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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페미니즘-그 페미니즘`논쟁에 부쳐
그것은 바로 여성쇼비니즘의 슬픈 여성해방운동이다ba.info/css.html
 
변현단   기사입력  2002/06/12 [03:37]
지자제 선거일도 며칠 남지 않았다. 골목골목마다 지켜선 선거운동원 아줌마들이 후보의 이름을 연호한다. 가정집에도 하루 몇 통씩 후보선전 전화를 하는 이들도 선거운동원 아줌마들이다. 유세 때 가보면 아줌마 부대들이 각 후보 진영에서 열지어 있다.

{IMAGE1_LEFT}자원봉사자들이 몇 명이나 될까. 일용 용역에 나가는 아줌마들도 선거철만 되면 의례이 이곳으로 몰린다. 일이 수월하다. 한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나선 아줌마들이다. 누가 되든 정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는 생각으로 나선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예 선거란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길지도 모른다. 일당만 많이 주면 동네 아줌마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이런 아줌마들을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먹고 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어디 취직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런 때 대우받으며 돈을 좀 번다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을 경제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자녀교육이라도 시키려면 억척스런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

[관련기사]정문순, 박근혜 논쟁과 김규항의 페미니즘 비판에 대해, 대자보 86호  
[자료] 페미니즘, 그 논쟁의 경과

박근혜가 여성이니까 박근혜를 밀어주자라는 말은 이런 아줌마들의 심정일 것이다. 여성이 라고 제대로 능력의 평가도 받을 기회도 없이 밀려난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성 대통령이 나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면 여성대통령이 나왔으니 여성들이 대리만족으로 인해 어깨를 좀 펴고 살지 않을까 하는.

세상에 이해못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모든 일이란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에 대한 결과물이 어떠하든 이해할만하다.

최보은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글로 남겼다. 슬픈 얘기다. 그런 최보은이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여성 대통령을 한번 세워보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근본적 규명없이 내세운 이 엄청난 ‘정치적 투항`을 합리화할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숨막히도록 지독하다고 해서 남성을 대립물 또는 적대적으로 간주하고, 남성 따라잡기에 열을 올리고 여성공화국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여성억압의 시원을 보지못한 몰역사적 단견이다.

여성 차별화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사유제의 발생(계급의 발생)으로 모권이 전복되면서 시작되었다. 모권이 전복되었다면 모권회복운동(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사유제를 제거하는 데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노예제, 봉건제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가부장제를 부추기기 위해 ‘형제애`로 남성의 가치를 부각시키고 경쟁의 일상화를 끊임없이 추동해낸다.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여성이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여성이 근육을 단련하거나 악착스런 돈벌이꾼의 술수에 끼어들어가는 것은 슬픈 종류의 여성해방일 뿐이다. 남성적 여성해방을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근원적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 단선적이고 자위적인 모델일 뿐이다.  

성공한 여성들이 남성의 대열 속에서 절치부심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쟁의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이분법적이고 분절적인 사고의 연장선 상에서 ‘남성을 이기면 여성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대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배세력이 의도하는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여성 운동이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인간해방에 눈을 돌리자는 김규항의 말은 정확한 지적이다. 구박받던 며느리가 혹독한 시어머니가 되는 사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김규항이 자신을 사회주의자든 좌파라고 하든 중요한 것은 김규항이 말한 ‘그 페미니즘`은  남성을 대립으로 놓고 남성따라잡기 여성공화국을 원하는 남성적 여성해방을 말한 것이다.

미디어는 성공한 여성, 즉 경쟁 속에서 이긴 여성을 추켜세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온전이 유지되기 바라는 지배권력은 남성의 경쟁 속에서 성공한 여성을 부추겨 줌으로서 여성들이 계급적 관점에 물들까봐 겁내한다. 그러니 이러한 성공과 경쟁이라는 농간을 바로보지 못하고 덩달아 춤을 추는 여성운동가들이 여성의식에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그 여성들을 모델로 하며 남성적 여성해방에 먼저 눈을 돌리는 오류를 겪게 되는 것이다.

남성들이 형제애라는 말이 계급적 관점을 희석화시키는 남성 쇼비니즘이라고 한다면 이에 맞서서 여성들이 자매애라고 강조하는 것 또한 여성쇼비니즘이다. 김규항이 말하는 ‘주류 페미니즘`이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IMAGE2_RIGHT}최보은의 ‘ 마지막까지 쓰고 싶지 않았던 글`(시네 21)에서 두 번째 남편을 ’기층민중`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말이 어떤 의도인지 짐작이 가는 것을 눈감더라도 정치와 여성해방운동을 바라보는 것이 김규항이 우려한대로 탈계급적, 초계급적 정치 자유주의자임은 분명하다. 자신의 기층 민중인 남편으로부터 학대받은 것을 통해 ‘가부장제 좌파`에 신물이 난 것이고,  주변의 걸출한 여성들이 그녀의 신물난 체험에 자매애를 표시한 것을 예로 들면서 그는 좌파와 남성 모두 적대적 관계로 환치함으로서 ’여성대통령 박근혜`의 지지를 합리화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좌파 그러면 먼저 고개부터 돌려버리고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성폭력을 행했을 때는 가차없은 비난과 독설 그리고 사회적 매장이 난무한다. 사회주의자, 좌파에게는 윤리적 도덕성을 철저히 요구하면서 일반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관대하다. 그들이 성문제에 어떻게 대하였든 무슨 짓거리를 하든 무관심으로 일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좌파 하면 엄격한 도덕적 윤리적 순결성을 요구한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함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요구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바로 최보은식 남성적 여성 해방을 꿈꾸고 보수정치인들보다 더한 적대감을 표현함으로서 결국 보수정치에 동조하는 결과물을 낳게 된다.

이것이 김규항이 ‘그 페미니즘` 시작의 글에서 “원칙적으로 100인위에 지지한다”, “그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유는 ’사회의식`이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에서 출발하면서도 모든 건강한 사회의식이 갖는 인간해방운동의 보편성을 거스리기...“ 라고 언급한 이유일 것이다.

  김규항은 그 페미니즘, 즉 주류페미니즘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거친 말이라고 해서 김규항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부인될 수 없다.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라는 말을 한다.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다>라는 말은 계급모순이 사라지면 가부장제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해방의 길은 참으로 고난한 길이다. 따라서 억압의 이중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대로 보고 제대로 행동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중의 억압의 원인을 직시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테두리가 요구하는 것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인간해방, 여성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의 몫은 여성에게 주어진 고통을 피억압 남성들과 함께 <남매애>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형제애, 자매애가 아닌.

“ 가부장 좌파들을 솎아내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부르조아들을 솎아낼 때 비로소 숙명적인 긴장을 ‘숙명적 우애`로 바뀔 것이다. ”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중에서)
*필자는 김규항의 ‘부르조아`라는 말을 위에서 규정한 ’주류 페미니스트`로 환치하고 싶다.

* 일러스트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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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6/12 [03: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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