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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감시 - 정치적으로 편향된 기술
 
장여경   기사입력  2002/04/30 [13:11]
{IMAGE2_LEFT}기술은 흔히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은 대부분 ‘노/사 양측에 도움이 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생산력 향상’을 명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기술도 중립적인 것은 없으며 특히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다.

데이비드 노블의 연구에 의하면, 사용자측은 공장에 자동화 기계를 도입할 때 기술적으로 합리적인 녹음재생 방식보다 노동자 통제가 손쉬운 수치제어 방식을 선택했다. 녹음재생 시스템에서는 급송, 속도, 작업량, 산출고에 대한 통제권이 기계공에게 주어져 있는 반면, 수치제어 시스템에서는 통제권이 경영진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작업장에 도입되는 기술은 생산력 향상이라는 명분보다는 기술에 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의 더 큰 이해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 노동력 자체가 주요한 생산력의 하나이지만 인간의 능력은 기계의 능력에 비해 매우 잠재적이며 제한적이다. 따라서 한정된 시간 안에 잠재적인 노동력에서 최대한의 생산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자측은 노동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감시와 통제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인권은 공장의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작업장에 있는 동안에는 노동자의 일거수 일투족 뿐 아니라 생각까지 회사의 재산으로 취급되면서 인권이 박탈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맑스가 통찰한 대로,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작업장은 보다 완벽한 통제를 위한 사용자와 노동자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 왔다. 노동자들을 한 지붕 아래 모으고 노동 시간을 정착시키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통제가 비교적 인격적이며 육체적 ‘처벌’로 이루어져 왔다면, 19세기말과 20세기 - 즉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들어서면서 관료제적 통제가 오늘날 기업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발전된 회계 기법과 위계적이며 정기적인 보고서, 그리고 ‘과학적 관리’를 특징으로 하는 관료제는 전문적 관리자층을 등장시켰고 노동 과정에 대하여 보다 전면적이며 직접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스웰과 윌킨슨은 자유롭게 맺어지는 노동계약이 자본주의적 전유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관료적 감시는 그 정당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말처럼, 관료들(관리자, 계획자, 사무원 등)은 자신의 행동(지휘, 감시, 규율)을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제가 확장되면서 생산기구가 점점 거대하고 복잡해져감에 따라, 조직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비용이 증가할 뿐더러 통제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테일러주의적 생산 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감과 저항은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계속 불러일으켰고 축적의 위기에 봉착한 자본 측을 당황시켰다.

테일러주의의 과잉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는 ‘유기적’ 조직과 스스로 ‘책임자율성’을 갖는 조직원에 의한 통제 방식이 등장했다. 번즈와 스톨커에 따르면 ‘유기적’ 조직은 공식성이 낮고 수평적인 정보흐름이 많으며 위계상의 지위보다는 전문성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에서 ‘기계적’ 관료제와 많이 대비된다. 혹자는 이것을 ‘유연적 전문화’라 부르며 포스트포디즘의 징후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통제의 본질적인 면에서 변화한 점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통제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다. 노동자 개개인의 ‘자유 재량’을 늘인 듯이 보이는 ‘책임자율’적 통제 방식은 오히려 소위 ‘팀작업’ 등으로 ‘동료에 의한 감시’를 조장하면서 보다 엄격하게 생산력 할당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 비해 시간․장소가 극도로 유연화된 조직 구조에서 성과급 등의 심리적․이데올로기적 경쟁 기제를 끊임없이 제시하면서 과거에는 동료였던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킨다는 점에서 ‘책임자율’적 통제는 가장 비인간적이며 전면적인 통제라 할 만하다. 이 통제 방식의 또다른 비인간적 면모는 그 기계적 특성에서 드러난다. 관리자와의 인격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대신 첨단기술을 도입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작업장 감시 기계’ 논란이 불거진다.

1998년 3월 현대자동차 전주 공장은 바코드 칩이 내장된 ICCARD 신분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사측에서는 ICCARD 시스템을 도입하면 수많은 노동자들의 신원 확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비효율성을 과감히 제거하고 공장을 혁신하고 … 복잡한 업무처리 과정을 단순화하고 업무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ICCARD가 단순히 신분 증명의 용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문 및 각 반의 샵에 이미 설치가 완료된 자동화 시스템과 연계되어 노동자의 위치와 작업 성과를 중앙에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RF 액티브 뱃지’의 형태로 운용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노동조합에서는 이 시스템이 작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권과 여유 조절을 극도로 회사에 귀속시키고, 결국 노조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크게 우려를 표명하였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실제로 미국의 작업장에 도입된 CCTV는 노동조합 조직화에 위 협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미국의 모기업에서 노조 조직화가 시도되자, 사용자는 공장내부에 비디오 감시장비를 설치하고 그것의 초점을 모든 개인의 작업장소와 작업자에게 맞춰놓았다. 모니터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오직 관리자만이 사무실에서 볼 수 있었다. 사용자는 모니터링이 안전을 목적으로 하며, 작업과정의 위험요소 및 잠재적 위험가능요소를 파악해 냄으로써 노동자의 보상보험요율을 낮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 조직화의 열기가 높아지는 동안, 작업공간을 떠나서 휴게실로 간 두 명의 노동자에게 허락없이 작업공간을 떠나지 말라는 주의처분이 내려졌다. 이는 곧 노조조직화를 위한 활동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판매부서에 있는 노동자 100명 중 89명이 조합의 대표권을 인정하기 위한 선거에 동의하는 위임장에는 서명을 했으나 실제 투표결과는 대표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의결정족수에 12표가 모자라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회사측이 비디오 촬영을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감시 기술을 바라보는 노동자들과 사측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뉴사우스웨일즈 프라이버시 위원회는 1995년 9월 발표한 보고서 「보이지 않는 눈 : 작업장 비디오 감시에 대한 보고서」에서 감시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사용자측의 아홉가지 전형적인 ‘도입명분’을 제시하였다. ①절도 방지 ②적대적인 기물파손ㆍ방화ㆍ파괴 방지 ③(생산성 향상을 위한) 작업 모니터링 ④고객 서비스 향상 ⑤고용인 교육 ⑥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⑦법적 의무 준수 ⑧(법적 분쟁 발생시) 사용자 면책 ⑨(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과정 모니터링이 그것이다.

감시 기술에 대한 사측과 노동자의 견해가 이처럼 다르다는 것은 그 기술의 실제적인 용도 역시 사측이 표방한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지난 96년 10월, 석달 전의 버스요금 인상이 실은 2백38억여 원의 운송 수입금을 빼돌려 회사를 적자 상태로 만든 업주들의 ‘조작극’에 의한 것이었음이 검찰에 적발되었다. 그런데도 다음해 3월 버스 요금이 다시 인상될 조짐을 보이자 버스 수익 투명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때 “버스 수익이 불투명한 것은 운전기사들의 삥땅 때문”이라는 업주의 주장이 부각되었고, 애초에는 버스업주들의 비리 때문에 시작된 ‘시내버스 개선종합대책’은 이렇게 해서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한 CCTV를 거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남겨놓고 마무리되었다. 서울시에서는 업주들에게 거액의 CCTV 설치비를 지원했고 서울시내버스에 일제히 CCTV가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CCTV는 더 이상 버스 수익 투명화와는 관계가 없다. 몇년새 널리 보급된 교통 카드가 요금을 ‘투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입 명분을 다했음에도 CCTV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업주들이 버스 CCTV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CCTV 화면을 모니터링하는 전담 직원을 채용하고, 노동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CCTV를 백배 활용한다. 어떤 버스 회사는 “물증을 잡았다”며 노동조합 활동가들만을 해고했고 또다른 회사는 관례대로 커피값을 뽑아간 노동자에게 “200원 삥땅쳤다”는 이유를 들어 퇴사를 종용했다. 때때로 그들은 CCTV의 ‘공익적 목적’을 강조하기도 한다. 9시 뉴스에서는 버스 CCTV에 잡힌 소매치기 장면을 생생하게 중계한다. 시청자는 소매치기의 행위에 분노하면서 CCTV가 우리에게 주는 기능적 효용에 안도한다.

{IMAGE1_RIGHT}ICCARD, CCTV 이외에도 전자정보적 감시의 수단과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다스(DAS) 시스템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첨단 생산력 통제 시스템의 경우에는 노동자 개개인의 생산량 도달 뿐 아니라 몇시 몇분 몇초에 얼마 동안 자리를 비웠는지, 화장실에 갔는지, 담배를 피우러 갔는지를 다 체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실제로 작업 과정과는 관련이 없는 화장실이나 휴게실에 설치된 CCTV는 그 자체로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또한 전자우편(E-mail) 감시, 인터넷 사이트 차단, 전화모니터링도 확산되고 있으며 유전자 검사나 생체 정보 수집 등 갈수록 첨단화되어 가고 있는 ‘감시 기술’에 의해 작업장이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작업장 감시는 쉽게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첫째,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위협 요소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자동차 사례의 경우에도 기층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간부들의 판단이 달라 논란이 더욱 크게 불거졌다. 둘째, ‘시스템’을 큰 특징으로 하는 현대 기술에서는 ‘감시 기술’을 따로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고, 감시 기술을 포착하더라도 분리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은 언제나 기계가 도입된 이후에야 그 기능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사후적으로 대응을 하다 보니, 기계 자체의 철수보다는 애매한 ‘합의’로 결론이 나게 마련인 것이다. 실제로 시내버스마다 설치된 CCTV는 노골적으로 ‘운수 노동자 삥땅 감시’라는 명분으로 도입되었음에도 노/사 양측은 ‘양심 보너스’로 이 문제를 합의함에 따라 감시의 문제를 양심의 문제로 만들었다. 그렇다. 감시 기술들이 도입될 때에는 결코 ‘감시’가 아닌 ‘생산성 향상’, ‘도난 방지’ 등의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그럴듯한’ 명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첫째, 보이지 않는 감시가 더욱 위험하다. 이 점은 푸코가 ‘전자 판옵티콘’에 대한 유명한 통찰에서 보여준 바 있다. 판옵티콘, 혹은 일망감시는 감시 받는 대상에게는 불을 환하게 쪼여 투명하게 만들고 감시 하는 자의 위치는 조명의 뒤편에 두어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점점 더 투명해 지는 개인,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권력’으로 요약되기도 하는 이런 감시 모형도는 소위 정보화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며, 가장 큰 문제는 감시를 받고 있는 대상이 감시의 시선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규율 권력을 내면화하게 되는 데 있다. 즉, 실제로 감시당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 없이 저기 달려져 있는, 혹은 숨겨져 있는 CCTV로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음을 언제나 의식하고 행동을 조절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 자율성’의 요체이자 최근 많은 기업주가 감시 기술을 열렬하게 도입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프라이버시권의 문제는 결코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감출 것이 없으면 감시당하라는 것은 비약이며 이데올로기이다. 프라이버시권의 핵심은 ‘내가 감출 것이 없어도’ 나의 정보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출 것이 있어서 엽서가 아닌 편지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화장실에서 용변보는 모습까지 공개되어야 하는가? 어떠한 명분으로 감시 기술이 도입되던지, 감시를 당하게 되는 ‘당사자’들이 이 기술에 대한 우선적인 판단권을 갖는다. 그들이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투명하라고 주장하는 사측일수록 오히려 불투명한 태도로 특정 기술의 위험성에 대하여 은폐하곤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사측이 노동과정에서 틀림없는 우위를 점하게 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핵심은 ‘투명’의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감시를 역감시로 바꾸어라. 사측에 도입될 기술의 모든 위험성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라! 이런 의미에서 기술사회학자인 브라이언 마틴은 프라이버시권 확보 운동에서 ‘반감시 운동’(anti-surveillance)으로 확산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즉 기술 통제권의 확보야 말로 작업장 프라이버시권의 핵심이며,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동 통제의 권리를 돌려주는 정당한 과정인 것이다.

전자주민카드나 버스 CCTV 장착을 둘러싸고 최근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감시 논쟁은, 기술의 ‘잘못된 활용’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한다. 작업장 감시 기술은 전적으로 ‘정치적 발명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장 감시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프라이버시권’이라는 낯선 권리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운동일 뿐 아니라 ‘자본의 기술’에 대한 운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참고]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작업장 감시'라는 용어를 쓰고 국내 노동계에서는 '노동감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여기에서는 작업장 감시라는 용어를 씁니다.
* 사진 출처 : 한겨레21

* 필자는 진보네트워크 http://www.jinbo.net 정책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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