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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장 토론회 이후, 아직도 남은 이야기
 
변희재   기사입력  2002/03/07 [14:10]

양님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미 오프라인 토론회를 마친 상황에서 내가 이 문제를 또 글로써 거론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어찌보면 오프라인 토론회에서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한 것들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라에 대자보로부터 인사모에서 정리한 토론 글과 토론에 청중으로 참여한 양님의 글을 받아 읽어볼 수 있었다. 양님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 토론회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는지 토론회 참관기 거의 전체를 내 의견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 넣었다. 다시 한번 내가 토론회 당시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님이 의문을 갖고 있는 부분을 뒤늦게나마 글로써 답변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비역은 군대를 싫어한다.

  양님이 제기한 첫 번째 문제, 즉 월장의 글이 문제가 있다고 해도 사이버 테러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회에서 밝혔듯이 이번 사이버 테러를 가지고 "역시 예비역 비판은 성역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곤란하다. 같은 여성주의 웹진인 <달나라 딸세포>에서도 월장과 비슷한 시각에서 예비역 문제를 다루었고, <두입술>에서도 다루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이버 테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예비역에 대해 비판의 입장에 서긴 했으나 이해해보려는 측면도 조금이나마 다루어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월장의 텍스트에서는 하얀자두의 글 뿐 아니라 다른 글에서도 그런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예비역 비판이 성역이라면 왜 <달나라 딸세포>의 기획에는 테러가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테러를 용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분석도 테러에 대한 분석 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이 동의 하에서 두 번째 논점부터 답을 해보겠다. 양님은 내가 서울대 출신이므로 서울대의 상황만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 다른 예비역의 숫자가 많고 여성주의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지방대의 상황까지 재단하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월장의 기사를 돌이켜보자. 월장이 예비역 문제를 지방대나 부산대로 한정시켜 이야기했었던가? 아래 월장의 기사를 보자.

"그들은 무엇을 담보로 대학사회의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진 집단으로 군림하게 되었는가? 누가 그들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대학사회의 주도권을 주게 내버려두었는가?
  우리의 문제제기가 성급한 오류라면, 왜 사람들은 권위적인 사람, 야한 농담을 잘하는 사람에게 '예비역 같다'는 말을 합니까? 여러분이 모두 아시다시피, 예비역들은 일관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향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모든 예비역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예비역에 대해 '싫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들의 문화를 거리낌없이 받아드림으로써 우리는 예비역에 대해 '싫다'는 말을 할 권리가 없다."


  이런 월장의 기획의도가 모두 부산대 예비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대학 사회의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집단 역시 부산대 예비역들만 그렇다는 말인가? 그런 표현이 월장 기사에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월장 텍스트에 부산대 학생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끼어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부산대 신방과 4학년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한 여대생의 글이다.

"어글리 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모양을 그대로 답습한 기사라고 생각한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런 편파적인 기사는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지 않고 논점이 될 부분은 애써 피하는 방식. 왜 월장을 성토하는가에 대한 원인은 슬쩍 비켜가고 일부 몰지각한 예비역들의 테러(그것이 실제 존재하는지도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성 반발만 부각시키는 수법하며, 꼭 군사독재시절 기득권들이 반대세력을 음해하던 그 수법과 몹시 닮아 있다."

  물론 이 글은 월장의 기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월장 사태를 보도한 여성신문의 기사를 비판한 글이다. 하지만 같은 부산대 여대생이라 하더라도 월장의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은 나와 거의 유사하지 않던가? 내가 계속 이야기하듯이 여성이라고 혹은 부산대 학생이라고 다들 월장의 기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비역 문제를 어느 각도에서 접근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게시판 토론 도중 내가 받은 한 부산대 예비역의 편지를 공개한다.

  "저는 올해 복학한 예비역입니다. 부산대 재적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님께서 말씀하시는 전형적인 예비역입니다. 대학문화의 주변에서 떨어져 나와 오로지 취업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도서관을 기웃거리는 예비역입니다.
  저 역시 증명할 수 없는 개인적 경험으로 비추어 님께서 지적하신 바, 제일 정확하게 예비역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나 제 친구를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1학년때는 대학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군대 갔다와서 복학하니 그야말로 개인적 문제(취업문제)로 숨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친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월장기사를 읽고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큰 반발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지지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럴 필요도 별로 못 느꼈고 해서....(이라 생략)"


  자, 나는 처음부터 부산대라고 해서 서울대와 그렇게 큰 차이가 날 것이라 보지는 않았다. 부산대 예비역이라고 취업 문제에서 자유롭겠는가? 예비역들이 대학의 중심에서 밀려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 취업 문제 때문이므로 부산대 예비역들이 취업에서 면책특권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서울대 예비역들과 그리 다른 상황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다. 이건 분명히 추측이다. 그리고 그 추측을 위에 소개한 부산대 여대생과 예비역의 글로 논증했지만 이걸로는 충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의견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글을 소개하겠다. 나와 동시대에 같은 대학을 다닌 서울대 페미니스트 졸업생 집단 메피스토의 글이다.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되지, 라는 말은 어떠한 이론에 기대지 않고도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시민권이 언제나 국가에 대해 획일적인 방식의 공헌을 해야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공헌의 기준은 물론 병역이다. 이에 따르면 병역, 혹은 병역과 같은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지 않은 어린 아이나 노인, 그리고 장애인과 여성은 죽었다 깨도 제대 군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는 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관악문화 3호, <여성주의 입장에서 본 군가산점제 논쟁>, 335쪽.)

  부산대이든 서울대이든 상관없이 월장과 서울대 졸업생 페미니스트들은 똑같은 예비역관을 갖고 있다. 월장이 말한 대로 "예비역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와 메피스토가 말한 대로 "최소한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336쪽)"이라는 예비역관 말이다. 내가 월장 텍스트에 주목했던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당연히 이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예비역이라는 존재가 왜 기득권 상류층 세력일수록 희박해지는지. 군면제 비율이 왜 상류층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냐는 말이다. 메피스토는 "이들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도 사회의 엘리트로서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기득권층이 아닌 남성들은 모두 권력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걸 누가 입증할 것인가? 실제로 아무런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권준희: 하지만, 책 대신 총을 들었다는 어느 방청객의 말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강제징집을 피할 수 있는 특례 대신에 기꺼이 강제징집에 응하는 이유도 있다는 거죠. 군대가면 사람된다."

(대자보 34호, <군가산점 3%가 부족할 때 >)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성 발언들이 사실인양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여성주의자들과 예비역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병역 특례업체에 취업해서 군면제를 받기 위해서도 빽이나 학력이 필요하고 스카이 대학 학생들은 거기 들어가기 위해 피튀기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예비역에 대해 느낀 대로 떠들어도 되는가?

  월장은 처음에 웹진을 내면서 "남녀가 이해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한층 더 편안하고 건전하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으면 해요."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그러니 나 역시 학부시절부터 매체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성실성은 갖추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1997년 8월 4일 <뉴스플러스>에서는 신검을 마친 228명(대학생 18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군대 가기 싫으냐는 질문에, 54.8%가 가기 싫다는 답을 했고, 군복무가 공평하게 부여되느냐는 질문에, 68%가 공평하지 않다고 답했다. 토론회 도중에는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이런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신검까지 마친 남성이라면 군대 가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할 수밖에 없다. 그 상황이라면 "어차피 갈 것 즐겁게 가자."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구태여 "가기 싫다." 고 답하지 않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까지 감안해야 한다. 또한 "징병검사를 받기 전에 병역면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거나 시도해 본적이 있는가?"라는 문항에 대한 답변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응답자의 6.2%가 「시도해 보았다」고 했고, 53.7%는 「생각만 해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기사도 이렇게 결론 내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유응답토록 했더니 '군에 갔다오면 학업에 방해된다.' '군 생활 중 사고가 나면 나만 손해다.', '군에 대해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보수가 너무 적고 혹사시킨다.', '아는 형이 군대갔다 와서 더 멍청해졌다.', '군대는 보통사람만 가는 것 아니냐.'는 등의  답변이 나왔다. 전체적으로 '군에 가면 손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식적으로 신성한 의무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에는 몸을 사리는 우리 사회 지도층의 이중적 행태가 청년들의 냉소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건 1997년의 이야기이고, 군가산점 파문까지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이러한 의식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졌을 거라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대다수의 남성들은 군에 대해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토론회 도중에도 "예비역들은 국방의 의무를 신성화 한다." 라는 주장이 나오길래 내가 즉각 반박했다. 사실 관계 문제로 논란이 붙었고 나는 바로 어제 월장 사태 논의가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던 <대자보>와 <부산대> 자유게시판에서 '신성한'이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해보았다.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하는 글은 놀랍게도 단 한 편도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예비역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너희는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그 밑에 "무슨 소리냐? 아무도 그런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끌려갔을 뿐이다."라는 글만 수두룩했다. 프리챌 월장 커뮤니티에서는 본문 검색이 안 되니 검색을 못 했으니까, 그런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제발 나에게 직접 보여주기 바란다. 군가산점 논란 때부터 하이텔(hitel) 큰마을(plaza)의 거의 모든 글을 뒤졌지만 요즘 예비역들은 국방의 의무에 대해 별다른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만 확인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보상해달라고 아우성을 친 게 아니겠는가? 신성한 의무라면 보상이 왜 필요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남녀 문제가 아니다. 오직 예비역의 의식에 관한 사실확인의 문제이다. 내가 갑자기 여자가 된다고 해서 예비역들이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하는 게 보일리는 만무하다. 그에 대한 근거로서 <여성과 사회 11권>에 실린 한국여성연구소 배은경연구원의 글을 소개한다. 참고로 내가 이제껏 찾은 예비역 관련 글 중 최고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자든 예비역이든 다음부터 예비역 관련 글을 쓸 때 반드시 이 글을 참고해줬으면 좋겠다.

  "그것을 가능케 해준 것이 바로 군대 경험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든가 '남성성의 완성'이라는 식으로 표상하는 담론의 존재였다. 군대란 '일정 정도의 연령에 도달한 대한민국 남성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고, 따라서 씩씩한 대한의 남아인 내가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루도록' 나라를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바로 그러한 의무의 이행을 통해 나는 진정한 남, '싸나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기왕의 의미구조 말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미구조는 이미 1980년대 중후반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대라는 곳이 실제로 대한민국 남성이면 누구나 '똑같이' 가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징집대상 연령대에 도달한 남성의 수가 실제 군대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크게 넘어서면서 현역복무에서 빠지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났고, 현역 내에서의 보직배치 역시 기존 사회의 계층 및 학력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결국 사회에서 밑바닥에 있는 남성들일수록 군대 내에서도 가장 힘든 일을 떠맡게 되는 모습이 현실로 나타났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과 같은 유행어들이 보여주듯이 당시 일반화된 병역비리는 군대 경험을 점점 더 자신의 힘없고 빽없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변화시켜갔다. (「여성과 사회 11권」, <군가산점 논란의 지형과 쟁점>, 97쪽)"

  나는 배은경씨야말로 예비역들의 의식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조사를 소개하겠다. 대학문화신문에 실린 서울여대 학생들의 이색 설문조사이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강지선, 김민경, 김희옥, 문정연, 황지현 팀이 '여성 군대 의무화'에 대해 서울여대 학생 200백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어떤 군을 지원하겠냐는 질문에 남학생들의 선호도와 비슷한 카튜사(31.5%),  공군(25.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여대생들은 또 절반이상인 56%가 군복무기간을 1년 이하가 적당하다고 보았으며 두발의 길이도 자유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학생이 43.5%로 가장 많았다. 병역기피에 대해 여대생들의 63.5%가 '기피는 아니지만 편한 보직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겠다'고 응답했으며 '기피하겠다'는 학생은 9%였다."

  위의 「뉴스 플러스」 기사의 조사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대생들의 63.5%가 상황이 닥치면 가기 싫지만 편한 보직을 골라서 군대를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남성들의 의식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대생들도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 여겨 군에 가겠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군복무는 납세의 의무와 똑같은 의무이다. 그래서 치사하게 편법 써서 빠지기 보다는 이왕 갈 것 당당히 가겠다는 것이다.

{IMAGE2_LEFT}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과연 군대나 예비역의 문제가 사회과학의 영역이냐는 회의감 때문이다. 아무리 이 통계, 저 통계 갖다 줘도 "남자들은 기득권을 얻으러 군에 자발적으로 가고 있고 예비역은 권력이고 이를 신성시 한다." 이런 절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겠다면 도리없지만 나로서는 이성을 바탕이 된 믿음이 중요하다는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들려주는 수밖에 없다. "예비역은 아무 생각 없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끌려갈 뿐이다."라는 말을 뒤집을 만한 정확한 설문조사나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앞으로는 "예비역들이 권력을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를 가고,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 한다."는 추측은 소통을 위해서라도 쓰레기통에 과감히 던져버렸으면 좋겠다.

  예비역의 이중적 감정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상실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예비역들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두 가지 예로 설명했다.

  1. 신성화하지 않는데 왜 미필자들이 군대를 비판하면 발끈하는가?
  2. 왜 그럼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드는가?

  1번에 대해서는 내가 386세대들을 예로 들며, 그들끼리는 화염병 던진 이야기해대며 히히덕거리더라도 나 같은 90년대 학번이 "형들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화염병 놀이 한 거지?" 이렇게 물었다가 분노와 슬픔에 잠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그때의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장난치는 건 그들로서는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걸 가지고 386세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신성화한다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2번에 대해서는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샐러리맨들이 갖고 있는 상실감과 자랑스러움의 미묘한 이중적 감정으로 설명했습니다. 분명히 군복무를 다한 게 범죄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특히 파워 엘리트들의 병역비리가 도지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우리는 치사하게 피하지 않고 2년 2개월을 보냈다." 이런 자랑스러움과 상실감을 얼마든지 동시에 가질 수 있다.

  386세대들의 감정, 그리고 샐러리맨들의 감정과 예비역들의 감정이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만약 예비역들의 이중성을 욕하려면 386세대와 샐러리맨들도 덩달아 같이 욕먹어야 한다. 이에 대한 유일한 반론은 "어차피 군대에 갈 수 없는 여자들의 비판 아니냐?"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기본 전제에 모순된다. 여자든 군필자든 누가 비판해서 군필자들이 상실감과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군복무를 하게 되는 그 시점부터 갖게 되는 감정이다. 386세대들이 90년대 학번인 내가 비판해서 시대에 대한 자부심과 상실감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여기서 확인해야 될 것은 예비역들이 상실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는 그 이중적 감정이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정할 수 없는가? 예비역들이 대학에서 보여주는 행태에 대해서는 이 감정과 관계없이 따로 다루어야 될 의제이다. 그리고 그걸 다루기 위해서는 예비역들의 이중적 감정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도 예비역 문제를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지식인들의 담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양님이 가장 듣고 싶어했다는 지식 담론과 일상적 실천 사이의 괴리감 문제이다. 이것은 사실 독립된 주제로 따로 다뤄도 양에 넘치는 주제이다. 다만 양님이 제기한,

"지역감정이 나쁘다는 담론에 모두가 동의하고, 담론의 차원에서는 아무도 반박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사회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한 폐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담론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놓치면 '지역감정이 나쁘다는 걸 모두 동의하므로 지역감정의 폐해가 없다'는 해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지역감정의 담론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보자고 제안할 수밖에 없다. 지식 담론 차원에서 나오는 "지역감정은 나쁘다."라는 말의 진실이 무엇인가? 그게 진정으로 지역감정을 뿌리뽑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지역감정에 대해 똑바로 이야기하는 지식인은 강준만, 황태연, 최장집, 유시민 등 손에 꼽아야 한다. 한신대 윤평중 교수도 지역감정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럼 윤평중 교수가 지역감정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호남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 한나라당에 표를 줘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윤평중 교수의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줄 안다. 지역감정에 대한 지식담론 자체에 이미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일반 소시민들이 일상적 실천으로까지 이어지기는커녕 아예 흘려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예비역 문제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검토해본 여성주의자들의 예비역 관련 글 중 예비역들이 그나마 성찰해볼 수 있는 글은 배은경씨의 글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월장의 글? 메피스토의 글? 「페니스 파시즘」?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글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지역감정에 대한 윤평중 교수의 글보다 떨어지면 떨어지지 높지는 않다고 본다. 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양님이 제기한 또 다른 문제,

  "김정란, 노혜경, 진중권님과 같은 지식인들이 월장사태에 대해 매체에 기고할 때, 모두 월장의 발언권을 막는 사이버 마초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변희재님의 말이 옳다면 위 언급된 지식인들이 모두 틀렸다는, 아주 중요한 발언이 된다. 게다가 틀린 담론만이 매체에 공개되고, 안티월장의 옳음을 믿는 지식인들이 모두 침묵하였다는 이해할수 없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답변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분명히 하자. 김정란, 노혜경, 진중권씨가 월장의 텍스트에 동의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월장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형성된 전선에서 월장의 손을 들어준 것뿐인지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나는 마초들의 행태를 비판한 글에 대해서는 시비걸지 않았다. 내가 주제로 잡고 있는 것은 예비역 문제이다. 그리고 「페니스 파시즘」에 실린 노혜경씨와 진중권씨의 글은 마초들의 행태 뿐 아니라 예비역 일반론에까지 치고 들어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안티월장의 옮음을 믿는 지식인들이 모두 침묵하였다."는 결론은 내가 내린 게 아니다. 내가 언제 안티월장이 옳다고 말한 적 있던가? 나는 안티월장의 그 한심한 짓거리야말로 예비역 문제를 더 꼬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대자보 독자마당의 ghost님의 글처럼 우선 안티월장을 해체시켰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비역 담론에 대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기존 지식인들의 주장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판할 수 있다. 비판도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월장은 무엇을 얻었는가?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월장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비판의 효과이다. 과연 그 텍스트를 보고 성찰할 수 있는 예비역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월장은 토론이 아닌 도발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답할 수는 있겠다. 나는 토론회에서 나의 학과 사례를 제시했다. 한두 명의 예비역의 잘못(예비역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은 군대 가기 전부터 그랬다)을 가지고 전체 예비역을 공격하는 바람에 나의 과에서는 예비역과 여대생들 간의 교류가 거의 끊겼다. 종강파티 또한 따로 했을 정도이다. 이 말을 했을 때 아흐리만님은 "참으로 억울했다는 건 인정합니다."라는 말을 했지만 그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한두 명의 예비역의 잘못을 전체 예비역으로 돌려 비판해서 예비역과 여대생 간에 벽을 쌓았을 때 결국 누가 피해를 보게 되었을까? 예비역들은 어차피 도서관에 쳐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예비역에 대한 아무런 감정이 없는 불특정 다수 여대생들이라 생각한다. 월장 2호의 기사에서는 여대생들의 취업문제를 다뤘고 결론적으로 그들은 "남자들은 예비역을 중심으로 취업준비를 하고 여자를 끼워주지 않으므로 우리끼리 모여서 취업준비를 해야한다"라는 주장을 했다. 우리과 여대생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계속 그래야 한다.
  그리고 여대생들은 평생 대학만 다닐 것인가? 어차피 예비역이든 뭐든 다 같이 사회생활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대학에서부터 전위세력들은 예비역과 여성을 비롯한 미필자들이 함께 성찰할 수 있는 텍스트를 제시해야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벽을 쌓아야 한다는 말인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 동안 진로를 준비하므로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고학번 남학생을 활용하지 않고 그들을 적대시해서 여대생들이 얻는 게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도 전체 여대생의 의견도 아니고 일부 여대생들의 과잉 때문에 전체 여대생이 이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양님이 지적한 대로 "술자리에서 여자 후배에게 술 좀 따르라는 게 뭐가 나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예비역들이 있다면 나라도 나가서 비판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논쟁에서 그게 논점이었던가? "예비역들의 행태가 나쁘다."고 지적하면, "그것 좀 하면 어때?" 이런 논쟁구도가 되었어야지 정상이다. 그런데 그 논쟁구도가 아니라, "요즘 예비역이 누가 그래?" 이 논쟁구도였다. 그러다보니 부산대에서도 "예비역 문화가 있다고 보는가?" 이렇게 질문해서 80%의 동의를 받는 개그까지 연출하게 된 것이다. 내가 다시 제안한다. "예비역이 대학에서 예비역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있는가?" 이렇게 물어보길 바란다. 과연 어느 정도 동의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우리 과의 경우도 그렇고 월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자 후배에게 술 좀 따르게 하면 어때?" 이런 예비역들이 걸러진 게 아니다. 그런 정도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예비역이라면 월장 문제에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냥 얼마든지 여대생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조용히 살고 있던 소시민 예비역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그들을 몰아내서 월장을 제외한 여대생들이 과연 무엇을 얻었으며,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널리고 널린 자료를  다 검토해서 다시 한번 예비역론을 제대로 다루어주었으면 한다.

[이어진기사]
웹진 월장 토론회, 무엇을 남겼나? / 디아블로, 루나루즈
안타까운, 너무나 안타까운-변희재씨에게 묻는다 / 양

  
*본 글은 대자보 64호(2001.9.1)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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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07 [14: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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