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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4.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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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소아병적 정의감'에 대해
[궤변의 구조와 방식 ②] 정말 희귀한 인물 진중권식 사유구조
 
강준만
첫 페이지만 읽고 책을 던져 버린 진중권

"진중권이 진지하게 반성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그것을 호소한 강 교수는 아직 진중권을 모르는 것이구요) 소위 논객이라는 자가……『월간 인물과 사상』을……첫 페이지만 읽고 던져 버렸다니……에라! 이런 인간이 소위 논객이라니! 정말 대한민국의 사회주의자 수준 진보의 수준이 한심하다!"

어느 분께서 위와 같은 안내문과 함께 내가 『월간 인물과 사상』 7월호에 쓴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는 글에 대해 진중권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짧게 논평(?)한 글을 퍼다 <인물과 사상> 홈페이지에 소개해 주셨다. 덕분에 진중권의 글을 일찍 읽게 된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관련기사]
강준만,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단행본 <인물과 사상> 23호, 개마고원)
강준만,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 <인물과 사상>(7월호)
강준만, '서울시장 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물과 사상>(6월호)
진중권, [반론] 다시 ‘이문옥과 국민사기극’으로

{IMAGE1_LEFT}진중권은 내 글에 대해 반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긴 첫 페이지만 읽고 던져 버렸다니 반론도 할 수 없을 게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진중권은 6.13 지방선거 이전부터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강준만을 손보겠다"고 공언해 왔으며, 선거 기간 중에도 선거가 끝나면 나와 본격적인 논쟁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히지 않았던가? 이젠 선거가 끝났으니 선거용으로 썼던 글에 대해 책임지기는 어렵다는 걸까?

이상한 일인 동시에 유감이다. 왜? 한국의 언로(言路)엔 '힘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글쟁이들이 도무지 긴장을 하지 않고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누군가가 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더라도 무시해 버리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왜 반론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론을 하지 않는 게 대범하다고 칭찬을 받는다. 일일이 반론을 해주는 사람만 바보 된다. 그래서 수구 논객들은 마음놓고 글을 ꡐ개판ꡑ으로 쓴다. 이젠 '좌파 논객'이라는 진중권까지 그런 풍토에 오염된 것 같아 안타깝다. 진중권은 반론을 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고 말하겠지만, 과거 진중권의 비판을 받았던 수구 논객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진중권은 왜 반론을 하지 않겠다는 걸까? 혹 "스스로 '반칙'임을 자인하면서 수많은 반칙들을 너절하게 저질러 놓았더군요.……논리적으로는 이미 끝난 게임입니다. 그래서 '반칙'을 하겠다고 선언해야만 했겠지요"라는 진중권의 말에 답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진중권이 말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나는 진중권과의 대화를 위해 그걸 ꡐ디지털 논리ꡑ라고 완곡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논리 체계를 존중해 주어야 대화가 될 것 같아 진중권의 논리 체계에 수긍하지 않는 나의 주장은 진중권의 논리 체계로 보면 '반칙'으로 보일 것이라는 자상함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진중권은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해 펄펄 뛸 것이다. 그는 '이것은 논쟁이 아니다'고 주장할 것이다. '반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진중권의 논쟁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까 자신의 '게임의 룰'을 내게 강요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면 진중권이 말하는 논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메바 논리'다. '디지털 논리'라는 표현은 대화를 위한 과공(過恭)이었다. 왜 '아메바 논리'인가?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진중권은 어린 아이와 비슷하다. 아니 어린 아이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를 따지는 어린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예컨대, 진중권은 집요하게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려왔다. 물론 이문옥 선거운동을 위해 써먹을 카드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주장은 그러한 물음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이다. 사안별 질적 분석을 해야 하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뜻과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민주노동당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건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중권은 계속 떼를 쓴다. 무슨 경우를 막론하고 지방선거가 대선의 전초전인지 아닌지 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자 택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나의 답은 진중권에겐 '반칙'이 된다. 또 진중권이 실제로 이문옥 선거운동의 운동원으로 활약했던 텍스트 밖의 현실을 텍스트와 연계시키는 것도 진중권에겐 '반칙'이 된다. 그래서 내가 "중권아, 착하지. 그래 그래 좋은 나라도 있고 나쁜 나라도 있지. 근데 그 중간에 있는 나라들도 있단다"라고 달랜 게 아닌가. 그래도 중권이는 말을 안 듣고 손에 잡히는 걸 마구 던져대면서 이젠 나하고 안 놀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게 아닌가.

진중권의 상습적인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

자, 독자들께서는 지금 무얼 느끼는가? 내가 아직도 위와 같이 무언가 자꾸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걸 보고 내가 미련할 정도로 어리석고 답답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진중권과 성실한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나의 노력은 미련할 정도로 어리석고 답답한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새로운 인간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진중권에 대해 놀라움과 더불어 경이감까지 느끼고 있지만, 내가 진중권이 어떤 사람인지 그걸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알면서도 당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께서는 어떤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걸 알고 있을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처음부터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대접하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단은 선의의 대접을 해줄 것이다. 그 사기꾼이 점점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수준에 따라 이쪽의 대응 수준도 다르게 하면서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러서야 "야, 이 사기꾼아!"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진중권 비판도 마찬가지다. 내 글은 진중권의 언어적 폭력성이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강도가 높아져, 나는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는 글에선 진중권이 '궤변가'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나는 그 글에서 충분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 글은 그 글의 속편이다.

지금 내가 쓰는 '궤변가'라는 말은 흔히 말싸움을 하다가 상대편을 비하하기 위해 써먹곤 하는 일회성 용도의 것이 아니다. 나는 논쟁적인 글에 한하여 진중권이 갖고 있는 주된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더 큰일날 소리가 아닌가. 강준만은 매우 부당한 인신공격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그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물론이다. 나는 '책임' 빼놓으면 쓰러지는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것인가? 일단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보겠다. 이 글과 『인물과 사상 23』에 실린 진중권 관련 글 여러 편을 읽어 보시고 의견을 주시기 바란다. 나는 진중권이 그간 저지른 모든 궤변을 분석해 고교생 및 대학생들의 논리 공부용으로 이용될 수 있게끔 책으로 낼 생각이 있다. 다만 요즘 내가 한국 현대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데다 그 작업이 오래 갈 것 같아 단지 생각으로만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중권은 궤변가'라는 나의 판단으로 제시된 증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면, 나는 내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만사 제쳐놓고 그 일부터 하겠다.
  
지금 독자들은 나의 '자신만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진중권과 논쟁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놀라움은 더해 갔다. 진중권의 글은 시종일관 사실에 대한 교묘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누굴 지지하느냐 하는 정치적 판단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어떤 주장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진중권이 텍스트주의자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 역시 그를 텍스트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과공(過恭)이었다. 진중권을 텍스트주의자라고 부르는 건 진짜 텍스트주의자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진중권은 텍스트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법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으로 요리를 하고야 만다.

진중권은 왜 그러는 걸까? 이건 진중권의 인성(人性)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라 말을 아끼겠다. 진중권 자신이 한 말에 근거해 조심스럽게 살펴보자면, 진중권의 논객 행세는 장난, 놀이, 또는 오락 행위다. 진중권은 남을 약 올리고 골탕 먹이는 데에서 쾌감과 더불어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진중권은 남 약 올리고 골탕 먹이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워낙 천부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나는 그간 진중권의 그런 행위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몇 명의 네티즌들에게 개인적으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자기들이 볼 때에 진중권은 '매우 나쁜 X'인데, 왜 자꾸 내가 진중권을 칭찬하는 글을 써대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싶어 진중권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 진중권 자신을 위해 자제할 것을 요청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진 않았다. 왜? 이 글 자체가 좋은 답이 될 것이다.

"강간범의 글쓰기"

내가 진중권에 대해 뒤늦게 깨달은 것 하나는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이 바로 진중권이 상대편의 약을 올리는 의도적인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중권이 독설로만 약을 올릴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중권이 지난 1999년에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발언들을 하는 걸 지켜 보면서도 그게 바로 이런 뜻일 수도 있었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버나드 쇼가 살았던 시절처럼 독설을 그냥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해 그냥 가볍게 받아넘기는 분위기가 되어 있다고 믿었는데, 한국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joker가 장난을 치기에는 너무나 도덕적이고, 인격적이다.……사실 독일에 있을 때만 해도 그냥 웃고 즐기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좀 달라지더군요. 갑자기 화가 치밀 때가 있어요. 그래서 조만간 다시 외국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외국에서 편하게 즐기다가 한국에 와서 좀 놀아 주다가 다시 나가고, 뭐 이런 것이지요. 외국에 있으면 편하고 좋은데 심심할 때가 있거든요."

진중권은 자신을 독설가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중권은 독설가라기보다는 궤변가다.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은 독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건 일종의 사기 행위다. 진중권 자신이 만든 표현을 진중권에게 되돌려 주자면, 진중권의 글쓰기는 "강간범의 글쓰기"다. 이는 과거 변희재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강간범의 글쓰기"라는 게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관련기사]
변희재, [인터뷰] 상식적인 좌파, 진중권, 대자보 24호(99.11)
변희재, 진중권. 니 얼굴에 침을 뱉으마!, 대자보 9호(99.4)

내가 진중권의 그런 면모를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건 아니다. 진중권이 3년 전에 쓴 <강준만: 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의 지식인 혐오증?>이라는 글이 바로 "강간범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글을 진중권의 '의도'가 아니라 '실수'로 받아들이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기에 공개하는 것이지만, 나는 당시 진중권을 좀 아는 어느 신뢰할 만한 지식인에게 진중권이 그 글로 인한 논란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경악할 만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겁이 나서 부랴부랴 진중권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그를 격려하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 이 편지에 대해 진중권은 『월간 인물과 사상』 1999년 7월호에 쓴 <내 글쓰기는 텍스트 비판이다: 논쟁은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 교수께서는 그 글을 쓰신 후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내게 사신을 보내셨다. 욕 좀 해야겠다. 촌스럽게, 사람을 뭘로 보시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다. 강 교수께서 『조선일보』 및 다른 사이비들과 싸우는 그 자리에 비록 전공이 달라서 항상은 힘들겠지만 가능하면 자주, 적어도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그 옆에 있을 테니. 이건 신뢰하셔도 된다. 아, 그리고 내가 쓴 글에서 내가 강 교수께 찬사를 보냈을 때 나는 그 말로써 글자 그대로의 것을 의미했다. 이것도 신뢰하셔도 된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가 좀 푼수다. 정말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를 저지른 사람도 그 사람이 눈곱만큼이라도 미안해하는 기색만 보이면 금방 용서해 버리고 다 잊어버린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않고, 너무 쉽게 풀어져 버린다는 말이다. 너무 뒤끝이 없는 것도 탈이다.

"강준만을 손보겠다"

나는 진중권의 위와 같은 글에 감동(?) 먹고 진중권의 '강간범의 글쓰기'를 단순한 실수로 넘겨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내가 얼마나 진중권 칭찬에 열을 올렸는지 잘 아시잖는가. 진중권은 모든 게 글쓰기 방식과 관련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뿐 자신의 글은 정당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당시 진중권이 쓴 그 문제의 글의 한 대목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는 '서울대 망국론'을 썼다. 그런데 김대중은 우연히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둘째로 그는 전라도 지역차별을 비판했다. 그런데 우연히 김대중은 전라도 출신이다. 셋째, 그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을 비판했다. 그런데 TV를 보니 우연히 김대중이 다리를 전다. 여기서 난 우연히 우연성 이상을 본다. 그리고 내게 우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제기해야 할 문제를 정치적 의도로 제기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굳이 논평할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진중권은 이게 정당한 텍스트 비판이라고 주장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진중권은 지금도 계속 이런 식, 이런 수준의 비판을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와 같은 수준의 비판에 대해서조차 일일이 답을 해주는 순진하다 못해 미련한 성실성을 보여 온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최근에서야 진중권이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심리적 배경을 좀더 이해할 수 있었다. 진중권은 호남 차별주의자다. 나는 이미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진중권의 머리와 가슴 속엔 '호남 차별 바이러스'가 활개치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 글에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였으니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호남 차별 의식이 있는 사람에겐 김대중 지지는 무조건 광신적인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나는 이것도 『인물과 사상 23』에 쓴 <'DJ 광신도' 논쟁: '반(反)DJ 광신도'가 훨씬 더 무섭다>는 제목의 글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었다는 걸 밝혀 둔다.

위와 같은 주장을 정당한 텍스트 비판이었다고 우기는 사람을 따뜻하게 껴안고 칭찬하는 데에 열을 올린 나의 과오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다. 그런데 나의 과오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후에도 진중권은 여러 차례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나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제발 안티조선운동의 대의를 위해 참아 달라"는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로 진중권의 그런 '스토킹' 행위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금기시하는 건 물론 계속 진중권의 좋은 주장을 소개하면서 지지를 보내는 데에만 주력해왔다. 나에게 그런 만류를 했던 사람들 가운데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진중권은 나의 그런 착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준만을 손보겠다"는 전의를 불태워왔던 모양이다. 진중권이 시도한 게 노골적인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교묘'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진중권이 비판을 위해 내 주장을 소개하는 걸 볼 때마다 진중권이 심지어 '사악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걸 고백한다.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을 통해 자신의 가학적 충동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걸 논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중권은 논쟁을 한 적이 없다. 진중권이 나의 반론에 답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폭력적 궤변으로 일관할 망정 어느 정도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한 논쟁은 진중권의 '취향'이 아니다. 그런 글은 자신의 가학적 충동을 충족시키는 재미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반론을 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스토킹'만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진중권의 '스토킹'의 자유를 존중하겠다. 실컷 원없이 해보시기 바란다.

이제 진중권과의 '논쟁'은 진중권의 뜻에 의해 끝났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나는 진중권이 걸쳐 입은 '좌파', '진보'라는 외투에 대해 강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나는 진중권이 내세우는 '진보'가 '가짜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자면 아직은 나의 생각이 소수파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인물과 사상 22』에 쓴 <지식인의 '우상 파괴'와 '인정 투쟁'의 정치학: 이어령의 '영광'과 '고독'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권위주의적 진보'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는데, 그 소제목하의 글을 여기에 다시 싣도록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개념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가짜 진보'가 '진보 죽이기'를 할 수 있다는 나의 깊은 뜻을 좀더 많은 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권위주의적 진보'는 가능한가?

나에게 글을 보내 준 독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예컨대, 이런 경우를 가정해보자. 어느 진보적인 지식인이 있다. 그 지식인은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글과 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진보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인권을 존중하고 도덕을 강조하고 약자에 대한 애정을 듬뿍 보인다.

그런데 그 지식인은 사적 삶에선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그런 태도로 인해 그의 주변에선 온갖 종류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그가 공개적으로 떠드는 말과 글은 어차피 실제 삶과는 좀 동떨어진 것인 반면 그의 태도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인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념과 태도(이후 '행태'라고 부르자)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 오직 그의 이념에만 주목해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인가? 사실 이건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이미 지식인을 그런 잣대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인이거나 다른 사회적 공인을 그런 식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 그의 사적 삶에 접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ꡐ딜레마ꡑ라는 문제 의식만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한국 사회 일각의 '진보'에 대한 알레르기도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 태도(이념과 행태는 별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태에 대한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태도)의 총합이 미친 영향이 매우 크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대중 정권의 실망스러운 작태도 이념과 행태를 분리한 분리주의적 편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 정권은 이념에선 역대 정권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행태에선 그렇지 못했고 그게 민심 이반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제 진보는 행태까지 포함한 종합 게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적 삶에서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진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믿는 신념과 관련된 독선까지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열려 있는 논쟁'으로 얼마든지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사람의 독선이지 확고한 신념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내게 글을 보내 준 독자는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현실참여적인' 사람에게는 몇 퍼센트의 허영심이 들어 있는지, 또 나의 경우엔 어떤지, 하는 걸 물어 오셨다. 나는 이건 일종의 '언어 게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는 '허영심'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허영심'을 넓게 정의할 경우 이 세상의 존경받을 만한 공적(公的) 활동 가운데 허영심 아닌 게 무엇이 있을까? 유관순, 안중근, 이순신 등등 한국사에서 존경받은 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애국심은 허영심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그들의 애국심을 '인정 욕구'로 본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인정 욕구'는 허영심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허영심의 유무와 정도는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게 없다고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고 그게 있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언행의 옳고 그름과 지속성 및 일관성을 갖고 따지는 게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허영심을 포함하여 한 인간의 행태는 공사(公私) 영역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아직 그 경지에까지 이르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걸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수구적 논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수신제가'의 논리에 수구성이 숨어 있는 건 사실이나, 행태도 자기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음모'까지 껴안고 가자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사적 삶에서 민주적이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열려 있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진보'는 허깨비거나 신기루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나 자신에게 해보는 소리다.

'김대중 신드롬'과 '진중권 신드롬'

위와 같은 문제 의식에 비추어 볼 때에, 진중권은 좀 색다른 경우다. 나는 진중권이 사적 삶에서도 매우 착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위 글에서 말한 '사적 삶'은 진중권의 경우엔 그의 논쟁적 글쓰기 행태에 국한시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은 논쟁적 글쓰기를 할 때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바뀐다. 자신이 '진보', '좌파'의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은 『조선일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된다. 나는 적어도 『조선일보』 비판과 범개혁 진영 내부의 비판은 각기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적용시켜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셈인데, 진중권에겐 그런 구분이 없는 것이다.

나는 폭력적인 궤변으로 '진보'의 목표는 달성될 수 없으며 달성된다 한들 그건 '가짜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역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진중권과의 논쟁 방식보다는 내가 제3자적 입장에 서서 역설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에, 나는 진중권이 내 반론을 내팽개치는 '땡깡'을 부린 걸 반기는 점도 있다는 걸 밝혀 둔다.

그간 진중권과 논쟁을 하면서 내가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내가 평소 아주 괜찮은 지식인이라고 믿고 있던 분들마저 내게 진중권과 싸우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었다. 물론 다 좋은 뜻을 내걸고 하는 말이었지만, 그들이 이 논쟁을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개인들간의 감정 싸움 비슷하게 보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바로 이런 풍토가 그간 진중권의 폭력적인 궤변의 보호막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선 사실 나도 큰소리칠 입장은 못 된다. 나 역시 안티조선운동이라는 대의에 눈이 멀어 진중권이 저지르는 폭력적 궤변의 문제점을 그간 모른 척 해온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주변의 간곡한 만류 탓이 컸다. 나는 김대중 정권의 문제도 바로 이런 식의 대의를 앞세운 저질 패거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자기 성찰'의 차원에서 『인물과 사상 23』의 부제를 '김대중 신드롬'으로 붙여 이런 문제를 집중 탐구했다는 걸 밝혀 둔다. 여기선 그 정의만 소개하는 걸로 그치겠다.

나는 '김대중 신드롬'을 "자신이 외부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 왔고, 지금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잡은 뒤엔 일종의 특권 의식과 더불어 독선과 오만에 빠져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게 되는 병리적 현상"으로 정의하였다.

또 나는 '김대중 신드롬'의 새끼 신드롬으로 ꡐ진중권 신드롬ꡑ도 탐구하였는데, '진중권 신드롬'은 "자신이 소수파와 약자의 편을 든다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을 교묘한 궤변과 언어폭력으로 조롱하고 매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또 그런 생각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 병리적 현상"으로 정의하였다. '진중권 신드롬'을 좀더 일반화시켜 표현하자면, "합리적 대화와 논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입지적 우위로 모든 걸 밀어붙이려는 속성 또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이 시사하듯이, 앞으로 내가 진중권에 대해 쓰는 글은 논쟁용이 아니다. 나는 앞으론 진중권이 무슨 말을 하건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한꺼번에 모아 두었다가 진중권의 폭력적 궤변과 그것의 정치사회적 의미에 대한 탐구 작업으로 대신하겠다. 그간 내가 선의(善意)를 악의(惡意)로 보상받아 가면서 뒤통수를 맞을 만큼 맞은데다 진중권이 반론을 거부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나의 그런 변화를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는다.

진중권='이문열+조갑제+반경환'

진중권, 정말 희귀한 인물이다. 희귀성에 관한 한 현재로선 진중권이 1등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는 '이문열+조갑제+반경환'이다. 그 세 사람의 주된 특성을 혼자서 다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문열은 엄청난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조갑제는 집요한 집중력으로 한 가지 일에만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이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분별력조차 잃었다. 반경환은 술좌석에서도 감히 내뱉기 어려운 욕설을 인터넷은 물론 잡지와 책에서까지 공개적으로 해대는 엽기적인 치기(稚氣)를 갖고 있다. 진중권은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진중권이 궤변가라는 것도 알겠고 그런 세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왜 그렇게 진중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 이제 천천히 이 질문에 답해 보기로 하자. 우선 '궤변'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국어사전(삼성출판사의 『새 우리말 큰사전』)은 '궤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형식적으로 옳은 듯이 꾸미나, 본질이나 도리에 맞지 않는 구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이치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공교롭게 꾸며대는 말.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하는, 형식 따위를 갖춘 그럴싸한 거짓 추론."

그런데 진중권의 경우엔 이런 정의만으론 부족하다. 진중권은 글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좌파'니 '진보'니 하는 외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궤변은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인다. 게다가 진중권은 독일 유학을 포함한 학력의 후광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 나 역시 '천재' 운운하면서 거든 책임이 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는 '낭만주의자'라는 분께서 진중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보고서 그 후광 효과의 폐해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중권이 '고의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지나친 자기 도그마에 빠졌을 뿐이죠. 그가 사과를 안 하는 것도……독일 사람들이 '합리적 증거' 없으면 절대로 사과 안 하며 그것도 없으면서 사과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독일 문화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되, 이 독자도 진중권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진중권은 자기 도그마의 실천을 위해선 '고의적으로' 나쁜 일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이다. '낭만주의자'의 논법에 따르자면, 『조선일보』 사람들 가운데 '고의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 지나친 자기 도그마에 빠졌을 뿐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진중권의 경우엔 '고의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데 진중권이 그걸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놀이, 오락, 장난으로 쉽게 생각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진짜 골목대장을 하던 시절에 비추어 자신의 영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한국 사회의 '근엄성'을 탓하는 것이다.

진중권이 독일 문화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타당하다. 어린 아이는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면 그걸 곧장 써먹고 싶어 안달을 하는데, 진중권이 자주 동원하는 '파시즘' 담론이 바로 그 꼴이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인물과 사상 23』에 쓴 글에서 지적했지만, 다시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진중권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독일의 나치가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머리는 독일에 가 있다. 그래서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들으면 곧장 '나치식 어법'이라고 욕해댄다. 진중권이 한총련의 인성(人性)을 모욕하고 한총련을 파시스트 집단으로 매도하는 이유도 상당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중권식 궤변으론 한국의 웬만한 민족주의자를 파시스트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민주노동당도 안심해선 안 된다. 진중권이 어느 날 등을 돌리게 되면 파시스트 집단으로 급전 직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중권이 사과를 안 하는 건 독일 문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진중권은 악동(惡童)의 관점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진중권은 정말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다. 나이 차별? 아니다. 진중권은 나이 60이 넘어서도 대학생한테도 어린 아이 같다는 말을 들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린 아이 같다는 게 꼭 흉만은 아니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에게 순수하다는 뜻으로 극찬을 할 때에 그런 말 자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진중권의 경우엔 어린 아이 같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린 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어린 아이는 프라이버시 개념이 약하거나 없다. 진중권은 인터넷에 대고 아예 자신의 일기를 써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의 사적인 관계도 공개적으로 밝혀서 될 말이 있고 밝혀선 안 될 말이 있건만 진중권에겐 그런 구분조차 없다.

진중권은 외로운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어린 아이처럼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가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자신이 간밤에 잠을 잔 이야기에서부터 누구에게 술을 얻어먹었다거나 앞으로 누구를 어떻게 손볼 거라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걸 다 노출시키는 것도 바로 그런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진중권의 '골목대장 멘탈리티'

진중권은 골목대장 체질인가? 진중권의 지지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진중권 자신은 그런 '골목대장 멘탈리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중권이 『월간 인물과 사상』을 한 페이지만 읽고 던져 버렸다고 말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옛날에도 그랬듯이 강준만 씨가 많이 흥분하신 모양이군요. 지난번에 오버했을 때는 강준만 씨 이미지 구겨질까봐 그 똥물을 뒤집어쓰고서도 제가 외려 강준만 씨를 옹호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또 망가지셨는데, 이번엔 그냥 냅두지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아서 판단할 겁니다. 아마 이번에 강준만 씨한테 실망하는 사람들 많이 나올 것 같네요."

나는 진중권 자신이 '똥물'을 뒤집어썼다는 게 무슨 사건을 가리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 다만 진중권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묶어 두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만큼은 이해하겠다. 다음과 같은, 동네 골목의 한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너 약 오르지? 용용 죽겠지? 근데 이게 내가 저번에 봐줬는데도 엉겨? 이젠 너 안 봐줄 거야. 누가 너하고 노나 봐라. 너 쪼다라는 것 이제 다 소문났어. 애들아 가자. 앞으로 저 자식하고 절대 놀지마."

'똥물'은 정말 피하고 싶은 표현이지만, 의외로 이 말에 진중권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 주는 핵심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진중권의 '논객'으로서의 경쟁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진중권이 쓴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똥물'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미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과 '똥물'을 뒤집어쓰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행여 똥물 묻을까봐 싸움을 피할 것이 분명하다. 이게 바로 그간 진중권이 '논객'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똥물' 하나로 경쟁력을 과시하는 모습에 강한 문제 의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똥물' 묻을 각오하고 달려들면 '똥물' 뒤집어쓴 사람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각자 생각해보시라.

진중권의 '골목대장 멘탈리티'는 곧잘 '자기 도취'로 빠지곤 한다. 진중권이 이문옥 선거운동을 위해 자기 돈 300만 원을 쓰고 목에서 피까지 나올 정도로 헌신을 한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다. 나도 감동했으며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죄책감까지 느꼈다는 걸 고백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그런 헌신도 탁월한 글 솜씨를 통해 한 편의 멋진 드라마로 소개하는, 묘한 자기 PR 욕구 또는 자기 과시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자기 자랑을 하는 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진중권은 안티조선운동과 이문옥 선거운동 사이에 발생할 수밖에 없고 발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갈등에 대해서조차 "사이버 공간에서 온갖 상처를 받으며 몸을 망가뜨려야 하는 말의 검객" 운운하는 식의 신파조 자화자찬(自畵自讚)으로 대처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자들 사이에 적잖은 감동의 물결이 일게 만든 바 있다.

진중권의 논객 행세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에겐 '논쟁'도 자기 과시를 위한 일종의 전자 오락이다. '진보', '좌파'를 내세우는 건 그에게 '진보', '좌파'적 성향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과시에 더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좀더 재미있게 놀기 위한 장치로써의 의미를 갖고 있다.

너무도 진지하고 근엄한 이 세상에서 진중권과 같은 악동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악동이 '좌파'니 '진보'니 하는 외투를 걸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고, 그 결과 범개혁 진영 내부의 전혀 불필요한 갈등과 반목을 양산해내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IMAGE2_RIGHT}나 역시 과거 글을 쓰면서 진중권에 대한 칭찬을 아마도 수십 번 했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 다소나마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게 참 딜레마다. 비판은 쉬운데 칭찬은 정말 어렵다. <성공시대>인가 하는 TV 프로그램이 다룬 인물들 가운데 나중에 사고치는 사람이 나오자 이 프로그램이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호되게 비판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일 하면 좋은 사람 비판했다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일 했을 거라고 칭찬 받는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제 진중권 때문에 남 칭찬하기가 더욱 두려워진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사진 : 화덕헌씨 제공

진중권을 버려 놓는 저질 패거리주의

이 글의 주제를 "진중권의 '소아병적 정의감'에 대해"라고 잡은 것도 바로 진중권이 악동이라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나는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중권은 '소아병적 의인'이다. 모든 사람이 진중권을 알아 주고 떠받들어 주는 한 그는 우리 사회를 위해 의로운 일을 많이 할 사람이다. 나는 그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라. 기분만 잘 맞추어 주면 얼마나 착하고 좋은 일 많이 하나. 그러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큰일난다. 대책 없는 떼쓰기로 돌입한다. 손에 잡히는 건 뭐든지 다 집어던진다. 진중권도 다를 게 없다. 진중권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면 큰일난다. 그런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도 대상이 된다. 진중권이 어린 아이 같다는 건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천재형 인물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어린 아이처럼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다. 그들이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순수함에서 비롯된 비범한 집중력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천재형 인물들은 과학이나 미학 또는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고 사회에도 좋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공격적인 논객 행세를 하면 큰일난다. 그건 모두에게 좋지 않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순수하기는 한데, 아니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한번 자기 고집 피우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이 대한민국에서 '소아병적 의인'이 진보와 좌파의 깃발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박수까지 받을 수 있다는 건 대한민국의 지식계가 그만큼 허약하다는 하나의 반증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진중권에 대한 나의 문제 의식은 대한민국 지식계의 허약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 지식계 뿐이겠는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김대중과 그의 가신 그룹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들의 주변에 있던 지지자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왜? 무조건 '우리 편'이니까. 게다가 '우리 편'은 '개혁의 편'이 아닌가. 그 무슨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 편'이라는 패거리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에 늘 무시해도 괜찮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지금 진중권과 그의 지지자들이 바로 그 전철을 밟고 있다. 진중권이 무슨 일을 저지르건 그건 늘 무시해도 괜찮은 사소한 것으로만 간주된다. 왜? 진중권은 무조건 '우리 편'이니까. 게다가 '우리 편'은 '진보의 편'이 아닌가. 바로 이런 식의 저질 패거리주의가 한국의 개혁/진보 진영의 일각을 병들게 하는 암적 요소이지만, 이걸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에 대한 오해도 그래서 발생한다. 아직도 나와 진중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성격을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특히 진중권의 지지자들이 진중권처럼 너무 '정치'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민주당이니 민주노동당이니 그거 중요치 않다. 나는 주로 진중권의 말하는 방식을 문제삼았던 것이다. 그의 '독선과 오만'이 사소한 게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내가 앞서 말한 '저질 패거리주의'는 좋게 보자면, '행태'보다는 '정치'가 더 중요하다는 '정치주의'일 수도 있다. 그 '정치'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있기는 있지만, 실제적인 작동 방식은 보수 정당들의 '정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일부 민주노동당 사람들은 자기들이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진보'를 공적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는 폐쇄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는 건 무조건 '진보 죽이기'라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사회당에 대해선 민주당이 민주노동당을 대하는 식으로 대한다. 이런 문제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게 나의 주장인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당원들이 생활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 얻은 성과를 진중권과 같은 분들이 상당 부분 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진중권과 같은 분들의 '진보'는 대단히 '권위주의적 진보'라 '자기 편' 아닌 사람의 주장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편'의 그 어떤 스트레스 해소엔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손님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내쫓는 자해(自害) 행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된다.

한겨레마저 진중권의 놀이터인가?

진중권을 '악동'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권위주의적 태도가 면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진중권의 경우엔 권위주의적이라기보다는 '파시즘적'에 더 가깝다. 자신의 주장을 유일 진리로 내세우기 위해 그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기에 하는 말이다.

최근의 한 사례 연구로 진중권이 한겨레 6월 28일자에 기고한 <한나라당의 힘 자랑>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살펴보자. 이건 얼른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칼럼의 앞 부분에서 표현이야 어떻게 했건 대충 보아 맞는 말 아냐? 칼럼 제목을 보더라도 한나라당을 비판하기 위해 쓴 것 같은데 무슨 문제가 되겠어?" 그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진중권식 궤변의 힘이다. 진중권의 논쟁적 글은 늘 큰 명분을 내세우면서 작은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들을 끌고 다닌다. 진중권은 자신의 칼럼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그 모든 잔꾀에도 불구하고 6․13 지방선거는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길바닥 민심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결과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자, 노무현 후보와 김민석 후보가 '운명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던 어느 논객은 이제 노무현 씨도 낙선한 김민석 씨와 '공동'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방선거가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민주당에 표를 주자고 주장했던 어느 유명한 논객은 이제 "대선은 결정적으로 물건너갔다"고 외쳐야 할 것이다. 『한겨레』 지면에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것"이라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어느 목사님은 이제 국민들에게 "방공호를 파라"고 주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이 칼럼의 전반적인 논지는 6.13 지방선거 기간 중에 보인 진중권 자신의 주장과 행태를 정당화하기 위한 진중권 특유의 '자기 중심주의'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진중권이 그런 목적을 위해 위와 같이 세 사람을 조롱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 방식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중권이 언급한 첫 번째 논객은 인터넷신문 『대자보』 정치팀장 장신기다. 진중권의 논리가 타당한가? 장신기는 민주당 지지를 호소했다기보다는 정당 정치의 기본을 말하는 소극적 역할에 머물렀다. 나는 진중권이 행여 노무현을 지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장신기는 똑같은 논리로 진중권에게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게 정당 정치의 기본이라고 말하리라 믿는다. 진중권이여, 제발 노무현을 지지하지 말고 권영길을 지지해 달라. 그건 나의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중권은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 먼저 죽는다고 따라서 죽어야 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발상은 이문열 한 사람으로 족하다.

진중권이 언급한 두 번째 논객은 강준만이다. 이건 과장과 왜곡의 수준을 넘어선 거짓말이다. 나는 "지방선거가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민주당에 표를 주자고 주장"한 적이 없다. 진중권의 이 거짓말에 대해선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에서 자세히 지적했으므로 그 글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진중권이 언급한 세 번째 논객은 재미언론인 김민웅이다. 진중권의 김민웅 조롱 역시 과장과 왜곡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김민웅이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인가? 그렇다"라고 단언하면서 그 진술에 대한 제약 조건을 달지 않은 건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이 이 점을 지적했더라면 나도 기꺼이 수긍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그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진중권의 주장과는 달리, 김민웅은 『한겨레』 지면에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인용 부호 속의 말은 진중권 자신이 만든 말이다. 아마도 자신이 그렇게 해석했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김민웅의 글을 그런 식으로 단순화시키는 건 곤란하다.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게 그 말 아니냐는 식으로 비판을 하게 되면, 진중권은 자신이 결국 '한나라당의 2중대 소총수'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식의 비판에 대해 무어라고 답할 생각인가? 인용 부호로 독자를 오도하는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해선 안 된다.

바로 여기서도 진중권의 '소아병적 정의감'을 엿볼 수 있다. 어린 아이는 생각을 할 때에 상호 연계 능력이 매우 약하다. 김민웅이 누군가? 진중권 자신과 더불어 『조선일보』를 호되게 비판해온 국제정치 전문가 아닌가? 그간 김민웅은 대북 관계에 관한 글을 여러 권의 책 분량으로 많이 발표해온 이 분야의 대표적인 논객이다. 김민웅은 근시안적인 정략에 눈이 멀어 『조선일보』와 연계된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의 위험성을 과소 평가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계속 지적해왔으며, 이번에 쓴 글도 유권자들이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에 대한 분풀이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에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낳을까봐 "개혁적 진보 세력의 강력한 연합전선 구축"을 역설했던 것이다.

진중권이 대북 정책 문제에 대한 공부를 좀 한 다음에 김민웅의 평소 논지에 대해 차분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그러나 김민웅의 이런 충정을 진중권이 감히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것'이라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어느 목사님은 이제 국민들에게 ꡐ방공호를 파라ꡑ고 주문해야 할 것" 아니냐고 왜곡하고 조롱하는 건 곤란하다. 이젠 『한겨레』 지면까지 진중권의 놀이터로 전락해 범개혁 진영 내부의 '분열과 반목'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게 아닌가 싶어 착잡한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분별력 있는 성인이라면 감히 진중권식으로 김민웅을 조롱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뭐든 하나라도 자기 생각과 다르기만 하면 그 사람을 조롱하고 매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희귀한 기질을 갖고 있다. 하긴 진중권의 대북관은 어떤 점에선 거의 『월간조선』 수준인지라 이 점에선 진중권이 한나라당과 더 배짱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려면 '진보'의 외투는 벗어야 하는 게 아닐까?

'파시즘 못지 않게 가혹'한 진중권

『월간 말』 편집장이었던 최진섭은 진중권의 ꡒ반북 이데올로기는 공안검사 수준ꡓ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진중권의 대북관은 어떤 점에선 거의 『월간조선』 수준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다른 기회에 더 제시하겠지만, 이번엔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간사 안진걸이 『참여사회』 2002년 5월호에 쓴, 진중권의 한총련에 대한 살벌한 적개심 표출에 대한 반론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다음과 같다.

저는 진중권 님께서 벌이는 극우보수 세력과의 중단 없는 투쟁에 큰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조선일보』, 김용갑 류의 극우냉전 세력에 너무나 분개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스스로 진중권 님과 같은 '좌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중권 님과 제가 다른 점은 민족해방그룹, 주체사상, 한총련을 바라 보는 시각일 것입니다. 아니 자신과 다른 사상, 변혁적 전망과 경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현재 그들 중의 일부가 현실 사회운동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그에 대해 계속 지적해야겠지만, 진중권 님의 말 속에는 그들을 대화와 설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극우 세력과 함께 소멸, 정리해야 한다는 섬뜩함과 냉기가 서려 있습니다. 파시즘에 철저히 반대한다는 진중권 님께서 그들에게 퍼붓는 독설은 파시즘 못지 않게 가혹해 보입니다.

특히, 어린 한총련 대학생들이 학생들의 직접투표로 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바로 수배자가 되어 쫓기고, 감옥에서 부모의 임종마저 지켜 보지 못한 채 마녀사냥과 인권탄압의 사각지대에 갇혀 있는 비이성적 현실에도 진중권 님은 이들의 딱한 처지에 대해 최소한의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진중권 님께서도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한다고 판단하시겠지만, 바로 그 국가보안법 때문에 그리고 진중권 님이 그토록 조롱하는 극우공안 세력에 의해 한총련 학생들은 가장 처참하게 쫓기고, 지금까지 3000여 명이 구속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바로 진중권 님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과 진중권 님 특유의 냉기가 쫓기고 있는 한총련을 더욱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죠.

그들의 사상과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지적하십시오. 하지만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해온 그들에게 섬뜩한 독설과 극우 세력이 그들에게 보이는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적대는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다든지, 인성 구조가 왜곡되어 있다든지, 무식하다든지 등의 인격 모욕은 중단해 주세요. 진중권 님 비판의 질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지면의 한계로 제 진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점 유감입니다.


진중권은 '마이크로 파시스트'?

안진걸도 나처럼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하나마나 한 일을 했다. 진중권은 그 어떤 호소와 대화 제의에도 답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게 책임 의식이 있는가? 없다. 진중권은 파시스트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논쟁적 글쓰기 행태에 관한 한 '마이크로 파시스트'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안진걸의 지적대로 진중권이 '파시즘 못지 않게 가혹'한 짓을 자주 저지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최진섭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중권의 한총련에 대한 언어폭력은 "극우 파시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폭력과 유사하다."

비판의 기본 취지만 타당하면 그 어떤 극단적인 언어폭력과 기만을 저질러도 좋다고 생각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는 진중권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논객 대접을 받고 있는 거지? 그게 바로 내가 아까 말한 저질 패거리주의 덕분이다.

진중권은 패거리라는 방패 없이는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어떤 대의를 앞세워 자신의 둥지를 찾을 것이다. 처음엔 안티조선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민주노동당이었지만,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민주노동당은 진중권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진중권은 공식적인 성격의 조직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제3의 둥지로 노사모가 자신의 체질에 맞기는 한데, 강준만 같은 인간들이 자신에게 이번 대선에서 꼭 권영길 지지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바람에 둥지를 바꾸기도 어려운 일이라 요즘 진중권에겐 고민이 많다. 모든 게 여의치 않으면 제3의 둥지를 찾아 외국으로 떠날지도 모르겠다.

너무 심한 말 아니냐고? 그러는 강준만 너는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 내가 언제 진중권처럼 극단적인 언어폭력과 기만을 저지른 적이 있는가? 나는 오히려 너무 쉽게 내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를 자주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닌가. 지금 나는 진중권이 그런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논객 대접을 받는 현실의 이치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진중권과 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문옥 논쟁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진중권이 이번 대선에서 권영길을 위한 선거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정당 정치'의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한동안 노무현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비판이 터져 나오니까 진중권도 화들짝 놀라 다른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진중권의 속마음이 한때나마 노무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건 그 자신도 실토한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내가 진중권에게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상식'이 아니냐고 시비를 걸면서 욕한다고 가정해보시라.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짓인가? 그런데 진중권이 내게 이문옥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상식'이 아니냐고 시비를 걸면서 욕한 게 말이 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도대체 세상이 어찌 될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민주당이 계속 개판치면 다음 총선에선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할 생각이지만, 그 경우에도 정중하고 겸허한 호소를 할 생각이지 누구에겐가 왜 진보정당 지지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면서 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반성 없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이번엔 진중권의 '사회당 모욕'을 살펴볼까? 지난 6.13 지방선거 기간 중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원용수는 MBC 『100분 토론』에서 '사회주의자 선언'을 했다. 진중권은 그걸 '닭짓'이라고 조롱하고 매도했다. 일부 사회당 당원들이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진중권의 그런 행패를 말려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 저질 패거리주의 때문인지 민주노동당 당원들 사이에서조차 진중권에 대한 자제 호소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민주노동당 사람들의 진중권에 대한 끔찍한 애정이 말이다. 사회당 당원 최미라가 사회당 기관지 『사회당』 6월 24일자에 다음과 같이 쓴 걸 읽으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지난 19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이 '6.13 지방선거의 의미와 평가'를 주제로 공동 주최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사회당의 '사회주의자 선언'이 결과한 것은 무엇인지는 이 자리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선거에 독자적인 이름을 걸고 출마한 세력은 5명이나 되었지만 그저 이들은 모두 국민 10%의 지지를 얻은 뭉뚱그려진 '진보 진영'일 뿐이었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한국 사회,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던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가운데 연대를 모색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외쳐왔던 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ꡐ진보ꡑ라는 이름 아래 존재조차 지워진 사회당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에게 비록 의석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국고보조금을 받지는 못하지만 '반공에 찌들어 있는 한국 사회에 이념적 지평을 넓힌 의미 있는 일을 사회당이 해주었다"라는 격려의 말을 기대했던 것은 무리였을까?"

가슴 아픈 이야기다. 진중권처럼 '닭짓'이라고 욕한 사람이 없었던 걸로 만족해야 하는가? 그러나 안심하시라.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밝혀 둔다.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기자통신』의 편집국장 정구철도 6월호의 '머리말'인 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는 것에서 최미라가 작은 위안을 찾기를 바란다.

"공중파 방송 토론회에 사회당 후보가 초청되고 그의 '사회주의적 주장'을 듣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한 방송사의 '파격적 시도' 수준이지만 우리 언론이 '소수'와 '사회적 약자' 등 이른바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보여집니다.ꡓ

그렇다. '사회주의자 선언'을 '닭짓'으로 본 사람은 아마도 진중권뿐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진중권의 그런 언행에 동의하지 않는 진중권의 지지자들마저도 내가 앞서 말한 그 저질 패거리주의 때문에 "진중권은 무조건 옳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죽었다 깨나도 반성의 기회를 가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최미라의 말마따나, "'차이'가 '차별'이 되는 한국 사회,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에 진중권이 일조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엔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어서 나중에 두고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끝으로 진중권의 명언을 하나 감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왜 얼버무리는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적어도 우리만은 변명하지 말고 과오를 깨끗이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창피한 일 아니다. 그게 진보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8월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기사입력: 2002/07/25 [04:04]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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