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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으로 커피 타기 싫은 남자들에게
'그깟 일'이라고, 권위와 폭력의 의미 재고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3/04/22 [02:00]
초등학교장 자살 사건을 보니...
여직원이 상사에게 커피를 타주는 문화 아닌 문화가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줄 알았죠.

요즘은 직장에서 성교육 비디오를 틀어주고 강사가 와서 교육까지 한다니까 여자들 처지가 나아졌나 싶었어요. 그래서 새파란 여자 직원에게 잔심부름 함부로 시켜먹다간 큰 코 다치겠다고 몸을 사리는 남자들이 많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초등학교장 자살 사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참 순진했구나 싶네요. 아니면 다른 직장은 괜찮은데 유독 교직 사회만 그런 건가요?

돌아가신 분을 비난할 생각은 없고요. 구세대가 그런 관행에 젖어 있다는 것, 그것 고치는 거 그분들한테는 아주 고역이라는 것, 알고 있어요. 그분 세대의 사고 방식이라면 직장에서 상급자가 나이 어린 여직원한테 커피 시중 받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 모르죠.

유독 교직사회만 그런가요?

그것이 부당노동행위에 속한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테고, 성차별이라고 하면 펄쩍 뛸 테고, 성희롱에 들 만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어안이 벙벙할 분들 많겠죠.

그런데 나이를 얼마 잡숫지도 않은 분들마저 돌아가신 분을 옹호하고 그 여교사를 비난하고 나오는 건, 암만 생각해도 이해 못하겠어요.

뭐라고요? 차 타는 일쯤은 약과고 남자들은 더 힘들다고요? 알아요, 직장에서 무거운 짐 옮기느라 낑낑대고 아침마다 정수기 물통 갈아주는 일 다 신참 남자 직원들이 한다는 것. 그러니 뭐예요, 그깟 일 가지고 못하겠다고 떠든 그 교사가 잘못이란 말인가요?

이것 보세요, ‘그깟 일’을 일이라고 시키니까 더 우스운 거잖아요. 차라리 땀나고 용쓰는 일이면 덜 불쾌할지도 몰라요.

누구는 도대체 손이 없나요, 발이 없나요(커피 타는 데 발은 필요 없지만)? 커피 끓이는 ‘그깟 일’, 먹고 싶은 사람 제 손으로 못 하는 이유가 뭔지 당최 모르겠어요.

기간제 여교사가 아침마다 모닝커피 입에 안 갖다주면 귀하신 교장 선생님 체면이라도 구겨진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권위 내세우는 것, 그래야 높은 사람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것, 정말 질색이에요. 수업하다 말고 교장실에 커피 타러 가는 여교사 입장은 왜 생각 안 하는데요? 당신 같으면 굴욕감 안 느껴요? 애들 앞에서 교사 체면이 그게 뭐냐고요.

그 교사를 욕하는 분들은 제발 그 교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가르쳐주세요. 아무리 하늘같은 교장 선생님이라도 차 시중을 강요당했는데 참으라니요.

비정규직 여성인 주제에 윗사람이 시키는 일은 끽 소리 없이 따르라는 말을 하고 싶나요? 그 교사인들 윗사람 말 잘 듣고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어요? 제게 돌아올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잘못된 관행을 물위로 드러나게 해준 분에겐 상을 줄 일이 아닌가요?

불쾌하고 아니꼬워도 참아야 된다느니, 그것이 직장 문화라느니, 군대에선 졸병들이 상상도 못하는 일도 예사로 하는데 그걸 못 참느냐니 하는 분들요, 당장 보세요, 적어도 앞으로는 학교장이 기간제 교사라고 차 타 달라고 했다간 곤욕을 치른다는 걸 알 테니 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거잖아요.

이렇게 효과는 당장 나타나잖아요. 이런 게 사회 진보이고 민주주의 아닌가요?

그리고 툭 하면 군대 타령하는 분들요, 군에서 험한 일 배운 거 자랑도 아니고 어디 써먹을 데도 없으니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말아요. 아직도 군에서 배운 게 사회에서도 통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중병을 어찌할 수 없지만요.

학교장과 교사는 한쪽이 명령하면 다른 한쪽이 무조건 따르는 관계가 아니에요. 다만 업무의 책임과 권한의 크기가 다를 뿐이죠.

지금 세상에 필요한 건 수직적인 권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권위 아닌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 학교장이라고 여자 교사에게 차 타 오라고 명하면 안 된다는 말로 알아들으세요.

권위와 폭력의 의미 재고해야

하나만 더 말하죠. 주먹을 써야 폭력이 되는 건 아니에요. 업무와 상관도 없는데 싫은 것 강요하는 것도 엄연히 폭력이고 인권 침해란 말이에요. 뭐요? 더러워서라도 직접 타 먹겠다고요? 그렇게 하세요. 싫다는 사람 억지로 시켜봐야 커피 맛이 나겠어요? 그래도 그게 맛있다면 드시는 분 소화 기능을 의심해 봐야겠군요.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4월 17일자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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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4/22 [02: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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