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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식의 경제읽기] 페론주의의 교훈
페론주의는 정치권력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ba.info/css.html'>
 
최용식
{IMAGE1_LEFT}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또는 페론주의)은 영국의 대처리즘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면서, 그동안 경제학계는 물론이고 정치계의 치열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대체적인 평가를 보면, 대처리즘이 '영국병'에 시달리던 경제를 살려낸 데 반해,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를 지금의 경제난국에 빠뜨린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다.


자 그럼, 페론주의가 어떻게 대두했고 아르헨티나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1. 페론주의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

19세기말 유럽에서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식량 수입수요도 급증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식량수출도 크게 늘었으며, 1877년부터는 냉동육 수출까지 가능해지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고도성장의 가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때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7%를 오르내리면서 세계7대 경제부국으로 떠올랐다. 1인당 GNP는 스위스나 스웨덴보다 높았고 독일과 비슷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혜택은 거의 대부분 대 농장주와 대 상인 그리고 대 기업주에게 돌아갔다. 이민의 급증으로 임금이 오르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호황을 기록하고 있었던 반면,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경제마저 여의치 않았던 것이 아르헨티나 이민을 급증시켰었다.

어떻든 아르헨티나 경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보이고 있었으나, 일반 국민들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사회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2. 페론의 집권과정

1916년에는 급진적인 시민당이 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업고 집권하여, 이리고엔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최저임금제의 실시, 최대 노동시간의 제한, 복지제도의 확충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 주효했고, 집권 후에는 이런 정책들은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20년대까지 장기간 호황을 구가하던 아르헨티나 경제는 1929년에 세계대공황이 발발하자 갑자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경제난국을 기화로 1930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경제난국이 닥치자 노동조합의 파업이 잦아지고 사회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 군부에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살아나면서 군사정권의 부정부패는 더욱 만연하였고, 국민들의 원성도 높아져 갔다. 그러자 1943년에는 소장파 군부세력인 [통일장교단]이 페론의 주도로 친위 쿠데타 단행하였다. 쿠데타가 성공 후, 페론은 배후의 실권자로서 국방부와 노동부 장관, 노동복지부 장관 겸 부통령 등 요직을 거치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대전 때 아르헨티나는 친독정책을 취했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게 민정이양을 강요하게 된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945년 10월에는 군사정권이 페론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부인인 에바 페론이 노동자를 규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고, 그를 석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46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은 득표율 54%라는 지지를 얻어 집권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군부와 카톨릭까지 지지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강력한 권력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는 히틀러 식의 국가사회주의를 기치로 내세웠다.

3. 페론의 경제정책과 그 경과

페론은 취임 후 '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철도와 전화 등 국가기간산업을 국유화시켰다. 아울러, 노동자의 처우개선 및 생활수준 향상, 여성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지위개선, 남녀평등, 초등교육 확장 등을 추진하였다. 에바 페론은 자선단체 구성 등 치밀하게 준비된 연출로 빈민과 노동자의 열광적인 인기와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페론의 우상화와 권력강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계대전 후 식량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아르헨티나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국제수지도 대규모 흑자를 기록하자, 이것을 재원으로 과감한 공업발전전략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용자원이 공업화에 집중되면서 주 수출산업인 농목축업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한편 유럽에서는 전후복구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유럽의 식량수입이 줄어들었다. 아르헨티나 수출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무리하게 추진하였던 공업화전략은 외환사정의 더욱 급속한 악화를 불러왔다. 자본재 수입의 급증이 국제수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페론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졌고 차츰 독재로 기울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언론과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그렇지만 1951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득표율 67%라는 절대적인 지지로 재선되었다. 이런 득표율은 에바 페론을 부통령에 앉히려는 과욕을 부리게 했고, 이것은 군부의 심각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권력기반은 오히려 약화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미국과 영국 등이 아르헨티나 산 농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자, 아르헨티나의 외환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도 침체되면서 노동자들의 사정도 점차 악화되었다. 그러나 재정자원의 부족으로 노동자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를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되면서 노동자의 반발까지 불렀다. 더욱이 노동자와 빈민의 우상이었던 에바 페론마저 1952년 사망하자, 페론의 국민적 지지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다 카톨릭교회가 과격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한다며 탄압함으로써, 카톨릭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경제난이 점점 심각해지자 1955년에는 그동안의 자립노선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외자유치에 나서게 되었다. 국유화했던 국가기간산업들에 대한 외자유치는 민영화를 피할 수 없게 하였고, 민영화에 따라 노동조건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은 폭동을 일으키는 등 결사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1955년 9월에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고, 페론은 실각하여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4. 페론 제1기 치하의 경제성과

아르헨티나 경제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전통적인 문제점은 외환위기와 물가폭등의 간헐적인 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물가와 외환보유고는 국가경제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경제지표들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던 것이 페론의 경제정책이며, 이 때부터 좋지 못한 전통이 굳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금을 제외한 외환보유고를 보면, 48년 5.6억 달러에서 꾸준히 감소하여 55년에는 불과 8,500만 달러로 축소되었다. 구체적인 연도별 동향은 다음과 같다(단위 억 달러).

연도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외환  5.61 2.66  4.45  2.53  1.33  1.60  1.52  0.85

수출은 48년 16.3억 달러에서 55년 9.3억 달러로 축소되었으며, 수입도 경제사정의 악화로 48년 15.6억 달러에서 55년 11.7억 달러로 축소되었지만, 무역수지는 2.4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전통적인 무역수지 흑자국에서 간헐적인 적자국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체적인 동향은 다음과 같다(단위 억 달러)

연도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수출  16.3  10.4  11.8 11.7   6.9   11.3  10.3  9.3
수입  15.6  11.8   9.6  14.8  11.8   8.0   9.8  11.7
수지   0.7  -1.4    2.2  -3.1 -4.9    3.3   0.5  -2.4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949년 31.1%에 이른 뒤, 50년 25.5%, 51년 36.7%, 52년 38.7% 등 폭등세를 기록했다. 물가를 잡기 위해 52년부터는 고정환율제를 시행하였고, 그 덕분에 물가가 차츰 안정되어 53년 4.0%, 54년 3.8% 등을 기록했다. 그 뒤 외환사정이 악화되자 55년에는 물가가 다시 12.3% 까지 뛰었다.

고정환율제는 위에서 본 것처럼 물가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는 혹독하였다. 52년 성장률이 -12.5%까지 떨어진 것이다. 53년에는 물가가 안정되자 성장률도 14.3%로 뛰어오르면서 경기가 회복되었지만, 54년에는 성장률이 0%로 후퇴하였고, 55년에는 다시 12.5%로 뛰는 등 경기가 널뛰기를 시작하였다. 경제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것이다.

5. 페론의 재등장

페론을 몰아내고 집권한 군사정권은 개발독재를 내세웠으나 실패만을 거듭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가 장기화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부의 편재도 더욱 심각해졌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세력도 과격해지면서, 게릴라 집단이 전직 대통령을 납치하여 살해하는 등 사회불안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1972년에는 경제난과 사회혼란으로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이 페론의 귀국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9월에는 득표율 62%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후처인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난은 해소되지 않은 체, 좌익 게릴라의 활동은 계속되었고, 우익테러까지 겹치면서 사회적 혼란도 그치지 않았다. 1974년 페론이 사망하자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1976년에 군사쿠테타가 또 발생하였다. 이사벨 페론이 실각한 것이다.

6. 제2기 집권기의 경제적 성과

외환보유고는 73년 11.5억 달러와 74년 11.4억 달러에서 75년 2.9억 달러로 급감하였고, 76년에는 14.5억 달러로 잠시 회복되기도 했다. 성장률은 73년 5.5%와 74년 6.6% 등을 기록하다가, 75년 -1.3%와 76년 -3.9% 등을 기록하면서 경기가 극심하게 침체되었다. 반면에, 소비자물가상승률은 73년 61.2%, 74년 23.5%, 75년 182.9%, 76년 444.0% 등을 기록하면서 본격적인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의 절대적 지지를 업고 재집권했으나,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위에 열거한 경제지표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인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페론으로서도 노동자들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7. 페론주의의 평가

{IMAGE2_RIGHT}아르헨티나는 과거에 세계 7대 부국에 꼽혔던 만큼, 과학기술 수준도 높았다. 볼펜과 버스 그리고 헬리콥터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을 정도였다. 노벨상 수상자도 5명을 배출할 정도로 전반적인 학문수준이나 문화수준도 높았다. 교육수준도 비교적 양호했으며, 무엇보다 문맹률이 비교적 낮았다. 거대한 팜파스를 기반으로 한 농축산물은 물론이고 석유 등 각종 자연자원도 풍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세계경제의 암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여기에 페론주의가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난 연말 모라토리움 선언 이후 분노한 시민들의 항의시위 모습

노동자와 빈민의 인기에 영합하면서, 과거에 쌓아두었던 국부를 함부로 소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초인플레이션과 외환위기를 천형처럼 떠 안겨서 장래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까지 소진시켰다. 또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와 노동자의 대결을 부추김으로써 사회적 위화감까지 조성했다. 이것은 사회의 균형감각을 잃게 하였고, 각종 정책들이 극단을 왔다갔다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경제는 성장기반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사실은 부의 편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초인플레이션과 외환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인플레이션은 물가폭등을 통해서 경상이전소득을 크게 늘림으로써 부의 편재를 도왔고, 외환위기는 극심한 경기침체를 불러옴으로써 실업자의 급증을 양산하여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빈민층의 확산을 불러왔다.

그런데 초인플레이션과 외환위기는 모두 페론주의와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던 페론이나 정치적 정통성이 없었던 군사정권은 경기를 무리하게 부양하려 하였고, 무리한 경기부양은 초과수요를 발생시켜 국제수지 악화와 물가불안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페론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군사쿠테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군부세력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노동자의 지지를 이끌어내서 잠재적 경쟁자인 군부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갖추지 못했었고, 경제정책적 실천수단에 대한 고려도 부족했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아르헨티나 경제가 그것을 대변한다. / 논설위원

[관련기사] 석진욱,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에 대한 천박한 인식들에 대하여, 대자보 71호

* 본문은 21세기경제학연구소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기사입력: 2002/05/08 [19:33]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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