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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발굴] 음성 꽃동네 성지인가? 버려진 땅인가
나는 꽃동네의 실태를 네티즌에 보고한다!
 
편집부   기사입력  2003/01/29 [23:48]
* 본 기사는 음성 꽃동네에 관한 최초의 발굴기사로 1999년 12월 8일 대자보 26호(원문보기)에 게재되었습니다. 최근 음성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대한 언론보도가 빈번해짐에 따라 네티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대자보 편집실은 꽃동네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겠다며 제보하여 온 원고를 놓고 많은 토론을 거치며 고민해야 만 했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꽃동네에서 인권이 유린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제보자의 구체적인 증언은 비켜 갈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우선 제보자를 만나면서 한편으로는 제보자인 홍원기 님의 지난 날을 추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를 가는 서울발 장항행 열차 안에서 본 기자는 내내 "어느 사이코 환자가 벌이는 단막극" 정도이기를 바랬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어쩌면 복지국가를 지표로 삼는 이 나라의 위정부터 뒤흔들 수 있는그 폭발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보로서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복지시설인 '꽃동네' 또한 재조명을 받아야 하며, 그러한 검증과 재점검 속에 보다 나은 복지시설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취재로 꽃동네의 운영과 실태가 더욱 투명해지고 보다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사로 인해 한국의 복지시설 및 꽃동네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홍원기 님의 동의를 얻은 녹음을 기초로 하여 편집했다.

대) ― 본지 기자
홍) ― 제보자 홍원기

  대) 님의 제보 기사인 '과연 누구를 위한 꽃동네인가?'를 보고 취재를 나온 대자보 편집부다. 반갑다.
  홍) 제보를 받고 취재를 나온 점에 고마움을 표한다.

  대) 먼저 취재에 들어 가기 전 님의 신상명세와 녹취에 동의를 할 수 있는 지  궁금하다.
  홍) 현 주소는 충남 서천군 장항읍  신창2리 xx번지이며 주민등록번호는620313-1459xxx이다.  녹음과 기사 편집에 동의를 한다.

  대) 제보하신 기사의 꾸밈이나 님의 다른 기사를 보면 글의 구성이 탄탄하든데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홍) 최종학력은 국졸이다.  그러나, 자기 계발을 위해 항상 공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대) 음성의 꽃동네는 우리 나라 사회 복지 사업의 대표적인 시설이라고 할만큼  사회복지 시설부분에 그 비중이 크다. 그래서 님의 제보가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 사회복지 시설부분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다.  사실에 근거한 얘기만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나 제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홍) 귀 대자보에 제보한 내용은 전부 사실이며 한 점의 거짓없음을 밝힌다. 내가 밝힌 모든 글의 내용은 증명을 할 수 있다.  또한 오늘의 취재에 녹취되는 부분도 사실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도 약속한다.

  대) 꽃동네에 근무한 기간은?
  홍) 몇 년이 지나서 정확한 기억은 못하나 1992년 3월 10일부터 1993년 2월 27일까지다. 약 1년간이다.

  대) 근무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홍) 어려서부터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청년 시절을 거치면서 그 관심을 실천하고 싶었고 청소년 계도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좀 더 구조적이고 발달된 사회복지를 하고 싶어 많은 복지시설에 자원봉사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지시설에 이런 저런 문제점들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복지시설이라고 일컫는 꽃동네에 들어 가서 자원봉사 하면서 제대로 된 복지운영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 나에게 꽃동네는 유토피아를 이루는 곳으로 보였다.

  대) 그러면 순수한 자원봉사의 활동이었나?
  홍) 그렇다.

  대) 혹시 꽃동네에 근무하면서 숙식 생활 외에 월급이나 용돈 같은 것 수령한 일은 없는가.
  홍) 꽃동네에서 당시 청자라는 담배를 지급해 주긴 했다. 그러나 담배가 독해서 조금 순한 솔 같은 담배를 피우자면 본인의 돈으로 사야 했다. 자원봉사하러 간 사람이 급여를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자원봉사의 개념은 순수 그 자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꽃동네 측으로부터 급여나 용돈을 받은 일이 없음을 밝힌다.

  대) 꽃동네서 맡은 일은?  직책이라든가 직무가 있었을 것 아닌가?
  홍)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인사를 담당하는 수사님과의 면담에서 '얼마나 있을 것인가'를 물어 왔을 때 '하루가 될 지 평생이 될 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펼치고자 하는 사회복지의 뜻을 전달하니 '그러면,  정신요양원의 3층에 가서 근무를 하라'고 지시했다.
  정신요양원 3층은 꽃동네 회원 소식지를 전국 회원들에게 부치기 위해 인쇄된  주소지를 봉투에 붙이는 작업 등을 주로 하고 있다.  나는 꽃동네 가족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을 보조해 주면서, 그들의 건강이나 상태를 살펴보는 일이 주 업무였다.

  대) 정신요양원은 건물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나?  이 질문은 홍원 기님이 그 곳의 근무가 분명한지를 가름하는 것이기도 하다.
  홍) 정신요양원은 총 6층 건물로 1층은 약 70여 평의 넓이의 성당이 있으며 각 층마다 내부구조가 조금씩 다르나 대부분 중앙에 복도가 있고  요양시설, 목욕탕, 화장실 등이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2층은  꽃동네의 복숭아 농장을 가꾸는 가족들이 있었고  3층과 4층은 꽃동네 회원 소식지 작업과 주방작업을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5층은 사무실, 6층은 꽃동네 내의 공사장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는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 여기서 가족이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가?
  홍) 꽃동네에 들어 와 사는 많은 사람들… 정신질환자, 알콜중독자, 자폐증환자 등을 일컫으며  그들 외의 자원봉사자는 형제나 자매님, 담당  수도자는 수사, 수녀님으로 부른다.

  대) 카톨릭에서 수사라고 하면 고립된 환경에서 종신하는 목회자를 지칭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홍) 그것은 관상 수사라고 한다. 꽃동네 같은 곳에서 봉사하는, 수사라 함은 활동 수사라고 말한다.  장래 사회복지를 위해 노력하며 혼자 살면서 봉사하는 자들을 수사라고 부른다.  꽃동네에 '형제자매회'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 속해 수련과 봉사를 배우며 행동하는 사람들을 꽃 동네서는 수사라고 부른다.

  대) 정신요양원에 입주한 사람들의 명세를 소상히 말해 달라.
  홍) 당시 정신요양원에는 정확하게 523명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신경정신질환자가 약 40%,  알콜리즘환자가 약 20% 나머지는 자폐증, 몽고리즘환자, 정박 아동 등이다.  

  대) 그렇게 많은 인원을 몇 명이 관리를 했는가?
  홍) 많을 때는 4명 정도였고 심지어 어떤 때는 혼자서 120여명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 많은 환자들을 나 혼자서 관리했다는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그것이 꽃동네의 현실이었다.

  대) 전문 치료사나 간호사도 있었을 것 아닌가?
  홍) (홍원기 님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후유~ 그 정도의 인력이 투입되었으면 얼마나 다행이었겠나.  불행하게도 전문 치료사는 없었으며 간호사도 없었다.  그리고, 경악할 일은 환자들에게 놓아 주는 정맥 주사도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대) 이야기를 앞으로 다시 조금 되돌려 보자.  정신요양원의 2층에 살고 있던 가족들이 복숭아 농장 작업에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해 달라.
  홍) 꽃동네에서 관리하는 농장이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복숭아 농장이다.  그 넓은 곳을 가족 15명 정도가 담당하여 일하고 있었다. 작업량에 반발하는 가족들을 담배 몇 개비로 회유, 협박하기도 했으며 술을 반입하여 마시게 하도록 했다.

  대) 복숭아 농장에 일하러 나가는 가족들이란 결국 환자들 아닌가?
  홍) 그렇다. 정신요양원의 환자 구성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바로 그들에게  작업 중 술을 지급한 것이다. 나도 관리 차원에서 그들을 인솔하여 복숭아 농장 작업에 몇 번 갔었다.  그때도 술이 반입되고 자원봉사로 나온 군인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 일이 있었다. 어느 한 군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것도 이해가 어렵거니와 술까지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 밖이지 않는가? 이 환자들에겐 술이 바로 독이지 않는가?'하는 지적을 받았다. 나는 그때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곧 바로 꽃동네 측에 항의를 하며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때부터 꽃동네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실태 조사를 했으며 개선을 수시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 그 외에도 강제 노역에 동원된 가족들이 있는가?
  홍) 6층의 가족들은 막노동에 동원되었다. 92년 여름에 꽃동네에서 <천사의집·사랑의 연수원>을 짓는 공사를 하였고 여기에 6층의 가족들이 벽돌 옮기기·모래를 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등의 막노동에 동원되었다. 대외 명분은 재활치료였다. 그들 역시 복숭아농장 노역자와 마찬가지로 담배, 술 등으로 회유와 협박을 했다.

  대) 6층의 가족이라면 그들도 정상인은 아니지 않는가?
  홍) 그렇다. 앞에서 밝혔지만 대부분이 정신질환자, 알콜중독자, 신경질환자  등이다.

  대) 그렇다면 가족들에게 따로 급여 지급이나 통장에 임금을 입금했는가? 일반인들도 힘들어 하는 작업을 환자들이 했다면 그에 맞는 지급액은 있었을 것 아닌가?
  홍) 꽃동네에서 지급된 임금은 전혀 없었다. 한 시간에 담배 두어 개비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꽃동네의 일과를 잠시 이야기하고 취재를 이어 가야겠다.   꽃동네에서의 하루는 아침 6시 기상, 7시에 식사, 8시 30분부터 작업을 나가면 오후 6시에 정신요양원으로 들어 온다. 복숭아 농장 작업에 나간 가족들은 오후 9시 경에 들어 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대) 가족들의 반항이나 불만이 있을 법 한데….
  홍) 그런 불만이나 반항을 직접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개선이 안되기에 포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어떤 가족은 일이 힘들다며 낫으로 자신의 손목을 자해하는 일도 있었으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봉사자들의 폭행으로 인하여 숨진 가족도 있었다고 했다. 이런 일은 당시의 사실 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런 일로 반신불구가 된 사람을 만나 보기도 했다. 낫으로 손목 자해한 사람도 알고 있다. 그때 작업을 담당했던 형제님은 이 일로 인하여 괴산 목장으로 보내졌었다.

(비보도 조건으로 자해한 사람의 신상과 현재 그가 있는 곳을 녹취함)

  대)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다. 사회복지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꽃동네에서 그런 인사 사고나 인권 유린이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다.
  홍) 바로 지금 그런 생각이 꽃동네의 문제를 고쳐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동네의 실속을 들여다 보면 어이없는 인권 유린이 방치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신요양원은 정신질환자나 그와 유사한 병을 앓는 사람들이 들어 와서 치료와 간병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꽃동네를 자주 방문한 사람들은 본동 건물 앞의 양지바른 곳에서 뜨개질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김산영이란 이름의 이 할아버지는 맹인이다. 그 분은 주위에 사람이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루는 오웅진 신부님이 그 할아버지 곁을 가자, 할아버지는 예의 습관대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일로 인해 할아버지는 정신요양원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꽃동네 측에 반대되는 말이나 행동, 특히 오 신부님에게 그런 행언을 하는 경우 가족들 중 일부는 이런 식으로 정신요양원으로 귀양  보내어져 정신질환자 등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정신요양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가족들을 다른 격리 집단으로 옮기는 일도 있었다.  그 곳의 가족들은 이런 일을 두고서 귀양이라고 표현한다.

  대) 지금까지의 이야기들만 해도 엄청난 충격인데 그보다 더한 격리 시설이 있었다는 건가?
  홍) 그렇다.

  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홍) 밖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꽃동네의 격리 시설이 있었다.  한태골·가금목장 등이 그것인데 93년도에 나와 모 신문사의 기자가 야간 잠행을 하여 취재한 것이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

  대)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기분이다.  님의 말이 사실인지 자꾸 의문이 간다.
  홍) 바로 그런 점이 꽃동네를 폐쇄집단으로 가게 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은 꽃동네를 믿고 있다.  또한 언론에 보도된 오웅진 신부님의 선행을 신앙처럼 받아 들이고 있다.  그래서 꽃동네는 아직까지 개선되어야 부분들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민들의 성금이나 회비 등이 많은 시설 투자에 쓰였을 것이며 꽃동네 운영에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국민 모두가  꽃동네의 바른 점만 보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언론 등의 매개체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동요치 않게 하려고 쉬쉬 거렸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설마 그럴리가…'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 설마가 사실인 것을 자주 목격한다.  꽃동네의 문제점이 바로 그 설마가 사실인 것임을 다시 한 번 토로한다.

  대) 언론사가 쉬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홍) 93년도 꽃동네에서 쫓겨나면서 언론사 등에 제보를 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이 취재했고 다녀 갔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왜 보도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꽃동네의 벽이 너무 두텁다.'
  심지어는  중앙일간지인 J일보사에서 자료를 요구했고 응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꽃동네의 문제 자료가 있으면 보내 달라고 했다.  나는 자료 중 일부를 그들에게 보냈다.  꽃동네에서 일하는 수사나 봉사자 중 문제 제보와 증거를 나에게 제공하는 인명부도 있었는데 J일보사에 그 자료를 보낸 후 며칠 뒤에 그들이 쫓겨나거나 자의적으로 꽃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나는 J일보사에 항의하며 그 자료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J일보사는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증거 수집을 위해 몇 년을 소비했고 이제는 제도 언론권보다 네티즌들에게 호소하려 한 것이다.

대) 다음으로 넘어가자. 제보 글에 보면 강제된 장기 기증 등이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 오웅진 신부님은 EBS 방송국 프로그램인 '세상보기'에 나와 꽃동네의 장기 기증 등이 96%라고 말했다.  그것이 강요되었다고 보는가?
  홍) 먼저 93년도로 돌아가 보자. 당시 꽃동네 측은 발표하기를 가족들의 장기, 신체 기증 등의 서약이 약 93%라고 했으며 안구 기증은 약 60%라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한 추리를 해 보자.
  저능아, 정신박약자, 알콜 중독자, 정신질환자, 치매환자 등이 대부분인 꽃동네서 가족들 중 자의적인 판단을 할 만한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될 것인 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당시 가족들 중 약 70%가 그 뜻조차 몰랐다. 기증 서약서의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강요되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장을 찍었다.

  대) 어이가 없다.  장기나 신체 안구 같은 것은 기증을 할 때 본인이나  기증하고자는 당사자의 친권자 등이 법적으로 확실할 때 가능한 것 아닌가?
  홍) 가족들 대부분이 친권자 확보가 어려운 상태다. 그러니 가족들 의사 표현이 중요한 것인데 그것이 무시되었다.  서약서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었다. 오웅진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 있는 강론 시간에 할당량을 지정해 주었고 그것을 독촉하기도 했다.  "꽃동네 내의 다른 시설에 있는 가족들은 90%에 가까운 서약을 했는데 정신요양원의 가족들은 왜 이리 성과가 없느냐. 형제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 아니냐. 그래서야 어디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말도 했다.

  대) 미사란 하느님의 업을 기리기 위한 것이고 강론은 하느님의 복음을 대신 설명하고 계도하는 말씀 전달이어야 하는데?
  홍) 후유~ 이야기한 장기, 신체 등의 기증이 꽃동네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에 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사 강론 시간에 꽃동네와 같은 곳을 국내에 15곳을 더 설립하고 해외에도 5곳 이상을 설립하면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신부님을 보면서 나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되고 있는 이런 상태의 꽃동네 문제를 제대로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꽃동네가 무슨…자신이 일궈 낸 개인 업적으로만 생각하고 홍보하는 것을 볼 때 정말이지 안타까움만 들었다.

   (미사 강론 내용과 오웅진 신부의 이야기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취재를 요구하자,  “비보도를 원칙으로 녹취하라”는 건의를 받아 들였고, 그때서야 홍원기 님은 많은 부분을 이야기했다)

  홍) 심신요양원에는 고장난 재활 기구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전문 재활 치료사마저 한명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재활기구를  우선하여 채워 놓고 전문 재활 치료사를 구성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책임자 수녀님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수녀님이 하는 말이 '이 곳에 있는  가족들은 재활 치료해 보았자 나아질 가망이 없으니  그런 것이 필요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대) 정신요양원 말고는 다른 곳에 근무한 일은 없었나?
  홍) 내가 많은 항의를 하자,  꽃동네서는 다른 근무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병원 건물 4층에 있는 정신병동에 옮겨 가게 되었는데, 거기로 가게 된 동기는 가족들 16명의 화상 사망 사고 때문이었다.

  대) 사망 사건이라니? 자세히 말해 달라.
  홍) 93년도에 꽃동네서 16명이 사망하게 된 화상 사건이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단편적인 토막 기사로 처리되었으나 그 실상은 너무도 어이 없다.

홍) 93년도 초봄이었다. 가족들을 목욕시키기 위해 한 봉사자가 큰 프라스틱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두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가족들 18명이 그 옆에서 목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뜨거운 물이 통에 가득 차면서 터졌다.  그래서 가족들은 무작정으로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가족들이 앉아 있는 상태로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그냥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게 대체 말이 되는 건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동네 측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안전관리에 대해서도 소양 교육이나 관리 교육을 주지시키지 않았으며 그것을 지적하면 무성의하게 듣고 관심도 주지 않았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대) 화상을 입은 가족들의 처리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홍) 먼저 병원의 건물 구조부터 이야기 해야겠다.
  1층은 세탁실, 2층은 부속실, 3층은 진료소, 4층은 내가 근무했던 정신병동, 5층은 결핵병동, 6층은 일반병동으로 구조되어 있다.
  화상을 입은 가족들은 5층의 결핵병동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화상은 2차 감염에 주의해야 하는데 어떻게  결핵환자들이 있는 병동으로 옮겨져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 정신병동에 근무하면서 5층의 결핵병동에 화상 환자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홍) 5층으로 '죽'이 배달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5층은 죽을 먹는 가족들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많이 아픈 것인가 생각하고는 5층으로 올라 가 보았다.  그랬더니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거기에 화상 환자들이 격리되어 치료 중이었다.
  화상 환자들이 어떻게 결핵환자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가. 상식 밖의 일이 아닌가.
  결국 꽃동네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 저지른 행위라고 생각했다.   외부에 알려지면 꽃동네의 비난과 비판이 거세어질 것 아닌가. 그래서 외부의 큰 병원이나 일반병동에 수용하지 않고 출입이 금지된 결핵병동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상 환자 중 한 분은 바깥 병원에 옮겨졌었다.  그 분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 분만 바깥 병원으로 옮겨진 이유를 보면 꽃동네 측의  문제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대) 그 가족들이 사망했다고 했다.
  홍) 내가 있을 때 16명이 그 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내가 꽃동네에 많은 항의 후 쫓겨 난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나머지 2명도 사망하여 결국18명이 사망한 것이다.

  대) 오웅진 신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홍) 내가 화상 사건에 대해 강한 항의를 하자 오웅진 신부님과의 개인 면담이 이루어졌다.  새벽 1시 오 신부님의 요청으로 면담이 이루어졌고, 오 신부님은 개선을 약속했다.  애절한 사정과 많은 문제점의 개선을 굳게 약속했기에 기사화되지 않을 것을 서로가 확인했다. 그때 나는 이런 조건을 내 걸었다.  
  <사랑의 연수원>이 완공된 뒤 3년 이내에 개선을 다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오 신부님은 그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느낌을 받았다. 오 신부님은'나의 이러한 행언들'이 모두 정신병자가 한 말이라고 언론에 발표한 것이다. 나는 졸지에 꽃동네 때문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꽃동네에서 쫓겨 나오면서도 오 신부님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오 신부님을 이젠 믿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방송국에 나와서 장기, 신체 기증 등에 대해 약 96%가 자의적으로 서약서를 쓴 것처럼 발표하는 것을 보고서는 오 신부님은 꽃동네 의 인권 유린 개선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시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수시로 꽃동네를 방문하여 확인을 해보기도 했다.

(홍원기 님은 꽃동네의 문제에 대한 사실 증인들을 알고 있다고 했고 비보도 조건으로 녹음에 동의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실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이제 그가 왜 이런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아 보아야 했다)

  홍) 꽃동네의 문제로만 국한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나라 사회 복지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카톨릭의 문제도 아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어디 카톨릭에 국한해서 꽃동네를 만들었겠나.
  내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많은 사회 복지 시설 운영자들이 찾아 와서 꽃동네의 문제에 대해 토로하는 것을 상담하기도 했다. 그들이 '꽃동네가 이런 데 우리보고 무엇을 요구하는가?'라는 항의의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 후로도 여러 사회 복지 시설에 가서 자원 봉사를 하였다. <평화의집>에서는 세시간 만에 쫓겨났다. 같은 카톨릭 계통의 평화의 집에 꽃동네 측에서  신원을 알린 것이다.  결국 나는 꽃동네와 여러 복지 시설에서 <블랙 리스트>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고 사회 복지 시설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나의 꿈을 배울 기회가 사라졌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비단 꽃동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사회 복지 시설에 대한 뼈아픈 각성을 촉구하고 제대로 된 사회 복지를 향한 초석이 되고자 밖으로 들어낸 것이다.

  (약 3시간에 걸친 집중 취재를 마치고 홍원기 님의 현재 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의 지금 생활 상태야말로 이번 제보의 신빙성을 가늠할 수 있는데 중요한 열쇠 작용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떄문이다)

  대) 실례지만 결혼은?
  홍) 아직 안했다.

  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홍) 장항읍의 농협 건물 앞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  나를 알게 된 많은 읍민들이 먼 곳이라도 일부러 찾아 와서 구두를 맡기곤 한다.  그런 분들로 인해 수입은 적지 않은 편이다.

  대) 아까 집에 가보니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든 데 그들은 누구인가?
  홍)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다. 나는 젊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들은 고아원 같은 수용 시설에서 보호가 되지만 청소년들은 아직 그런 보호가 미흡한 실정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젊어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꽃동네에 들어 가기 전에도 여러 명의 청소년들을 키우고 있었다... 여의도의 북경반점, 목욕탕 때밀이, 구두닦이 등의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 그들을 키워 왔고 가장 큰 아이는 지금은 27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열심히 살고 있기도 하다. 꽃동네는 더욱 나은 복지 운영의 공부를 위해 자원한 것이다.
  지금 우리 집의 아이들은 4명이다. 나에게 맞는 인원이다. 더 많으니 관심을 다 주기 어려웠다. 소수이지만 제대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다. 아이들도 나의 이런 점을 알고 있다.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살고 있다.

  대) 결혼도 안했다면 식구들의 식사는 누가 해 주는가?
  홍) 내가 하고 있다.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어 주고 있다. 고등학생 중학생들이다 보니 가끔 마찰도 있다. 그럴 땐 도시락에 내가 하고픈 말을 적어 편지로 넣는다.  그러면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자신의 뜻을 되돌려 준다.

  (홍원기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생들과 또 다른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춤추러 간다고 했다. 그들은 기자도 함께 가길 원했고 취재꺼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혼쾌히 동행했다.  장항읍의 구 시장 내의 어느 건물 지하로 들어 갔다. 약 20여평의 지하는 바닥에 춤을 추기 쉽도록 만들었고 벽면은 큰 거울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홍) 아이들이 원하는 공간을 주고 싶었다. 여긴 장항읍의 춤추고 싶은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cold라는 힙합 팀 명을 가지고 있는데  작년에 청주에서 열린  힙합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는 등 자신들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대) 마지막으로 꽃동네 측이나 네티즌 등에게 하고 싶은 말은?
  홍) 오 신부님에게 초발심으로 새로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처음 꽃동네를 이루실 때의 그 마음으로 개선을 시작하면 더욱 좋은 꽃동네가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거대한 복지시설보다  소공동체가  더 유익하고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

  나는 오웅진 신부님과 꽃동네 관계자 그리고 사회복지과 교수님 등에게 요구한다.  공개적인 장소,  언론 매체나 방송국 같은 곳에서 삼자 대담을 바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웅진 신부님께 해야 할 말이 있다. 오웅진 신부님은 나와의 약속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연 그 약속대로 살고 계시냐고 말이다.

  네티즌들의 힘이 이토록 큰 줄을 몰랐었다. 이번 일로 처음 컴퓨터를 대하게 되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네티즌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고 여러분들의 뛰어난 능력을 배우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고 계신 분들 중 꽃동네를 가시면  그 곳의 가족들 앞에서 불쌍하다고 혀를 "쯔쯔" 차시는 분들이 없기를 부탁드린다. 그런 모습들은 그 곳의 가족들에겐 심리적으로 부담을 주게 된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낀다는 가족들도 있다.  

  그리고, 꽃동네 문제를 그 곳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말고 우리 나라의 사회 복지의 현주소로 생각하고 더 나은 복지를 위해 네티즌 여러분들의 능력을 펼쳐 주시길 바란다.

  미진한 내가 여러분들에게 혹시나 마음의 상처를 드리지는 않은 지 죄송할 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꽃동네는 지금 거대한 집단이 되어 있다. 그 곳의 인권 유린 사실들을 제대로 밝혀 내려면 네티즌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혼자서 상대하기엔 실제로 그 곳은 두텁다.

[홍원기 님의 살아 온 길 잠시 들춰보기

    꽃동네 측에서는 홍원기 님을 정신병자로 자꾸 몰아 세운다고 님은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살아 온 길을 들추어 보면서 몇 가지 주지해야 할 사항이 있기에 그것을 말미에 붙여 본다.

  1996년 MBC 방송국에서 "24시간 가출 청소년을 찾아 줍시다"라는 프로에서 홍원기 님은 청소년 문제에 대한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테마로 방영되었다.
  1996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기획한 '가출 청소년 문제'에도 홍원기 님은 이 시대의 청소년 문제를 직접 겪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소개가 되었다.
  1996년 10월 초  서울시민의 날 행사에서 홍원기 님은 "올해의 서울 시민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조순 시장)
  1996년 10월 초  영등포 구청장으로부터  "용감한 구민상"을 수상했다.
  1999년 10월 4일  충남 서천군수로부터 지역 사회발전의 표창장을 수상했다.


취재 도중 홍원기 님에 대해 지역민의 평은 어떤 지 알아보려고 하던 중 님이 기고한 글이 실린 지역 언론사인 <뉴스서천>이라는 신문을 보고 그 곳의 편집국장에게 사람 평을 부탁했다.

    "홍원기씨는 주위 사람들을 보담아 안고 가려고 하는 분이다.  자신도 어려우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이웃이나 청소년 문제를 헌신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지역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고  그러면서 주위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분이시다.  참으로 사랑이 안으로 넘쳐 흐르는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 <뉴스서천> 편집국장   박노찬 ―


    홍원기 님의 연락처 : 0459) 956-****
    이메일 : hongwk33@
    꽃동네 홈페이지 :http://www.kkottongnae.or.kr/

  [대자보에서는 꽃동네 측에서 홍원기 님의 글에 대해 정식 반론문을 보내 주면 수정 없이 싣을 것이다]

    취재 후기 : 장항으로 가면서 내내 마음이 굳어 있었다. 제보가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를 바랬다.  어느 쪽이든 이 시대가 앓고 있는 모순의 중심에 서 있는 거 같았다.  내가 만나 본 홍원기 님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제보가 모두 진실인지 아닌지는 차후 꽃동네의 반론과 정부나 검찰 차원에서 조사가 되면 밝혀 지겠지만  나는 그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에 작금의 시대에서 외로운 투쟁을 몇 년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세상.  아마 대부분의 서민들도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기에 늘 가진 자, 힘있는 자에게서 외면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제는 정녕코 서민이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컴퓨터를 통한 쌍방향 대화에 나도 깊이 빠져 들었는 지도 모른다. 서민들의 목소리가 모여 질 수 있는 곳…  바로 우리가 타자를 치고 있는 바로 여기가 그 곳이리라.

   편집하면서 몇 가지의 이야기를 빼 놓은 것이 있다.  이것은 홍원기 님이 취재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편집할 것을 동의했기 때문이다.  본사 편집실도 때가 되면 나머지를 다 열어 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홍원기 님이 비보도를 요구한 것은 기사화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대자보 26호, 1999. 12. 8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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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1/29 [23:4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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