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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른 거부자’, 군사문화, 여성
내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
 
지오리포트   기사입력  2002/11/15 [00:02]
자기 양심에 따라 집총 및 입대를 거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을 둘러싼 논쟁이 여러 가지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군입대를 거부하는 이들을 흔히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양심에 따른 거부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유엔 인권헌장 제18조)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은 ‘병역을 거부하는 것(만)이 양심적이다’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이들을 ‘양심적 군입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심에 따른 거부자’ 논쟁에 크게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는 오태양 씨의 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IMAGE2_RIGHT}“'불살생'의 종교적 신념과 평화·봉사의 인생관에 대한 확신의 이유로 도저히 군사훈련과 집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전쟁행위에 대한 반대이며, 그런 확신에 따른 일체의 군사훈련 참여에 대한 거부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의 한 구성원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태양 씨는 일체의 군사훈련 참여를 거부한 것이지 병역의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태양 씨는 “군사훈련 대신 사회봉사로서 국가와 이웃의 안녕과 행복에 기여하고 싶었고, 그것을 제 삶에서 직접 실천해 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태양 씨는 병역거부자라기보다는 군사훈련 거부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태양 씨는 스스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말을 쓴다. 일체의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이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일컬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행 병역제도에서는 공익을 목적으로 하거나 방위산업육성 등을 목적으로 비군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군복무 인력을 활용하고 있다.

공익근무요원,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공중보건의 등 여러 분야에서 이들 대체복무 인력은 현역복무를 면제받는 대신 4내지 6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거친 후 대체로 현역복무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복무를 함으로써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하지만 ‘양심에 따른 거부자’는 일체의 군사훈련을 거부하기 때문에 병역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을 살고 있다.(양심적 행위자의 소식 www.coknews.org/ 참조)

정리를 해보면,
(1)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 혹은 병역특례제도에 따라 비군사분야에 복무하는 사람
(2)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의 의무’라는 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지만,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사람
(3)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일체의 군사훈련 거부 및 비군사적 분야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사적 목적에 이용될 우려가 있다면 그것도 거부하는 사람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2)번에 해당되는 사람일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 현행의 ‘대체복무제도’를 개선하여 개인의 양심에 따라 기초군사훈련을 받지 않더라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의사가 분명이 있다면 이에 합당한 사회봉사활동의 기회가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2)번과 (3)번의 구분은 애매모호하며, (2)번보다도 좀더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입장인 (3)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앞서 인용했던 오태양 씨의 글에서 언급된 ‘일체의 전쟁행위’를 어느 범위까지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터이다.

비록 비군사분야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쟁 목적에 기여할 수도 있다고 본다면(예를 들어 방위산업체 복무), ‘평화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는 이는 이런 비군사분야의 복무도 거부할 듯싶다.

또한 사회가 ‘일체의 전쟁 행위’를 전제로 해서 구성되고 조직된 것이라면, 그런 사회를,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할 듯하다. 이를 ‘적극적인 반전평화주의’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적극적인 반전평화주의’의 문제는 단지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시민의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 9월 26일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발표한 “이화인은 여성의 이름으로 반전평화 운동의 주체가 되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을 위해 가장 적극적인 실천을 벌여 나갈 것이다!”라는 성명서에서 언급했듯이, “반전평화의 신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군대가 양산하는 반인권적이고, 반여성적인 문화”에까지 문제 제기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성명서 발표와 기자 회견 이후, 이대 총학생회의 홈페이지에 가해진 사이버 ‘테러(terror)’는 그 자체만으로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런 테러 행위가 더욱 더 반전평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희 씨는 최근에 발표한 ‘군대와 여자(1)’(한겨레21 432호 논단)라는 글에서 “우리 사회의 일상에서 잠복해 있는 폭력적 구조는 군대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공고해진다. 징병제의 1차 피해자는 젊은 남자들이다. 하지만 일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피해를 안고 가는 쪽은 여자들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인식은 이대 총학생회가 사이버 테러 이후 밝힌 입장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 역시 성폭력, 기아 등에 노출되어 갖가지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한 남성은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한편 가해자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사회의 일상에서 잠복해 있는 폭력적 구조’는 단지 군대를 통해서만 재생산되고 공고해지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사문화가 폭넓게 퍼져 있는 사회 현실을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일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피해를 안고 가는’ 여성과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한편 가해자이기도 한 남성의 반성이 모아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군대와 여자’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군대와 남자’ ‘군대와 사회’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길 기대한다.


<내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  
  
최근 논의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지난 10월 31일 Znet에 발표된 ‘내가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반대하는 이유--어느 예비역 해병대원의 고백(Why I oppose the US War On Terror: An Ex Marine Speaks out)’를 소개한다. 이 글은 최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의 맥락 속에서 나온 글이지만 다른 한편 이 땅에서 논의되고 있는 ‘군대와 여성’ 그리고 군사문화의 속성을 따져보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IMAGE1_LEFT}부시 행정부의 테러에 대한 전쟁에 대한 분석적인 의견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놀랄 만한 한 가지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주제란 위선(hypocrisy)이다. 정부 부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라크 전쟁으로 신체적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으며 그들 가족 중에서도 위험에 빠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번의 ‘테러’ 공격이 있기까지는.

▲ 출처 www.durano.com/sl/    

나는 테러라는 말에 따옴표를 쳤다. 왜냐면 그 말의 규정은 주관적인 것이며, 내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테러’ 조직인 미국 정부 가운데 일부인 해병대(Marine Corps) 출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작전을 ‘테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작전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제사법재판소가 니카라과에서 우리의 과실을 발견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 판결을 무시했다.

우리가 고통을 준 국가가 비록 무척 나쁜 국가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행한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파나마에서 2500-4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전세계가 나서서 우리를 비난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반격할 힘도 없는 다른 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짜느라 너무나도 바빴다.

미국의 시민으로서, 퇴역 군인으로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우리 정부가 세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동기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 수백 수천 권의 책과 논문을 읽고 나서 정부가 자신들이 지켜내려고 한다는 자유에 대해 어떤 모욕을 가하고 있는지 깊이있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대개 개발도상국가에서 민주주의가 발흥하기 못하도록 애써왔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민주적' 가치를 이유로 내세워 ’세계의 경찰력‘으로 그 합법성을 주장해왔다.

그 위선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만약 누군가 암살대(라틴아메리카 군사정권 아래서 암약했다, 역주), 고문, 학살, 성폭행, 대량 살상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루되었는지 조사해본다면, 자유의 이름으로 개발도상국가의 권력 구조를 얼마나 자주 위협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사건은 지구를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에 견주어 보았을 때 아주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며 그래서 외견상 비난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 입대하고 난 뒤, 내가 무엇 때문에 정부를 믿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조작(manipulation)의 전문가들이었던 것이다.

군대는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 우리들을 완전히 해체하여 다시 조립함으로써 워싱턴과 미국 기업의 권력 엘리트이 지니고 있는 이상을 방어하는 기계로 만들어놓는다.

선거 운동에 돈을 대고 있고, 무기생산, 공학기술, 식량, 탄약, 석유, 의약품 등등 전쟁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회사들을 생각해보자. 제2차 세계대?이후 미국의 무력적인 간섭은 언제나 세계인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 곳으로 결집되어 있는 권력의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이 내정 불간섭과 자결권이라는 국제법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미국 정부가 테러리즘에 대한 연방수사국의 공식적인 정의(“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 정부와 시민 혹은 그 일부를 위협하거나 강요하는, 개인과 재산에 대한 무력 및 폭력의 불법적인 사용”)를 받아들인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피해자의 명단에는 다음과 같이 전세계가 포함될 것이다.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멕시코, 칠레, 그레나다, 콜롬비아, 볼리비아, 베네주엘라, 우루과이, 파라과이, 에콰도르, 자이레, 나미비아, 레바논, 이집트, 그리스, 키프로스, 방글라데시, 이란, 남아프리카, 필리핀, 한국, 베트남, 라오스, 이라크, 캄보디아, 리비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국, 아프가니스탄, 수단,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터키, 앙골라, 모잠비크, 소말리아.

해병대 신병 훈련소(boot camp)에서 명령에 따라 살인을 저지를 수 있도록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속임수와 조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 사회라면 거리에서 시민들을 데려다가 기관총을 주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람을 죽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도록 주입해야만 한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들 미국인의 집단적인 두뇌에는 경종이 울릴 것이다. 전쟁의 목적이 정당한 것이라면 굳이 우리가 훈련소를 거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살인 기술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좋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훈련소에서 전투 훈련에 훈련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가?

배경음악으로 메탈리카를 틀어놓은 채 미군의 학살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병사들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색 인종의 사람이 죽을 때 킬러 본능에서 나오는 기쁨의 절규를 부르짖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병사들이 모든 명령에 “예, 써”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영화에서처럼 “죽여라(kill)"이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군대의 주입식 교육은 적의 사기를 깨뜨리기 위해 병사들에게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병 훈련소의 훈련은 대부분 의지와 힘을 시험하는 갖가지 혼란스러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사람을 죽여야 할 때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약점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제거해버린다.

사기 진작을 위해 부르는 군가란 야만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어떤 동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성을 존경할 수도 있는 감성을 없애는 도구다.

예를 들어 이런 노랫말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 코카인을 던져라. 아이들이 모이는 걸 보아라. 너의 M60 탄띠에 탄환을 쟁여라. 저 꼬마 새끼들을 쓸어버려라.”("Throw some candy in the school yard, watch the children gather round. Load a belt in your M-60, mow them little bastards down!!")

이런 노랫말도 있다. “우리는 강간, 살인, 약탈, 방화를 하려네. 강간, 살인, 약탈, 방화를 하려네.("We’re gonna rape, kill, pillage and burn, gonna rape, kill, pillage and burn!!")


어떤 빗장이 있어서 군대가 그 남자 병사들이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잔한학 행위의 높이보다 높게 세울 수 있을까?

나는 ‘남자’라고 말했다. 왜냐면 이런 노래들은 여자들이 있을 때에는 거의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군가들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인다고들 한다. 그들은 그런 노래를 즐기며 군침을 흘리고 오르가즘을 느낀다. 이런 노래를 수백 번 반복해서 부르다 보면, 결국에는 그 노래가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쟁 상황에서 강간은 재래식 무기와 같은 하나의 무기다. “전쟁의 사상자들”(Casualties of War,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라는 영화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션 펜이 한 손에 총을 들고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무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야.” 그런 뒤에 다른 한 손으로 사타구니 사이를 부여잡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무기야.”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전투 부대가 한 베트남 여성을 납치해서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군대의 성폭행 정신 구조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군인들이 남자 병사들에게 민간인 특히 여성들을 존경하라고 ‘말하는’ 감성적인 부류라고 하더라도 군인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스며들어 있다. 그 메시지가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에는 여성에 대한 존경이라는 관념을 깡그리 없애버린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병 한 사람 한 사람 습관화하게 되는 킬러의 본성과 선천적인 감성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피로 먹고 자라도록 훈련된다. 이것이 전투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음탕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전쟁 기간에 일어나는 성폭행은 병사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갖가지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를 때,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전쟁의 극단적인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바라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만드는 정신 구조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전쟁터를 벗어났을 때에는 훈련 교본이 일러주는 것처럼 쉽게 살인자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다. 훈련 교본에서는 분명 군인들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군대의 주변 환경에는 섹스가 곳곳에 퍼져 있다. 함대 바깥으로 나갔을 때, 가학적인 형태의 입회식은 섹스나 육체적인 아픔 때로는 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런 일을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입회식에서는 종종 강제로 다른 사람의 생식기를 애무하도록 하거나 항문 삽입의 자세를 만들도록 하는 일도 있다.

이런 일들이 때로는 상관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며 그들도 동참하기도 한다.

1991년의 테일 후크(Tail hook) 추문은 적어도 1986년부터 시작된 어떤 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여성 해군 장교를 남성 장교들이 죽 서 있는 사이를 지나가게 하고 남성 장교들은 여성 장교의 엉덩이와 가슴을 붙잡았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키나와의 사건에서는 세 명의 병사들이 12살 먹은 소녀를 납치, 폭행, 강간하기로 사전에 공모하기도 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인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본성이 있는데, 군대는 이런 본성을 군대가 둔감하게 함으로써 군인을 거칠게 만들거나 ‘강경’하게 만든다.

상관들은 이런 행동을 격려함으로써 전투시에나 혹은 드문 경우이긴 해도 평화시에 이런 행동 파괴적인 행동으로 바뀐다고 이해하고 있다.

병사가 결백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적을 악마로 만드는 것은 전쟁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적을 악마라고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카타르에서 보안 훈련을 하기 전에 내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정신 교육’을 받았다.

이 정신 교육의 인종주의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슬람교도들을 ‘아메드(Ahmed)’ ‘타울헤드(towlheads)' '래그헤드(ragheads)’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은 대부분 동성애자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들의 위생이 너무나도 형편없기 때문에 악수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교육이 이루어졌던 목적은 어떤 명령이 내려졌을 때 방아쇠를 좀더 쉽게 당길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여성화(feminization)와 인간성 말살(dehumanization)을 통해 그들을 악마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카타르는 우리의 동맹국이다. 이제 그런 주입식 교육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봐라.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병사들에게는 그 국민에게 경멸을 보내도록 훈련시켜 놓고는, 그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라크 국민은 지난 11년 동안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잔학 행위에 의해 고통을 겪었다. 1991년에 10만 내지 20만 명의 이라크 국민이 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폭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제 봉쇄 정책으로 말미암아 전체 인구 1천7백 만 명 가운데서 약 1백 만 가량의 이라크 국민이 죽었다.

유엔특별위원회(UNSCOM) 집행위원이었던 이들은 1998년 이전에 이미 사담 후세인의 무기가 95내지 98%가 파괴되었으며 핵무기의 생산은 파괴된 경제로 인하여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자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사담이 이라크 국민을 장악한 정도나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북한보다도 훨씬 강력한 태도를 보여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북한과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면서 핵개발 계획을 모색하고 있다는 이라크를 침공하려 하고 있다.

1980년대에 미국이 사담에게 생물화학무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던 1994년의 의회 보고서를 잊었는가?

아마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면 이라크 국민보다 미국의 희생은 훨씬 적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미국 병사들이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될 위험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터에는 결코 갈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한테는 그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무진장 애쓴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 크리스 화이트는 예비역 해병대원으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디에고 가르시아, 캘리포니아의 펜들턴 캠프, 일본의 오키나와, 카타르의 도하 등에서 근무한 바 있다. 지금은 캔자스 대학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원문은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5&ItemID=2567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지구촌을 여는 인터넷 신문 지오리포트 http://georeport.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본 기사는 안찬수 기자가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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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1/15 [00: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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