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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총장, 대한민국은 서울대보다 넓습니다
서울대 독점체제를 자유경쟁으로 만들어라
 
pigasus   기사입력  2004/01/31 [21:08]

어제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라디오로 뉴스를 듣다 우연히,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저소득층 자녀들의 서울대 입학을 위해서 고교 평준화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들었다. 아마도 25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지난 34년 동안 입학한 서울대 신입생들의 ‘배경’을 분석해 발표한 연구자료와 관련된 인터뷰인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수구보수신문들에서 이 연구자료를 빌미로 “평준화 학력 세습”운운하며 연일 평준화 제도 폐지를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고 이처럼 평준화 폐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연구자료라는 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80년대 이후 부모의 학력과 경제력이 해당 자녀들의 서울대 입학에 끼치는 영향이 계속 커져왔다는,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상식을 그저 수치로 확인해 줬을 뿐이다.

얄궂은 것은 정운찬 총장님을 비롯한 서울대 일부 교수님들과 수구보수신문들이 이를 근거로 평준화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데 있다. 흥미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는 고교 평준화 찬성론자들의 논거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일부 서울대 교수님들과 수구 보수신문들은 이를 평준화 폐지의 근거로 전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견 그럴 듯 해 보인다. 이들의 주장대로 고교 평준화를 폐지하면 우선 서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방 출신의 학생들이 지금에 비해 서울대에 많이 입학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서울대 입장에서는 ‘부유층의 대학’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니냐는 항간의 비판으로 한 걸음 비켜 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대한민국의 초중고 전 교육과정은 입시를 위한 전쟁터로 변할 것임에 분명하다.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

평준화 제도의 밖에 있는 특목고의 경우가 좋은 예다. [문화일보]의 ‘여론마당’에 실린 다음과 같은 독자 의견을 보면, ‘사회적 불평등’을 근거로 한 평준화 제도 폐지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말인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특목고', ‘외국어고'라는 단어를 비非평준화 지역의, 소위 서울대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라고 바꿔 생각하셔도 무방하겠다.

경기도에 특목고를 26개교로 증설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공교육을 완전히 사멸시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해당지역에 외국어고가 들어서면 학생들은 블랙홀처럼 그곳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일반고들은 정상적 교육이 불가능해지면서 하루아침에 열등학교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럴 경우 일반고교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학교에 다닐 학생들이나 그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은 어떨까. 특히 실업고의 경우 지금도 인문계에 밀려 정원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외국어고까지 생기면 실업고들은 완전히 고사해버릴 것이다. 지금도 외국어고는 명문대 입시의 엘리트코스로 알려져 학부모들이 난리인데 특목고가 더 생기면 중학교들 역시 입시학원화 돼서 파행적 사교육이 만연할 것이다. 부작용만 산더미 같은 이 계획은 즉시 철회돼야 할 것이다. - 남준희(경기도 수원시), ‘경기특목고 증설 철회를’, [문화일보], 2004년 1월 30일, 7면

서울대 정운찬 총장님과 몇몇 교수님들과 수구보수 신문들의 주장대로 고교평준화를 해제했다고 하자. 몇 년 지나 서울대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 “우리 ‘서울대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조사해 봤더니, 학생들 부모의 학력과 금력이 입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더라. 이거 문제다. 중학교에서 우수학생만 차별적으로 교육할 수 없게 되면서 사교육을 받지 못한 저소득층 학생들이, 우리 ‘서울대 많이 보내는’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어려운 실정이다. 이는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애초부터 ‘계층 이동’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이래선 곤란하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선 중학교 입학 때부터 성적별로 학생들을 가려 뽑아 질 높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렇게 중학교 입시가 부활되고 나서 몇 년 지나 '서울대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에 많은 학생을 보내는 중학교’에서는 아예 초등학교 학생 선발부터 시험 봐서 뽑자고 할지도 모른다.

현재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외국어고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과정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을 시키느라 법석이다. 서울대 입학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떠밀려 학원으로 향한다. 방학인데도 학원가街는 밤늦게까지 불야성이다. 특목고 입학은 물론 이를 위한 선행학습과 관련된 사교육의 폐해가 늘자 급기야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이렇다할 실효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서울대 입학을 향한 이 같은 투쟁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처절한 ‘계급 투쟁’인 바 이들 학부모들을 나무랄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고교평준화가 폐지될 경우 이러한 전쟁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확대됨은 물론 참전參戰하는 연령층도 대폭 하향 조정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확장된 전선戰線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돈’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묻고 싶다. 정운찬 총장님과 일부 서울대 교수님들은 서울대 하나 잘 되자고 대한민국 초중고 교육 현장 전체가 전쟁터로 바뀌길 바라시는가? 대학 입시 지옥도 성에 차지 않아 고등학교 입지 지옥까지 새로 신설할 생각이신 것 같아 우려된다. 정말 이제 됐다. 이제 그런 가르침은 그만 됐다.

독점체제를 자유경쟁체제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무덤 위에 자리잡고 있는 현행 교육 현실과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입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고교 평준화 해제’가 아닌, 서울대 일극一極주의 해체다. 지금처럼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극단적으로 경직된 대학 서열화가 존재하는 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현재의 교육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시험의 성격을 바꾸고 영역별 반영 비율을 요리조리 꿰 맞춰봐도 결국 전쟁은 계속될 뿐이다. 10대 후반에 치르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나머지 인생이 결정 나는 이 비합리적인 룰이 바뀌지 않는 이상 말이다. 취업은 물론이고, 하다 못해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더라도 서울대를 나와야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서울대가 아니라고 해서, 아니 서울 소재 대학이 아닌 지방대학 운동권이라고 해서 돌을 덜 던지거나 구호를 덜 외치거나 무엇보다 서울에 있는 학생들보다 가슴이 덜 뜨거웠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서울대를 폐쇄하거나 대학 서열을 철폐를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못하다. 현재의 서울대 독점체제를 자유경쟁체제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각 대학의 노력에 따라서 순위가 바뀔 수 있는 체제 마련은 가능할뿐더러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선 공룡 만한 서울대의 몸집을 과감히 줄여야 한다. 서울대야말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대학간 공정한 경쟁이 가능해진다.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각 대학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스템만 마련된다면 정운찬 총장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염려하는 대학입시를 둘러싼 파행적인 교육 현실은 정상을 되찾을 수 있다. 끝으로 정운찬 총장을 비롯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운운하며 고교평준화폐지를 주장하시는 분들께 등산을 권하고 싶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부러 시간을 내셔서 근처 관악산에라도 한 번 올라가 보시길 바란다. 그 동안 몰랐겠지만, 서울이 꽤 넓다는 것을 알게 되실 거다. 놀라지 마시라. 대한민국은 서울보다, 그리고 당연히 서울대보다 훨씬 넓다.

* <주장과 논쟁>란은 네티즌들이 만들어가는 코너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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