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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공순이', 유신의 딸 박근혜에게 보낸 편지 화제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 박근혜 대표에게 공개 편지보내
 
손봉석   기사입력  2004/03/31 [18:46]

지금 정가에는 박근혜 효과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단아한 여성적 매력과 개혁의지로 탄핵안 가결로 바닥에 있던 한나라당 지지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     ©민주노동당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철권정치에 붕괴를 가져온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YH 노조''의 핵심인물인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당시 노조지부장)가 당시 박의 '영애' 박근혜 현 한나라당 대표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써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최 부대표는 "저는 53년 생입니다. 박근혜 님보다 한 살 어리지요. 우리 둘 다 벌써 반세기를 살았네요. 봄이 오는 산등성이에 서서 앞으로 맞이할 봄날이 지금껏 맞이했던 봄날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저 멀리 길가며 재잘대던 젊은 처자들이 얄밉게 느껴집니다"라는 부드러운 봄 인사로 글을 시작했다.

최 대표는 "제게도 봄처럼 싱그럽고 화사했던 시절이 있었다"며  30년 전 한 소녀의 '청춘의 봄'을 앗아간 한 독재자와 그 가족들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최 대표는 " 당시 저는 당신의 이름이 '영애'이고, 남동생의 이름이 '영식'인줄 알았습니다. 많이 배워 똑똑한 줄 알았던 TV 아나운서들이 전하는 '영애 양이 어쩌고, 영식 군이 어쩌고' 하는 뉴스 덕분"이라며 "당신의 이름이 박근혜이고, 영애(令愛)는 고귀한 집안의 따님한테 붙는 말로 '사랑스런 꽃'이라는 예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대통령 딸만 사랑스러울까. 꽃부리 영(英)이 들어있는 내 이름도 예쁜데, 사람들은 왜 나를 '순영'이 아닌 '공순이'라고 부를까"하고 의문을 품었었다고 밝혔다.  

최 부대표는 이어 "님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당신이 잘 꾸며진 청와대 뜨락에서 국내외 귀빈을 만나고 '영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안 당신과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하루종일 공장 먼지를 마셔야했다"고 지적하고  "당신 아버지가 철권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동안 우리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평생을 노동해야 했다"고 담담히 역사의 '원죄'를 말했다. 

최 부대표는 또,  "당신 아버지가 군대, 경찰, 관료, 재벌들과 함께 '5개년 경제계획'을 밀어붙이는 동안 내 아버지 또래의, 내 또래의, 그리고 내 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다"며  "당신 아버지의 집권 시절 이뤄진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작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 부대표는 "님의 지도력 밑에서 한나라당이 깨끗하고 건전한 정당으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제 직감일까요. 님을 대표로 뽑은 한나라당이 다급하게 대구·경북에만 국한된 확실한 지역주의 정당으로 전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라고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의 한계를 지적한 후 "또 하나의 '자민련'이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한나라당을 이끄는 님은 여전히 시대에 역행하며 지역에 기생하는 수구정당의 상징"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최 부대표는 "화창한 봄날, 제 젊음은 이제 찾을 길이 없지만, 드디어 우리 정치에서도 '영애'와 '영식'의 시대가 가고 '공순이'와 '공돌이'의 시대가 도래함을 목도하면서 30년 전에 흘렸던 제 젊음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라고 글을 맺었다. 

다음은 최순영 부대표의 편지전문이다.


박근혜 당대표께

오랜만에 뒷산에 갔었습니다. 개나리가 자태를 한껏 뽐내고, 진달래는 수줍은 듯 살짝 꽃잎을 내밀고 있었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과 들풀을 보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와 함께 일상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묵은 것은 가고 새 것은 오고야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우쳐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53년 생입니다. 박근혜 님보다 한 살 어리지요. 우리 둘 다 벌써 반세기를 살았네요. 봄이 오는 산등성이에 서서 앞으로 맞이할 봄날이 지금껏 맞이했던 봄날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저 멀리 길가며 재잘대던 젊은 처자들이 얄밉게 느껴졌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여인네의 시샘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봄을 맞는 님의 소회는 어떠신지요.  

제게도 봄처럼 싱그럽고 화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님의 아버지가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죠. 십대 후반, 돈 벌 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저는 'YH무역'이라는 가발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삶과 우리 사회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죠. 

그때 텔레비전에서 차분하고 이지적으로 생긴 당신의 얼굴을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당신의 이름이 '영애'이고, 남동생의 이름이 '영식'인줄 알았습니다. 많이 배워 똑똑한 줄 알았던 TV 아나운서들이 전하는 '영애 양이 어쩌고, 영식 군이 어쩌고' 하는 뉴스 덕분이었죠.

당신의 이름이 박근혜이고, 영애(令愛)는 고귀한 집안의 따님한테 붙는 말로 '사랑스런 꽃'이라는 예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대통령 딸만 사랑스러울까. 꽃부리 영(英)이 들어있는 내 이름도 예쁜데, 사람들은 왜 나를 '순영'이 아닌 '공순이'라고 부를까.

'영애 박근혜'와 '공순이 최순영'에 대한 고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재능과 능력만 있으면 잘 살 수 있고, 평등하게 대접받는다'는 기존의 믿음이 틀렸음을 깨닫는 작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봄이 오는 산하를 바라보면서 제 인생의 봄날을 돌아보았습니다. 노동과 땀, 웃음과 눈물, 추억과 회한으로 얼룩진 화사했던 제 젊은 날을 돌아보았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 여기저기 핀 개나리와 진달래만큼 싱그럽고 상큼했던 동료 공순이들의 이십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왠지 이유 모를 서러움이 몰려들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더군요.

△대통령 '영애'로서 버스차장들을 만나고 있는 박근혜 대표.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YH 여성노동자들.

님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당신이 잘 꾸며진 청와대 뜨락에서 국내외 귀빈을 만나고 '영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안 당신과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하루종일 공장 먼지를 마셔야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철권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동안 우리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평생을 노동해야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군대, 경찰, 관료, 재벌들과 함께 '5개년 경제계획'을 밀어붙이는 동안 내 아버지 또래의, 내 또래의, 그리고 내 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집권 시절 이뤄진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작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십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고, 이제 님과 저는 오십 줄에 들어섰습니다.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변해버린 우리들만큼이나 우리 사회 역시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가슴아픈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회에 유사이래 최대의 부를 가져다 준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상처가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당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분하고 이지적인 외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게 보기 좋았습니다. 하지만, 님께서 한나라당의 대표로 뽑히게 되었다는 소식은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이 나라의 특권지배층들이 지난 30년 동안 저질러온 일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사쿠데타당', '극우반공당', '정치범살인당', '민주화탄압당', '지역감정당', '민족분열당', '부정부패당', '수구기득권당', '광주학살당', '반노동자당', '반서민당', '재벌당', 그리고 '차떼기당'에 이르기까지 온갖 끔직한 이름표가 붙은 당이 바로 한나라당입니다. 그런 당의 대표로 선출되면서 당의 과거사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당신의 모습 앞에 저는 절망했습니다.

저는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표현에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청춘을 산업화에 바친 '산업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기업과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 저임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던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서, 남의 노동에 기생하지 않고 자기 노동력에 의지해 힘껏 일했던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신이 말하는 "경제발전의 주역이 박정희와 3공 세력"이라는 주장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한국 사회에 부를 가져다 준 산업화 세력, 경제발전의 진정한 주역은 님의 아버지나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기득권 층이 아니라, 당신들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참혹한 노동환경에서 묵묵히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했던 농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 믿고 사회복지제도 하나 변변치 않은 천민자본주의를 견뎌냈던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님의 지도력 밑에서 한나라당이 깨끗하고 건전한 정당으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제 직감일까요. 님을 대표로 뽑은 한나라당이 다급하게 대구·경북에만 국한된 확실한 지역주의 정당으로 전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 하나의 '자민련'이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한나라당을 이끄는 님은 여전히 시대에 역행하며 지역에 기생하는 수구정당의 상징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한 걸음 전진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곧 국회 앞 윤중로에 벚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4.15 총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 역시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고 쓰인 멋진 깃발을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국회로 입성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의 과제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룩한 진짜 주역이지만,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배척받아온 일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게 될 것입니다.

50년 보수정치가 지배하던 동토와 불임의 땅 여의도에 이제 봄과 생명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옛 것을 울려보내고 새 것을 맞아들일 때가 드디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제 젊음은 이제 찾을 길이 없지만, 드디어 우리 정치에서도 '영애'와 '영식'의 시대가 가고 '공순이'와 '공돌이'의 시대가 도래함을 목도하면서 30년 전에 흘렸던 제 젊음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부대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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