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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발딛고 서서 끊임없이 '진보'하라
박태주 연구위원 글에 대한 반박, "또 다른 노동자가 바라보는 '노무현' 현상"://pic.geiqi
 
노항래   기사입력  2002/05/14 [11:51]
이 글은 <대자보>에 실린 박태주 연구위원의 글에 대한 개인적인 반박글이다. 나는 그를 잘 알지만(그는 내가 일하고 있는 공공연맹의 조합원이다), 그가 <대자보>에 주장 글을 실었으니 나도 같은 사이트에 투고한다. 나는 그의 글 말미에 언급된 '공개적으로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다가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는 당사자다. 내가 구설수에 오르내린 것은 틀림없지만 나는 조직내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지 않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동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내 주관이니까)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또는 내 생각에 동의하는 조합원들이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난해부터 노사모 회원이었다. 그래보았자 눈팅이 회원이고, 홈페이지에 떠있는 지침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그저 그런 회원이다. 다만 내가 구설수에 오른 것은 내가 민주노총의 한 조직의 실무일꾼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있는지라 그 조직에서 일하는 임원이나 실무일꾼 중 노무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이는 흔치 않다. 그래서 좀 튀는 내가 구설수에 오르내릴 뿐이다 (나는 이것을 내 개인의, 국민된 한 사람으로서 정치적 자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말>, <한겨레 21>, <진보정치>, <한겨레신문> 지면에 각각 한 번 씩 내 이름이 거명되었다. 사실 내 이름이 거명될 것으로 알고 인터뷰 비슷하게 기자와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진보정치> 하나 뿐이었는데, 한 기사가 또 다른 기사에 인용되기를 거듭했던 것 같다. 이런 기사들로 또 다른 다 기억도 못하는 언론들(전화주신 기자들께 죄송... 대학신문이나 원우회 신문 등이었다)로부터 전화도 적지 않게 받았다. 진짜냐는 것이었다. 나는 진짜로 노무현을 지지한다고 한게 전부였고, 희소가치가 내 이름을 지면에 까지 끌고 갔다.

박태주 위원이 쓴 <'진보'가 덫이 되는 시대에는 '진보'를 깨라 - 한 노동자가 바라보는 노무현 현상>이라는 글의 주요 대목에 대해 나는 지지한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이 틀렸다.

{IMAGE1_LEFT}우선 제목이 맘에 들지 않는다. 꼭 무슨 전향발표문을 대하는 듯 하다. 그는 왜 지금 우리 사회를 '진보가 덫이 되는 시대'라고 이해하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소위 '노풍'에 실린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 노무현 후보가 주창해왔고 그를 대선후보로 일으켜 세워온 지역주의 타파, 권위주의 배격, 남북화해의 지속, 사회통합정책의 강화 등의 비젼이 그냥 보수적인 틀 안의 주장일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왜 진보를 가로막는 '덫'인가. '마르크스의 먼지냄새 풍기는 그런 진보나 좌파적 현상'은 아니라는 것인데, 이런 고루한 인식이 그가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뗏목을 머리에 이고가는 어리석은 진보 인식'이 아닌가.

내가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노무현의 주장이 현실에서의 진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진보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가 이성을 접어둔 지역주의 행태, 희한한 설명이 곁들여지는 조선일보식 대북인식과 남북대결 선동, 사회 온갖 부문에 독처럼 퍼져있는 강자 이데올로기, 노동에 대한 폄하 등을 벗어나자는 주장을 공유하지 않는 진보가 있을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이 땅,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그도 주장한 것이지만, 무슨 이념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평화롭게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가는 것, 앞당겨 가는 것, 그것이 '진보'이지 않은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 평화적이고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진보일진대 왜 '진보'를 깨라 하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강고한 '진보를 향한 열망'이며,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힘의 조직화이고, 우리의 역량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한, 소위 '노풍'이 바로 그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학습효과를 말하는데, 정작 정권의 들보만 말하면서 내 눈의 티끌을 거두지 않는 노동운동계의 오도된 인식에 대해서 그는 왜 발언하지 않는지 나는 모르겠다. 김대중 정부의 실패, 민주개혁 과제의 동요, 퇴장시켜야 할 군사독재·개발독재·관치경제·권위주의의 악폐에 대한 끊임없는 타협이야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할 일이지만, 노동운동 역시 같은 시기동안 실패를 거듭해 왔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교의적 구호 아래 수많은 대중투쟁의 과제를 가두어놓고, 마침내는 '정권퇴진투쟁'을 내걸고 헛발질 하지 않았던가.

노동운동은 때로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일터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대중의 역량을 소진시키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에서 번번히 사회적으로 설득력있는 대안은 진지하게 모색되지 않았다.(물론 우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어서 가혹한 얘기다. 분배구조 악화, 고용구조 악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 확대, 상시화한 노정갈등 구조의 지속 등 현 정부 노동정책의 문제점 역시 함께 짚어져야 할 일이다.) 이런 우리 노동운동계의 과오 또는 한계를 짚고 그를 수정하는 것 역시 절실하며 그러할 때 노동운동은 '진보'를 일구는 대중적 기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권의 폭력적 노동운동 탄압은 '대중투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말한다. 아마 노무현 지지를 통한 그의 승리가 탄압을 극복하고 차기 정부를 '개혁세력의 포로'로 만드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나는 이런 주장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의 길은 어떻게 열어 가는가. 대중투쟁으로 열어 간다. 이것이 원칙이다. 교의가 아니라 노동조합으로 상징되는 노동운동의 기본단위가 그러하지 않은가. 존재의 정체성, 그 자체다. 동일한 이해관계 위에 있는 다수의 사람을 조직하고, 이 힘으로 지혜를 모아 정책을 만들고, 자기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집회도 하고, 파업도 하는 운동, 이것이 노동운동이 아닌가.

정작, 현실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그야말로 '과도한 정치성'이다. 노동조합의 대중적 토론, 민주적 결의 절차를 떠나서 특정 정당, 특정 후보 지지운동, 줄세우기에 나서는 것, 심지어 노동조합이라는 다수 조합원의 결집을 정치적 거래의 조건으로 삼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동조합의 원칙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고, 대중조직을 정치에 팔아먹는 '가롯유다의 거래'가 아닌가.
박태주 위원의 글을 잘못(?) 읽으면, 자칫 노동계에 대대적인 노무현 지지 성명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것은 노동운동 지도부의 '과도한 정치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노동운동의 향후 진로 역시 노무현 그의 구호처럼 우리 사회의 각 부문에서 '원칙과 상식'을 세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노동정책, 노동시장정책, 노동기본권 등 절박한 과제에 대해서 현실적인 문제, 진보의 과제를 자기정체성에 맞게 제기하는 것이다.

연봉 3,000∼4,000만원씩 받는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가난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 노동시간 단축 정부입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제화에 반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은 단체협약으로 하자며 결국은 대규모사업장 조직노동자들만의 성과물로 만들게 될 주장을 내놓는 것, 비정규노동자를 '현실 운운'하며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방치한 채 비정규노동자 보호입법투쟁은 유실시키고 정규직 노동자의 충격 완충지대로 삼는 것, 노동대중의 절박한 과제는 매년마다 되풀이되는 정치총파업의 소재로만 삼는 것 등 우리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 어디 한둘인가. 무엇보다 양 노총의 희한한 파괴적 경쟁은 계속되고, 그 속에 1,300만 노동자의 사회적 전망은 표류하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 노동운동의 상식이어야 한다.

이런 과제를 방치한 채, 아니 최소한 고민하지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간부의 자리를 이용해서 노무현 지지성명을 발표하겠다고 나설 노동조합 간부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권력의 향방을 눈치로 살피며, 권력이 흐르는 방향대로 움직이는 군상들로 어찌 이 험난한 변화의 시기에 노동대중의 이해와 진보의 열망을 지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전히 원칙과 상식을 되새기는 것이 먼저다.

내가 이해하는 한, 노무현은 득이 되는 게임의 소재가 아니라, 그가 옳다.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각성을 조직화해 가는데서 지금 그는 최선이다. 물론 보장된 최선이 아니다.

노무현 지지성명이 없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수구보수세력의 조직된 힘, 5년을 와신상담 기다려온 정권탈환의 욕망이 넘실대고 있기 때문에 흔들린다. 개혁·진보의 기대는 지금 바람일 뿐이지만, '노풍'의 거품을 거두고 '보다 진보할 수 있다는 기대는 단지 헛된 꿈일 뿐'이라며 불신과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위에 '반듯한 나라' 구호아래 구체제 복귀를 꿈꾸는 조직된 힘은 이제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영남지역주의가 사라지지 않았으며, 각 지역에 지역토호세력은 김대중 정부의 타협정책을 비웃으며 더욱 강고해 졌고, 김대중 정부의 실패를 정치혐오와 무관심과 개혁진영의 무기력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공세와 폭로와 조롱은 계속될 것이다.

{IMAGE2_RIGHT}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변화·진보에 대한 꺾이지 않는, 더욱 강력한 열망이어야 한다. 박태주 위원의 주장처럼, 화석화한 이념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진보적 요구가 각 부문에서 대중적이고 민주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진보를 가로막는 퇴행의 실체, 냉전의 잔재, 지역주의, 권위주의, 관료주의, 권력추종, 노동천시의 사회풍토를 직시해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대중적 각성,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진출처 : 디지털말 김재중 기자

나는 최근 자신들의 평화·통일 운동과 대립하는 반북반통일적 이회창 반대 운동에 나선다는 한총련의 성명서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그들이 옳다. 아니 굳이 대중적으로 거북하면 이회창을 빼도 좋다. 현실감있게 평화·통일의 열망을 말하는 것, 그것이 '노풍'을 사그라들지 않게 할 것이다.

노동을 소중히 아는 사회, 노동대중위에 군림하지 않는 권력, 노동자들의 포기할 수 없는 이 열망을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자. 노동조합을 노동조합 답게 하자.

* 필자는 민주노총 공공연맹 연대사업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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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5/14 [11: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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