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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적 사고의 엘리트주의와 지식인
 
변현단   기사입력  2002/02/20 [14:11]
-한국이 인종, 민족, 종교의 차별이 심한 나라인 이유는 무엇인가?


일요일 저녁이 되면 경기도 광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공장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대체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신문방송을 통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들의 노동조건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의 노동조건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라는 이방인의 서러움까지 합치면 말이다. 그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것 뿐 아니라 백인이 아닌 흑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며, 대체로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94년도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에서 알게된 안소니라는 미국 친구가 있었다. 안소니는 흑인이며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여행 중 한국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한 아주머니가 영어회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외국인을 소개시켜달라고 하기에 안소니를 소개했다. 아주머니는 아연실색하면서 거절했다. 흑인이라는 것이다. 안소니가 한국에서 머물다 떠날 때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미국보다 한국에서의 인종차별이 더 심하다고...다시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다고.

유치장에서 있던 일화이다. 불법체류의 검거열풍이 있었던 1990년도 초반. 필리핀 노동자들의 잡혀왔다. 경찰들은 쌍스런 욕까지 하면서 취조를 하였다. 반대편에 한 사람의 백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취조를 하고 있었다. 통역사까지 불러서 말이다.

이러한 일들의 예들은 무수히 많다. 문제는 한국사람들 의식에는 인종과 민족차별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내 경험상 한국처럼 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도 없을 것이다. 백인에 게는 천박스러울 정도로 숭배하고 흑인은 무시 학대한다.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등 백인종에게는 관대하지만 중동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잔인하게 대한다.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사대 근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가?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지배논리가 그대로 이식되어 이승만 정권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1970년도에는 인문계 유학이 성행을 하였고, 정치사상이나 고고학 인류학이라면 영국이었고, 철학, 사회학, 물리학은 독일, 예술가나 작가라면 프랑스를 택하였던 붐이 이제는 무조건 미국으로 향한다.

국제 역학관계에서 미국은 2차세계 대전 시기 전시소비에 힘입어 대공황을 벗어났고, 40년대 초, 산업, 외교, 군사 등 모든 전선에서 확고하게 지배하면서 전전의 유럽에 종속되었던 열등의식에 반발하여 모든 대학에 '미국인 사고방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미국적 행동주의, 실증주의가 반공주의와 결합하고 맹목적 애국주의의 강력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전술을 바꾸어 미국에 유학 오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소수정예 엘리트 교육에 합류시키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그들에게 환원 받는다. 펜타곤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자연과학 중심의 MIT, 하바드 등 미국은 대학에 투자를 시작했고 그들은 사회적 지위의 보장과 함께 자연과학연구의 결과물을 실증적 연구를 통해 국가 이익에 환원될 수 있도록 강제한다. 여기에 비즈니스 하면 미국에서 배워야 한다는 본질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비즈니스 주도의 사회로서 조작과 기만의 형태를 그 특성으로 하는 마케팅과 광고에 기초한 사회의 본질적인 양상을 반세기동안이나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집중적인 프로파겐다를 퍼부었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다수에 대항해 소수의 부유층을 보호하는 것"
"나 자신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부를 축적하라"  (냉전과 대학에서)

이러한 '미국적 사고`는 정치경제 조직의 요구로서 출발하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이다. 이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개별기업과 경제의 분화된 부문들은 사적 소유이든 국가소유이든 이윤의 극대화라는 척도로만 효율성을 특정한다. 이 효율성의 논리를 제공해온 것이 환원주의이며, 착취와 수탈을 통해 이윤을 발생시키는 자원체제의 특성만이 고려되면 상업적 이윤을 낳지 않는 특성은 무시되고 파괴된다. 이 환원주의적 세계관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문화 심리 전반에 걸쳐 미국을 지배하는 거대한 논리 시스템인 것이다.  

국내 정계나 경제계, 학계는 미국유학자들로 붐비고 있으며, 또한 출세하려면 미국유학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결국 출세를 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다녀오고 미국의 지배시스템을 배워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지배시스템을 배워온 그들은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이식하고 적용을 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해외유학파는 사고방식이 유연하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개방적 태도와 보다 자유스러운 행위들이 그런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특권을 위협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사고나 행동은 게의치 않는다"라는 미국식 사고방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엘리트주의와 지식인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2001년도 1월에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 메인스트림...선거에서 새로운 판단을 해줄 것이다."라는 이회창의 발언은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선언이다. 이런 엘리트 지배의식은 미국의 엘리트주의의 한국형 이외는 다름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한국 내에서 경기고-경북고 출신이 정치제계를 망랑한 현재의 보수지배계급들이 그러하고, ([정가화제]경기 경-복 대선 목장의 결투 2002. 1. 29. 주간조선) 미국유학파들이 그러하다. 집단을 형성하고 한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지배하고 주무르고 있는 교만하고 우월감에 찬 소수의 엘리트주의자들은 미국적 사고와 교묘히 결합하여 앵글로색슨족 우월주의를, 미국을 향한 사대근성을 모든 사회교육문화를 통해 일상적인 우리내의 삶의 모든 분야에 구석구석 침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종과 종교, 민족과 문화적 우월성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배타성은 국내 엘리트주의자들의 미국화를 전 국민에게 실현시켜 놓은 것이다.  

엘리트주의는 지식인과 차별성을 지닌다. 우리가 흔히 엘리트의식이라 함은 우월적 배타적 의식을 말한다.

" 어떤 사회든 존경받는 지식인, 즉 진지한 지식인으로 인정받게 된 사람은 권력에 종속될 경향이 매우 농후하다.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비판자, 아니 어쩌면 이데올로기적 반대자로 주변화된다" (춈스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아무리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소위 '명함`이 없이는 변변한 직장, 변변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권력화된 엘리트주의에 지식인들이 주눅이 들어 있다.
더 나아가 춈스키가 말한 대로 존경받는 지식인은 권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추파와 동시에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비판자로, 주변인으로 남아있는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권력에 과감히 자신을 던진다. 이런 사례는 정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아무리 자신이 지식인다운 지식을 가지고 정계에서 실현하고자 한다해도 이미 권력의 장에 개인적으로 뛰어들은 이상 그들은 권력의 중심부에 서야 하는 자기행위논리가 있다. 하지만 권력이란 단 한사람의 것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바에야 '집단`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이 독불장군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조건이므로 집단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집단의 요구를 무시하고 한걸음 물러난다는 것은 자신의 도태를 의미한다. 다시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갈 수 있는 우려감으로 개인적 성향이야 어떠하든 지식인의 이중성- 알고 있다는 것과 실천의 분리-의 도그마에 자신이 빠져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권력의 산물이다. 지식인은 과감히 자신의 이중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소수엘리트주의 사회지배이데올로기의 복무자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보수정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운명이 지금 나타나는 현실태인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인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실현할 수 있는 집단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독자진보정당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공익적 지식의 공유는 집단의 소명을 받고 집단과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지식은 자신의 이중성에 고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정정호 중앙대 교수 (영문학)교수의  '25년  동안 영문학 교수로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고백을 들어보자.
"기존 지식을 확대 재생하는 '지식기능공`으로 역사, 현실과 유리된 '학술논문 생산자`로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는 '공모적 지식인`으로 교수라는 경직된 권위주의에 탐닉하기 시작한 영어문학교사로서의 자신을 해체하고 싶었다"
"세계화시대의 비판적 페다고지.....세계 문학사에서 서구, 백인 ,남자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단언한 그는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IMAGE1_LEFT}또 지난 1월 24일 71세 일기로 타계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추모하면서 고려대 현택수 교수는 "우리시대의 억압을 성찰적으로 비판한 행동하는 지식이었다"라고 말한다. 기사는 덧붙여 "지식인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지식인들과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애썼으며, 그는 '마지막 강의'에서 "학문의 장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도의 장에서는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직에 안주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고독하게 투쟁했다. 특히 "조종사 없는 항공기처럼 위험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중앙일보 2002. 1. 26)

자신이 사회계급이 주어진 계기에서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확신 하에 그 계급을 위해 의식적으로 일하는 지식인 즉 유기적 지식인(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이야말로 우리의 참다운 지식인의 자화상임을 알 수 있다.

{IMAGE2_RIGHT}1980년대 학생운동의 교과서 중에 하나가 '민중과 지식인`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이책을 읽고 학생운동을 했다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이 책의 저자 한완상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한완상이 민중을 위해 한 실천적인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의 지식인적 고뇌를 들어본 바도 없으며, 그는 더 이상 그 책의 저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소수 엘리트-박제화된 지식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삶과 실천이 분리되는 지식인의 부류들이 바로 엘리트주의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은 미국의 일으킨 전쟁 또한 미국을 위시한 앵글로색슨족의 패권적 우월의식 하에서 감행된 아프간 전쟁에 대해 국내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한국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미국 식민지화`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흑인과 더불어 황인종이 차별 받고 있고, 미국을 위시한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침탈을 받고 유린당한 아프리카, 중동지역과 서남아시아계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역사의 경험은 역사적 한 사건만이 아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종, 민족 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로서 손색이 없는 한국민은 바로 이러한 결점점을 바로 보아야 한다. 미국의 지배논리와 국내 보수지배집단-엘리트주의-박제화된 지식인들이 우리의 교육문화사회경제 등 우리 일상의 모든 삶의 의식에 얼마나 뿌리깊게 관여를 하고 있는지 바로 보아야 하며, 이것은 국내의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왜 단결해야 하는지,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왜 단결을 해야하는지, 전세계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왜 단결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간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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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2/20 [14: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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