는 자들이야말로 종교적 오류에 빠져있는 광신자들일 일 것이다.. 그렇다고 진중권식 경제인식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현재의 경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요인으로 파악하는 패배주의에 다름이 아니다.. 박정희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지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의 요지이다.. 박정희가 살아 돌아올 리가 없으니 그런 허접한 가정은 안 하느니 만 못하다..

    지금 보수 진영의 논리가 박정희식 독재로의 회귀라고 주장하는 일이야 말로 진중권 스스로가 스스로의 무지를 고해성서하는 행위에 불가할 뿐이다.. 그간 보수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대한 설파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강성노조를 와해 시켜 고질적인 한국병을 없애고 반기업 정서를 철폐하여 기업의 투자의욕을 촉진시키자는 주장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시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 보수의 경제 대안이다.. 그 주장 어디에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끌어오자는 논리가 있단 말인가? 한나라당이 그랬는가 박근혜가 그랬는가?

    박정희의 경제업적은 그 시대에 맞는 옷이었다.. 지금의 몸에는 맞지 않겠지만 그 시절에는 가장 타당한 사이즈였기에 박정희의 경제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서 박정희의 업적을 비판하는 행위야말로 과거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예배당에 다니는 것은 진중권이다.. 현실과 거리가 먼 몽상 속에 빠져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망상 속에 헤메는 일이야말로 잘못된 종교적 관행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봐도 진중권이 논리를 세우려면 비아그라를 좀 먹어야 할 것 같다.. - 이미경
  • 확률제로 2005/03/22 [19:01] 수정 | 삭제
  • 넷상에 떠도는 말이 있다. 진중권은 글쟁이고 무위는 사상가다. 진중권 글은 읽을 때 재미는 있는데 내용이 텅텅 비어있고 무위 글은 읽을수록 그 맛이 깊다. 진중권은 입만 좌파다. 하는 짓은 꼴통이다.

    진중권은 곧 금뺏지 달려고 나올거다. 진중권이 학자로 성공할 확률은 제로다.
  • 어이없다 2005/03/22 [17:55] 수정 | 삭제
  • 진중권의 논리적 모순을 말하려해도
    내 보기엔
    그의 모순이 그리도 큰 결함은 아니라고 보여지고

    대신 당신의 모순이 더 크게 보이는건 뭘까

    그래서 박정희를 다시 보자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식으로 뭘해야 하는가

    정말 이사람이 먹물이구만...
  • 2005/03/22 [16:05] 수정 | 삭제
  •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_&n=200408070052&main=1

    [기고]"박정희는 죽었다" /진중권

    박정희 문제

    예전에 서울역에 가면 길바닥에서 장기판 벌여 놓은 야바위꾼들이 제법 있었다. 대개는 장기판 벌인 녀석만이 아니라, 돈 내고 장기 두는 손님이나, 둘러서서 분위기 잡는 구경꾼들까지 한 통속으로 보면 틀림없다. 그렇게 거나하게 판을 벌려놓고, 이제나저제나 순진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야바위에 속지 않으려면 그 판에서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같은 조직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말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도 도저히 이길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게임에서 빠져 나와 게임규칙 자체를 뜯어봐야 한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남이 이길 수 없게 짜는 게 야바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임은,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균적 아이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게임에 무턱대고 들어가기보다는, 그 시간에 야바위꾼의 뒤통수를 갈길 궁리나 하는 게 좋겠다.

    박정희 논쟁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논쟁은 예외 없이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냐"는 식으로 진행된다. 게임 규칙이 이렇게 놓여지면 그 안에 들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공이 크든, 과가 크든, 25년 전의 죽은 독재자가 졸지에 중요한 인물로 컴백하는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야바위판에서 휘파람 불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박정희는 죽었다. 아무리 애무해도 그의 물건은 서지 않는다."

    신드롬의 이데올로기


    5년 전이던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했다. 때는 바야흐로 IMF 전야, 사람들은 잘 풀리지 않는 경제에 대한 불만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표출했다. 영악한 언론사들은 바로 이런 대중심리에 영합해 박정희 띄우기에 나섰다. 신문사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박정희 신드롬을 부추겼고, 조선일보에서 아예 한 면 전체를 통으로 써가며 매일 박정희 전기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박정희가 IMF 사태의 해법이 될 수는 없는 일, 잠시 후 박정희 신드롬은 급속히 가라앉아 버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잘 안 풀리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끔찍했던 과거의 좋았던 측면만을 기억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박정희 향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치적 동기까지 겹쳤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귀하신 따님이 아닌가. 그러니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박정희 뒤로 결집할 정치적 이유까지 생긴 셈이다. 이게 지금 다시 반짝하고 있는 소위 박정희 향수의 본질이다. 이 논쟁(?), 애써 리바이벌 해야 이미 5년 전에 다 정리된 얘기다.

    한때 박정희 신드롬에 고무되어 박정희 기념관 짓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문을 보니, 국민들의 자발적 후원이 거의 없어 사업 자체가 취소될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이게 대중들의 평가다. 한 마디로 대중들이 입으로 박정희를 높이 띄우는 데에는 어떤 경제적, 혹은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을 떠나서 정작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문제가 되면, 그토록 박정희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아주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는 것이다.

    신화, 민중창작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던가? 자기 책에 그는 "Das Volk dichtet"(민중은 詩作을 한다)이라는 독일어 속담을 인용했다. 한 마디로 민중은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민중들의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뜻일 게다. 실제로 수많은 영웅들의 신화를 만들어냈던 그 아득한 그리스의 민중들처럼, 이 땅의 민중들 중의 적어도 일부는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도 계속 영웅시를 지으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다.


    '신화'를 의미하는 'mythos'는 원래 '제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신화적 사고방식에 대항해 합리적 사고방식을 내세운 철학자들이 '신화'라는 말에 그런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어쨌든 신화는 구술문화에 속하고, 철학은 활자문화에 속한다. 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상이한 틀 사이의 대립이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세계를 영웅들의 행위를 통해 이해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세계를 법칙들의 연관으로 설명하려 한다.

    가령 폭풍우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하자. 활자문화에 속한 이들은 이를 온도, 기압, 증발과 같은 비인격적 용어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반면 구술문화에 속한 이들은 폭풍우 속에서 어떤 인격적 힘을 찾으려 한다. 폭풍우, 그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진노다. 경제발전이나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구술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범인'을 찾아 심판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경제발전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은인'을 찾아 감사부터 하러든다.

    은총과 믿음

    박정희에 대한 논쟁은 그의 '공과 과'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실은 두 개의 사고방식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적 논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사회의 구술문화층과 활자문화층 사이의 공시적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좀 산다고 하는 서구의 그 어느 나라에도 자기들이 그만큼 먹고사는 공로를 특정 개인에게 돌리고 감사해대는 어법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이 재미있는 정치적 의인법은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하게 남은 어떤 시작(詩作)의 욕구, 즉 영웅서사시를 갖고 있었던 구술문화의 잔재다.

    박정희 추종자들의 태도를 보면 재미있게도 우리 어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독실한 신자이신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은총으로 설명한다. 그 어떤 사건이 터지고, 그 어떤 사안이 걸려도, 어머니는 그 배후에서 결국 주님의 손길을 읽어내고야 만다. 내가 일해서 번 돈도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설명된다. 운이 좋은 것은 주님의 은총이요, 운이 나쁜 것은 주님이 내리신 시험으로 간주된다. 이 반석 같은 믿음을 과연 어떤 논리로 깰 수 있을까? 또 그것을 깨어서 무엇하겠는가?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박정희 생가에 가면, 아직도 그 초상사진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박정희 신드롬의 종교적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가끔 대학의 교수들 중에서도 논문식 글쓰기로 박정희 영웅시를 쓰는 해괴한 분들이 계신데, 그들은 모종의 범주 오류에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전제자체가 '신화적'이라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적 내용과 과학적 형식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주체성의 문제

    남이야 마징가 제트를 구세주로 섬기든, 도널드 덕을 하나님으로 모시든, 간섭할 게 못 된다. 박정희 덕분에 먹고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면 된다. 그 믿음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헌법이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는 맘껏 누릴 일이다. 아직도 청학동에서 상투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존재로써 이 사회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만드는 것처럼, 21세기 넘도록 박정희를 추종하는 이들도 그 존재로써 인류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큰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

    박정희는 그 추종자들에게 심리적 '아버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자신을 그의 '자녀'로 생각하는 것처럼, 박정희를 가부장으로 모신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자신의 그의 '자녀'로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들은 아직 자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자기들은 오직 '지도자'를 만나야 비로소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들의 의식의 바탕에 강하게 깔려 있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자신들을 끌어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지도자를 갖는 것이라고, 경제를 되살리는 유일한 길도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것뿐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율적 정체, 즉 민주주의의 능력이 없다. 사실 이념적 방향만 다를 뿐, 박정희 추종자는 실은 김일성 추종자와 본바탕이 같다.

    경제 문제

    경제가 어렵다. 대충 풀릴 경기가 아닌 모양이다. 수출은 늘어도 내수는 살지 않고, 경제는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푸념을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구술문화에 속한 이와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이 상황을 각각 다르게 이해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도 각각 다른 식으로 마련할 것이다.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경제문제에 대단히 인격적인 접근을 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그 문제를 건조하게 비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가령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현재의 경제위기가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것이다. 만약 노무현이 박정희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면, 애초에 경제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때만큼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이것으로 보아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역시 권위주의적 리더쉽을 다시 도입해야 마땅하고, 그 리더쉽 아래 온 국민을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총화 단결시켜야 한다. 그러면 아직도 고속성장이 가능하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면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위기의 '범인'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경제에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경제적 소통의 어느 지점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통의 시스템 자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을 찾을 것이다. 아울러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힘도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낼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켜온 것도, 앞으로 경제를 다시 회생시킬 것도 각각의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판단과 적절한 행동뿐이다.


    "바람이 왜 부는가?" 어떤 이는 온도의 차이에 따른 기압의 차이, 그로 인한 공기의 이동 등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런 과학적 설명의 건조함을 싫어하는 이들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풍백'이라는 가설을 더 선호할 것이다. 둘 다 맞는 얘기다. 바람은 기압의 차이로 공기가 이동하는 현상이자, 환웅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온 풍백이 일으키는 조화이기도 하다. 이 두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결만큼 무의미하다.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 가람 2005/03/22 [15:47] 수정 | 삭제
  • 진보누리에서는 진중권글을 읽지도 않고
    한국일보의 신문기사만 보고
    진보누리에 세개이상의 글을 올려 진중권을 비난하길래
    기사만 읽고 남의 글을 비판하는
    기본없는 자세에 대해서 비판했더니
    반성도 않고 그냥 가버리더니
    여기서 또 쓰네.......

    에구 남비판만 하면 뭔 소용인가
    자기가 잘못했을때 반성할줄도 알아야지.

    ps: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은 사람은
    진보누리 쟁점토론방에 가서
    무위 쩝 가람
  • 비교된 부분 2005/03/22 [15:36] 수정 | 삭제
  •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탄압이 시대상황을 고려했을 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이런 부분은 없습니다.

    비유는 세종대왕의 축첩이나 부자세습을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과 비유해서 역사에서 시간이라는 변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진중권의 논리에서 시간이라는 변수가 실종된 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쓰였고 역사해석에는 시간이 그만큼 중요함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고로 세종대왕의 축첩이나 부자세습은 박정희의 독재를 두둔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독재가 나쁘다는 것은 글 전체에서 기본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 쩝... 2005/03/22 [14:55] 수정 | 삭제
  • 무위님이 세종대왕의 축첩이나 부자세습을 비유해서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탄압이 시대상황을 고려했을 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조선조의 축첩과 1970년대의 독재를 비교하는 것도 우습습니다. 박정희 시대가 1960~70년대입니다. 통시적 공시적으로 볼 때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탄압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말이 나올만한 수준의 보편적인 문화수준에 이르른 시기입니다. 무위님은 시공간적 감각이 부족하신듯

    그냥, 박정희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라고 말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적당합니다.



  • 보다가 2005/03/22 [14:40] 수정 | 삭제
  • 뭔 말인지 알고나 쓰셨는지/
  • 웃기네 2005/03/22 [14:11] 수정 | 삭제
  • 그래도 중권이는 쉽게 쓰더만..... 설사니말이 맞다해도 이게 뭐니? 이게.... 이걸 누가 읽겠어.... 정리해서 다시 써라
  • 쩝쩝 2005/03/22 [13:54] 수정 | 삭제
  • 무위님 글 읽을때마다 왠지모르게 아슬아슬하다는 생각 많이 해왔는데...서서히 자본가중심의 부르주아적 근성이 한올한올 벗겨져 나오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대자보는 Dark Avenger님을 비롯 일리있는 반론을 적극적으로 기사화해서 균형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 Dark... 2005/03/22 [13:43] 수정 | 삭제

  • 내공이 한없이 낮지만, 횡설수설이라도 한마디 붙이고 가야 겠습니다.

    난 님의 글을 그대로 님에게 보냄이 더 맞다고 봅니다.
    이글로 진중권을 비판할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비판하심이 더 좋을듯 하네요.

    "너희들은 그 시대에 살지도 그 시대를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할말이 있다는게냐... 그 시대는 그렇고 그런 시대였고, 박정희 같은 사람이 있었고 그 결과로 현재가 있다."
  • 보다가 2005/03/22 [13:26] 수정 | 삭제
  • 전 무위님을 지지합니다. 진중권이 밑천이 다 드러났다는 게 중론입니다.
    무위님만이라도 오래오래 뜻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 hco 2005/03/22 [13:15] 수정 | 삭제
  • 혹시 진중권 컴플렉스 있는 거 아냐?
    데일리섶 기고글이 그렇게 문제있는 글이었나?
    아닌 것 같은데....
    한 참 자기글 써놓고, 진중권의 몇 마디, 자기 식대로 사기라고 해버리고,
    그렇게 이해해줄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갈릴레이는 중세 사람 아니지.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바로크시대 사람이지.
  • 지나가다 2005/03/22 [12:48] 수정 | 삭제
  • 한국일보,대자보,무위..이들은 왜 이리도 진중권에 대한 콤플렉스가 이리도 강한걸까?
  • dpd 2005/03/22 [12:44] 수정 | 삭제
  •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박통의 경제성장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웃음 나온다. 윗글 논리로는 경제 발전 시킨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도 감사해야 하네.그들 없었으면 경제가 후퇴했을지 누가알아? 야! 씨바 우리나라는 명군 만 있었구만.......

    대자보 요즘 왜이래?
  • 질문함 2005/03/22 [12:11] 수정 | 삭제
  • 노신의 아큐정전(阿Q正傳)》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입니다. 중국인의 차부더(별 차이 없다)를 통박하는 노신이야 말로 그 시대의 진정한 문학가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요.

    무위님의 전반적인 인식에 동의합니다. 과연 통렬하군요. 감사합니다.^^^
  • 이성길 2005/03/22 [11:51] 수정 | 삭제
  • 난 그냥 억압에 저항한 것 뿐이야.
  • 뭔말 2005/03/22 [11:40] 수정 | 삭제
  • 뭔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