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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빛을 희구하는 붉은 빛 -녹색평화당 출범에 거는 소박한 기대 -
 
황광우   기사입력  2002/01/31 [14:31]
민주노동당 정치연수원장

1. 시애틀 추장이 남긴 마지막 연설문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고는 없다. 아무 데서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이 날아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마 내가 야만인이어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음은 내 귀를 상하게 한다. 만일 사람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늘 다시 읽어도 시애틀 추장의 목소리가 나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의 예고가 우리들의 삶의 가장 깊은 고뇌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게는 1천만 명, 많게는 5천만 명의 인디언들이, 아니 정확히 말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한 세기만에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에서 사라져갔다. 세계 무역 센타가 두 대의 비행기에 의해 허물어져 내린 그 때, "비겁한 자들이 우리의 자유를 침탈하였다."고 말한 부쉬의 오만함 그대로 지금은 백인들이 자신의 소유인 것으로 주장하지만, 그 아메리카 대륙은 사실 백인의 소유가 아니라, 아메리칸 네이티브의 소유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백인들의 인디언 침탈을 아주 먼 옛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다. 한 5백년 전의 일이었을까? 그렇고 그런 한 미개 종족을 유럽의 문명인들이 정복한, 역사의 저 구석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일은 유럽의 열강들이 동양을 침탈해 들어오던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이른바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과 동시대에 벌어진 최근세의 일이다. 그러니까 일본놈들이 동학 농민군을 죽이고 전봉준을 잡아다 죽이던 바로 그 무렵, 지구의 저 편에서는 아메리카의 이뤄쿼이족, 수우족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5천년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아간 한 부족이 사라지면서, 그 부족의 추장이었던 시애틀은 무어라 말하였던가?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소유가 아닌 이 땅을 팔 권리가 우리에게 없거니와 도대체 땅을 어떻게 매매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말한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요,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요, 바위며 수풀의 이슬이며, 조랑말의 체온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우리 조상의 피요,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강은 우리의 형제다."

2, 서울이 싫다

나는 서울이 싫다. 철없이 보따리 하나 메고 서울을 올라왔던 1975년. 서울 인사동 거리의 독서실에서 고독한 날들을 보내던 시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그래도 약간의 낭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신림동에서 서울대학교로 이어지는 너른 들판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고, 관악산에서는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지금은 이 자리가 탐욕의 마을로 변해 있다. 대학교 때 <강 건너 술집>에서 주모가 날라준 막걸리에는 인정이 넘쳐 흘러내렸지만, 지금 신림동의 술집에는 이욕만이 창궐하고, 신림동에서 술을 마시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흡사 구정물을 흡취하는 것 같다. 그래 나는 서울이 싫다. 온통 건물과 도로로 도배질된 서울의 회색빛. 서울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은 잎마저 잿빛이다.

서울이 싫어 고향인 광주로 내려왔건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광주도 서울이 되어 갔다. 95년도인가. 조그만 도시 광주를 에두르는 순환 도로를 놓는다며, 광주와 무등산을 잇는 산자락을 파헤쳐 버렸다. 광주는 무등을 보며 사는 도시인데, 언제부턴가 광주에서 무등산이 보이질 않고, 이제는 무등을 쳐다 보아도 감흥이 이질 않는다. 산 자락을 잘라내고, 산 속으로 지하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었으니, 이 지대를 삶의 터로 삼았던 새들이며 곤충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우리 세대야말로 가장 거대한 범죄를 저질러온 범죄 집단인지도 모른다. 근대화와 성장제일주의를 부르짖으며, 풍요와 편리를 추구해 가고 있는, 1970년대에서 2000년을 살아온 우리 세대야말로 선조들과 후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러 버린 것이 아닌가. 한 세대의 편리를 위하여 어떻게 산을 잘라버리고 뚫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미국의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청소하기 위하여 대륙의 들소 떼들을 살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땅에 거처하는 생명체들에게 똑같은 범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구리는 어디로 갔는가? 봄 날의 제비며 꾀꼬리는 어디로 갔는가? 그 맑던 시냇물은 어디로 갔는가?

서울이 싫어 광주로 내려온 나는, 다시 광주를 버렸다.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곳은 지리산의 계곡 물이 흘러와 닿는 남원의 한 촌 구석, 봄이면 뻐꾸기의 울음 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지고, 여름이면 살구 열매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무성히 열며, 가을이면 갈대의 잎사귀들이 외로움을 달래 주는 곳, 겨울엔 폭설에 쌓여 고립을 즐겨야 하는 이 곳에 와,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있다.

3, 파괴된 너와 나의 관계

돌아가신 김남주 시인을 떠올리며 한 마디 하고 싶다. 시인이 10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곳은 서울의 목동, 그곳의 14층에 자리한 조그만 아파트였다. 선배를 찾아 방문한 아파트는 세상을 뒤엎고도 남을 기개를 갖춘 시인의 몸을 가두어 두고 있는 <세상 속 감옥>이었다. 10년 만에 출소해 보니 세상이 너무 타락해 버려 있음을 선배는 고통스럽게 증언하였다. 돈이라는 똥물에 휩쓸려 가고 있는 서울, 섹스에 환장해 버린 서울 거리를 선배는 견디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 세상의 독소들이 남주 형의 몸 속으로 들어와 암이 되어 버렸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난 30년, 유럽에서 300년 동안 진행되어온 자본주의 문명을 단숨에 수입해 버렸다. 성장 제일주의의 깃발을 앞세우고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근대화를 향해 달려온 지난 30년, 그리하여 지금은 물질만능주의이니 황금만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진부한 언어가 되어 버린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통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자연을 아끼고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존중한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풍요와 서푼어치의 편리를 위하여 얼마나 거대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으며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몸으로 깨닫는데, 한 시간의 명상도 필요하지 않는다. 걸어 가도 되고, 버스를 타도 되는 것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가용을 몰고 있다. "옛날에는 부르주아지들의 상징이었던 자가용을 요즘에는 백수나 거지나 개나 소나 다 몰고 다닌다."는 것이 나의 술안주 타령감의 하나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너무 많은 소비를 즐기고 있다.

그렇게 하여 자연환경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아이들에게 맡기자. 내가꼭 주장하고 싶은 것은 성장제일주의의 깃발 아래 30년의 개발 투쟁을 한 이래, 우리가 파괴한 것은 산이며 강이며 하늘이며 땅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다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화두처럼 강조하는 너와 나의 관계가 황폐화되어 버린, 이 지점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고통의 중심일 것이다.

아파트의 문을 열고 닫을 때 우리는 세 번의 잠금 장치를 하며 산다. 오랫만에 친구를 만날 때, 이 친구가 보증을 서 달라고 하지 않을지, 먼저 고뇌한다. 딸이 약속된 시간에 귀가하지 않을 때, 모든 어머니들은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른다. 농사꾼이 생명체를 키우면서도 자신의 노동을 보상받지 못하는 경제적 환경 때문에 비탄에 젖는다. 언제 짤릴 지 모르는 해고의 불안이 모든 직장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해 버리고 있다. 온통 불안으로 뒤덮인 도시에, 그 불안의 수면제로 섹스방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다.

4, 맹목적으로 운동하는 자본

지난 30년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몰고 온 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혹자는 군사 독재라고도 말할 수 있고, 혹자는 남한 자본의 천민성을 지적하면서 이들의 거친 탐욕을 삿대질할 수 있으며, 혹자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횡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물질만능주의의 폐해에서 사태의 주범을 찾으려 할 것이고, 혹자는 서구 유럽의 과학 기술 문명의 필연적인 산물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다 맞는 이야기다. 나는 이런 진찰에 모두 동의한다. 동의하면서 타인의 동의를 열망하지 않는 나의 생각, 너무 평범한 나의 신조를 동화처럼 늘어놓고 싶다.

여기에 망치가 있다. 예전에 그 망치는 목수의 소유였다. 아니 목수의 소유가 아니라, 목수의 주먹의 연장이었다. 망치는 목수가 함께 일하는 목수의 친구이자, 분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망치가 목수의 손을 떠나 탐욕에 찬 자본가의 수중으로 옮겨간 이후 사태는 이상하게 진행되었다. 망치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는 목수는 망치를 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자본가에게 빌려주는 이상한 계약을 맺게된 것이다. 목수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빌려 주기로 계약한 것은 자본가가 좋아서도 아니고, 자본가가 필요해서도 아니다. 다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소유로 되어 있는 망치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목수가 자본가에게 맺은 근로 계약은 사실상 망치하고 맺은 계약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목수는 망치를 사용하면서도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성과를 모두 망치에게 바치는 이상한 사태에 대면한다. 때로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망치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는 사태까지 겪게된다. 목수의 노동을 먹고 망치는 자기를 변신한다. 망치가 자동 해머로 성장한 것이다. 망치를 볼 때 목수는 "저 것이 내 것이었는데" 일말의 분노를 느꼈지만, 자동 해머 앞에 불려 나간 노동자는 자동 해머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자동 해머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을 뿐이다. 자동 해머를 움직이는 유일한 힘은 노동자의 노동을 수탈하여 더 크고 더 빠른 자동 해머로 변신하는 것뿐이다. 이외에 그 어떤 목적도 없다. 노동자의 땀을 먹고 자란 자동 해머는 이제 고속 자동 해머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예전에 자신이 고용하였던 노동자들을 해고시킨다. 그래야 노동자의 임금을 적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속 자동 해머는 증식되어 가는 자본으로 삽을 매입하여 포크레인으로 변신시켰다. 인부 100사람이 동원되어야 할 일감을 포크레인은 한 대로 마감한다. 공룡이 생존하기 위해 거대한 먹이가 필요하듯, 포크레인은 스스로 녹슬지 않기 위해 산을 파헤치는 일감을 필요로 한다. 포크레인이 가는 곳에 대적할 장애물이 없다. 숲을 파괴하고, 강을 직선화하고, 산을 뚫어 버리고,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 포크레인에게는 인간이 숨쉬고 살아야 할 자연 환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 일감이 없으면 포크레인은 금방 녹슬어 죽기 때문이다.

이제 고속 자동 해머와 포크레인이 벌어들인 돈으로 화학 약품 공장을 산다. 이 화학 약품 공장에서 발생하는 유독 가스를 정화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는 연간 100억 원. 더 빨리 더 큰 자본으로 성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운동의 목표인 화학 약품 공장이 100억 원의 정화 비용을 투입하는 것은 사치다. 유독 가스를 정화하도록 규정된 법은 그것을 피해 가라고 만들어진 법. 유독가스는 밤에 굴뚝으로 방출하고, 유독 액체는 비 오는 날 하천으로 내뿜으면 그만이다. 대한민국의 물이 썩고, 대한민국의 공기가 죽는 것으로부터 화학공장이 무슨 고통을 느낄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황폐화시킨 주범은 바로 이들 해머와 포크레인과 화학 공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해머와 포크레인을 없애야 하는가? 나는 노자의 문명반대론을 진지하게 존중하는 입장이다. 할 수만 있다면 문명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옷도 입지 않고, 전기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자연주의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화학 제품의 옷을 입고 있고, 지금 두드리고 있는 이 컴퓨터를 위하여 전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이를 어이 할 것인가.

5, 푸른 빛을 희구하는 붉은 빛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해방되고, 더 이상의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할 일은 간단하다. 해머와 포크레인과 화학 공장의 소유자 자본가로부터 해머와 포크레인과 화학 공장의 소유권을 빼앗아,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머와 포크레인과 화학 공장의 맹목적인 자기증식 운동을 위해 인간을 희생물로 삼을 것 아니라, 해머와 포크레인과 화학 공장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도록 이것(!)들을 인간이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25년 동안 이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종사하였고, 지난 15년 동안 진보정당운동에 복무하였다. 민주화 운동이 별건가. 일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진보정당운동이 별건가.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꿈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이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권력을 가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지.

녹색과 적색을 구별하고 대립시키는 것이 나에게는 우습다. 녹색이 적색이지 아니하고 녹색의 대안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나의 적색은 녹색을 희구하는 적색임을 밝혀 두고 싶다. 푸른 빛을 희구하는 붉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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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1/31 [14: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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