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성 언론의 착각과 모라토리움 인간
조중동이야말로 엄밀하고 공정한 신문검증을 받아야ba.info/css.html'><
 
배정원   기사입력  2002/05/06 [19:21]
요즘 인터넷 매체의 토론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체계있게 조목조목 따져 논리적으로 반론하는 양식있는 네티즌들도 존재하지만 아직도 의외로 많은 수의 네티즌들은 남의 논리나 입장을 제대로 보지않고 막무가내로 자기 주장만 하고 그것도 때로는 감정적으로 욕설이나 비속어를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이래가지고는 건전한 토론 문화가 형성되기가 힘들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자기가 최고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무도 주지않는 심판자격을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서 자기의 판단을 제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나름대로 자기의 기준을 세워놓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자기가 해석한 것이 곧 기준이요, 평준이라는 생각이다. 개인 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 매체도 매 한가지다.

이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예화에 나오는 올림픽 경기장의 관람만 하는 구경꾼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전적인 표현 방법으로, 논리성을 띠지 않고 다음과 같이 쉬운 예를 들어서 표현했다.

올림픽 경기장에 모여든 사람중에는 4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첫 번째로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이 있고, 두 번째로는 선수들을 응원하러 모여든 응원단이나 코치가 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니까 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장사꾼이 있고. 네 번째로는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고 올림픽에 가서 각국에서 모여든 선수들의 묘기를 아무 사심없이 그대로 구경하고 감상하는 관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네부류의 사람들을 각기 다른 인간 유형으로 분류 평가하였다. 우선 첫 번째 사람은 금메달의 노예가 되어서 불행한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자기편이 이기기를 바라는 주관적인 욕심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판단할 눈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하고, 세 번째 사람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에 미쳐서 행복하지 않고, 제일 행복한 사람은 아무 사심없이, 어느편이 이기느냐에 상관없이 이긴 편은 이긴 편대로 진편은 진 편대로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르고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네번째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대로, 제3자적인 객관적인 입장으로 과학적인 근거에서 시시비비를 가릴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얼른 듣기에는 완벽하고 그럴듯한 설명이다. 과연 그럴까? 한 번 생각해보자. 어떤 경우를 당해서라도 냉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앞에 부딪친 현실을 감상(?)할 사람이 있겠는가. 정신나간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느 편에도, 어느 당에도 휩쓸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과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존재하겠는가. 관념적으로나 가능하고 착각속에서나 있을법하기에 이는 실제로 허구이다.

{IMAGE1_LEFT}메이저 언론들도 자기네 신문이, 방송이 엄중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한다고 믿는다. 바로 이런 착각이 조동중이 억지논리로 특정후보를 검증하고 비판하게 하는 과오인 것이다. 4월 18일자 조선일보 사설 '엄밀하고 공정한 후보검증'에서 후보는 철처히 검증받아야 하고 소극적인 후보는 국민이 표로써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일보사 내에 후보 검증위원회를 둔다고 한다. 혹자는 누가 누구를 검증하고, 어떤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을 가지고,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반문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객관적으로 후보를 검증하는 일이 가능할 뿐더러 반드시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작품출처 : 최병수 화백 작품
        
조중동은 객관적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때로는 사회과학의 통계결과를 가지고 나와 '그러므로 이것은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미 나와있는 결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통계를 결과를 이용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계산상으로는 다 과학적으로 된 것으로 같지만 사실 과학적인 통계와 계산 속에는 과정에서 부터 벌써 편견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것도 실험이나 계산이나 측정을 통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사람이 남을 속이려면 으례히 과학적이란 말을 많이 내세운다. '내가 하는 말은 다 옳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이고 통계적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러면 대개의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통계적이니깐 사실일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 매체들도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통계적인 방법을 내세워서 그럴듯한 궤변을 내뱉는다. 신문사에서 하는 여론 조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회과학의 양심을 저버린 한국갤럽: [사회당 논평]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가증스런 여론조사'에서 사회당의 부대변인 서혜경씨의 성명 발표중 결론 부분을 인용한다. "조선일보의 여론조작은 늘 있어왔던 일이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사회조사 방법론의 기본도 지키지 않고 조선일보의 조작에 놀아난 한국갤럽의 들러리 행태는 심히 유감스럽다. 과학은 정치의 시녀가 아니지 않은가."  

조선일보는 구독자로 하여금 조선일보는 제 3자로서, 객관자의 입장에서, 방관자의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판가름하는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정론을 펼친다고 생각하게 하는 착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조선일보는 정치를 시궁창으로 묘사하고 매도하여 '반정치주의' 캠패인을 줄기차게 추진해와 한국 신문 독자들을 철저하게 탈정치화 하는데 성공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는 더러운 것으로 세뇌당하면서 노풍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편집하여 깊이있는 기사보다는 쉬운 문체로 시시콜콜한 생활정보 기사에 익숙하고 길들여졌다. 적어도 인터넷 매체가 활발하기전 까지 조선일보야 말로 국민을 정치우민화(政治愚民化) 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IMAGE2_RIGHT}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조동중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직접 참여하는 일없이 뒤로 물러 앉아 팔장을 끼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누군가 무엇을 하라고 해도 자기의 행동과 결단을 보류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방관자적인 입장에 앉아 있어야만 보다 지성적이라고 믿는 데에 있다. 행동하는 양심보다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이 되는 것을 이상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모리토리움 맨(Moratorium Man) 이라고 한다. 이들이 오늘의 사회의 구석구석에 뿌리박혀 사회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데 큰 촉진제 구실을 하고 있다. '모라토리움'이란 말은 경제용어로 '지불유예'라는 말이다. 쉬운 예로 IMF당시 한국이 갚아야 할 외채의 이자를 일시 보류받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모리토리움 맨이란 자기가 지불해야 하는 것을 보류하는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함부로 남을 평론하고 비판하는 일 자체가 현대인의 무서운 병이 되는 연유도 착각 때문이다. 착각속에서 무엇이든 제 3자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모라토리움 인간의 입장을 내세우는 현대인의 증세를 나자신도 어느듯 보이고 있지 않은지 한 번쯤은 뒤돌아 볼일이다.

* 필자는 현재 영국 웨일즈 난민협회에서 난민들의 직업훈련과 교육에 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5/06 [19:2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