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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박정희기념관, 국민이 '명예'롭게 받아들일 때까지
 
늦깍이   기사입력  2003/04/22 [01:15]
박정희 기념관건립에 대한 찬반논란이 있다. 기념관건립논란은 그만큼 박정희가 그 공과를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거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는 여러모로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 (1672-1725, 영어식 표현은 Peter the Great)를 생각하게 한다. 모든 면에서 서유럽에 뒤져있던 러시아는 표토르 대제의 40년에 걸친 집권기간을 거치면서 유럽의 강호로 부상한다. 그는 젋어서는 군인이었고 탁월한 기술자였는데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서유럽의 과학기술문명을 몸소 익혔다. 집권기간에, 발틱해를 손에 넣기 위해 스웨덴과 싸워 이겼으며 군대, 행정, 과학기술 등 러시아의 모든 면에서 개혁을 단행해서 부국강병을 이룩해냈다. 그는 극단적인 실용주의자여서, 그의 목적을 이룩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를 따르기 위해선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적 반대세력에에 가혹했고 그의 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반역음모로 처형했다.

박정희 역시 군인출신이었고, 20년에 걸친 집권기간동안 오직 한국전쟁으로만 알려진 한국이라는 최빈국을 세계 10위권대 경제규모의 국가로 끌어올렸다. 철저한 실용주의자로서 목표를 이룩하는데 강렬한 의지를 지녔고, 정부부문과 민간부문 가릴 것 없이 그의 성과를 위해 열정을 바칠 사람들을 발굴해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KECRI (지금의 ETRI 전자통신연구원) 와 KIST(과학기술연구원) 등을 비롯한 많은 연구소를 설립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 오늘날 한국의 과학기술의 초석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근대화 프로그램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그 어떤 시도나 대안들 그리고 그것들을 주장한 사람들에겐 가혹하기 그지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테러나 옥살이를 감수해야했고 심지어는 목숨도 잃었다.

업적으로만 본다면 박정희는 표토르 대제에 뒤지지 않겠지만,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열성적인 지지와 차가운 혹평으로 양분되어있다. 박정희가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판을 받았고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것은 그의 시대가 왕의 절대권력이 용인되었던 전근대가 아니라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한 영웅이었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 지지논리의 핵심은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해줬다'는 단적인 표현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의 경제개발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국외의 많은 경제학자들과 경제정책담당자들에게도 강렬한 영향을 끼쳐서, 한국 경제 나아가 타이완, 홍콩, 싱가폴을 포함한 '아시아 4룡'들에 대한 연구성과를 가져왔다. 아시아 4룡들은 세계경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출경쟁력강화을 통해 경제개발을 성공시킴으로써, 이전 개발대상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주요이론이었던 중심-주변자본주의이론 (center-periphery theory) 또는 수입대체정책 (Import Substitution Policy)등 국내지향적인 경제이론이나 정책들을 무력화시켰다.

4룡 중에서도 특히, 타이완과 한국은 일제의 지배를 받았고 낙후된 농업이 주요기반이었던 경제를 가장 활발한 전자정보통신 강국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원래 도시국가였던 작은 나라, 싱가폴과 홍콩에 비해 더더욱 주목을 받았다. 두나라의 성공사례는 주류경제학계의 일반적이론인 시장자유가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시장자유주의이론에도 타격을 안겼고, 국가가 용의주도하게 시장에 개입해 산업경쟁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국가주도경제개발이론'을 탄생시켰다. 타이완과 한국의 경제발전은 강력한 독재권력이 강력히 추진한 각각 4개년 경제개발과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자유시장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제성과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 경제개발의 성공은 인정하되, 한국의 재벌, 정경유착 등, 경제적 폐해와 부작용이 심각했음을 비판하고, 민주적인 정권이 대중들의 활발하고 자율적인 참여를 유도했다면 보다 더 안정적이고 그리고 혜택이 골고루 나누어지는 경제개발이 가능했다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러한 이론이 집약된 책이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1985)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부터, 민주주의, 대중들의 활발한 참여, 이해관계들의 조정과 타협,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이 한국에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역설해왔다. 정치적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이, 경제모델에서도 그러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박정희의 경제모델에 반기를 들었던 김대중을 박정희가 용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진 정치적 탄압을 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박정희 모델과 김대중의 모델 중 어느것이 더 타당한지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특히, 경제모델이 실험실조건에서 통제와 재현을 통해 검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김대중의 모델은 대안으로서만 그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다만 김대중으로서 다행스러운 점은 그역시 현실 경제를 책임지고 운영할 기회를 갖게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5년 재임과 박정희의 20년 재임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김대중의 이상적인 경제모델과 구체적인 현실경제 사이의 갭이 얼마나 큰지 확인해볼 수는 있었다.

정부의 시장개입을 반대했던 김대중이었지만, 빅딜(Big Deal)에서처럼 정부가 구체적인 기업의 합병을 지휘했고, 노동자/기업/정부 3자의 합의가 이론에서는 강조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깊은 골만 남기고 표류했으며, 국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도입했던 의약분업이 오히려 의료기득권층을 배불리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박정희모델이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라는 병폐를 나았던 것처럼, 김대중모델도 그 이상과는 달리 많은 부작용을 나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을 낳았다고 해서, 경제모델이 실패했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하다. 경제모델은 결국 부작용을 상쇄할만한 성과를 나았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모델이나 김대중모델이나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평가해주는 것이 공정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모델의 성공여부는 대통령의 성공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일부분의 문제이다. 한국의 근대 100년의 프로젝트가 근대적인 민주국가/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위해서 민주주의와 통일과업은 결국 희생시켰다. 김대중은 민주주의/경제/통일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겼지만, 정치적 판단미스로 1987년에 민주세력을 분열시키는 잘못을 범했고 이후에 한국정치가 지역주의의 나락에 빠지게 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두사람 모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국민 모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고, 오직 열성적인 지지자집단만을 만들어버렸다. 세대를 거쳐 이러한 대립이 잊혀지고, 또 상처와 피해의식이 극복되면 박정희, 김대중 모두 지금보다는 보다 후한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호의적인 역사적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두사람 모두 상처입은 영웅일 수 밖에 없다.

박정희 기념관은 미국의 대통령 기념관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과문한 탓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그 많은 대통령들중에서도 기념관 (memorial)에 모셔진 대통령들은 몇명되지 않는듯하다. 필자가 알기로는 워싱턴, 제퍼슨, 링컨, 루우스벨트, 케네디 등이 그들이다. 대통령 기념관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기념관의 의미가 일종의 '명예의 전당' (Hall of Fame)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분야에서의 업적 때문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다수 국민들이 '명예'롭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영예로운 장소에 기리고자 할 때 비로서 기념관이 세워질 수 있고 그리고 욕되지 않게 보존될 수 있다.

기념관 건립을 두고 팽팽히 입장이 대립되어 있는 상황 자체는 이미 기념관의 건립의 필요조건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념관 건립의 목적이 국민들이 존경할 수 있는 대통령을 대대손손 국가의 사표로 삼겠다는 것이라고 할 때, 기념관 건립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키고 아픈 상처들을 들춰낸다면, 기념과는 설령 만들어진다고할지라도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

일세를 풍미하며 시대의 영욕의 중심에 있었던 박정희를 시대의 영웅으로서 그냥 마음속에 모셔두는 것이 박정희의 진면목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 박정희는 결코 명예에 일희일비했던 사람은 아니다.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신이 한국의 나아갈 길이라고 판단한 바를 집요하게 관철시켜나간 사람이다. 그것이 박정희의 가장 큰 자산이었고, 박정희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논란를 초래해가면서 굳이 명예의 전당에 추대할려는 시도는 결코 박정희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게 명예라는 옷을 입히려는 어설픈 시도를 하지 말자. 영웅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활보하도록 자유롭게 놓아주자.

* 사진설명 : 2000년 11월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흉상을 민족연구소, 홍익대 민주동문회와 대자보 등 5개단체가 끌어내리고 있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은 4.19기념회 곽태영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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