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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낯설게 하기] 나탈리, 나탈리, 나탈리
 
서현   기사입력  2002/02/16 [13:47]
- 어딘가 우리의 망각을 기다리는 자가 있다 -



'메멘토'의 레너드 셸비는 기록하는 자다. 그는 자신의 망각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폴라로이드와 메모와 문신으로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이렇듯 그의 기록은 철두철미하고 치열했으나, 그가 복수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필경 누군가에게 이용당했거나, 있지도 않은 원수를 찾아 헤맨 것이 분명하다. 망각하는 한 그의 어떠한 기록도 별 소용이 없었던 셈이다.

영화는 레너드의 복수로 시작된다. 레너드는 그의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 남자를 총으로 쏜다. 바로 다음 순간, 발사됐던 총알이 다시 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영화는 거세게 시간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관객은 레너드가 기억하는 만큼 기억하고, 망각하는 만큼 망각하면서 그 낯선 시간 속으로 함께 스며든다. 그런데 스며들수록, 관객의 머릿속에선 의심이 피어난다. 레너드가 쏜 자는 범인인가. 아니다. 이에 대한 확신은, 나탈리가 차에서 돌아올 때, 비로소 모든 관객의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IMAGE1_RIGHT}그 장면은 이렇다. 레너드를 격앙시키는 나탈리. 그녀가 말한다. 나는 너를 이용할 것이다. 어차피 너는 잊을 것이니, 이렇게 말해주고 이용하는 것은 더 흥미롭다. 나탈리의 비아냥에 레너드는 자제심을 잃고 주먹을 휘두른다. 의도했던 대로, 나탈리는 터진 입술과 멍든 얼굴을 갖게 된다. 그리고 유유히, 그녀는 차로 돌아가 레너드의 망각을 기다린다. 10분의 기억력을 가진 레너드는 나탈리와의 일을 기록하기 위해 펜을 찾는다. 그러나 펜은 이미 치워진 상태고, 흥분한 그는 곧 망각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나탈리가 다시 돌아온다. 도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녀는 레너드를 기만한다. 그리고 레너드는 결국 이런 메모를 갖게 된다. 도드. 백인. 6피트 2인치. 금발. 나탈리를 위해 그를 제거하라.

레너드가 이용당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망각하는 자고, 철저하긴 하지만 기껏 남겨두는 메모는 매우 단편적이다. 남성, 백인, 존 또는 제임스, G―, SG1371U 등등이 그가 남겨놓은 메모들이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이 철자들은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이것들은 수많은 참 진실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진실인 양 행세하기 때문이다. 결국 참 진실은 돌아오지 않고, 거짓 진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아뿔싸 이는 우리 현대인의 기억법이다.

{IMAGE2_RIGHT}가령, 우리는 6·25라는 심플하고 날렵한 메모를 가지고 있다. 대개의 이들에게 이 세 개의 숫자는 '1950년 6월 25일 북괴남침'만을 의미한다. 그 뒤에 숨어있는 수없이 많은 진실들은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덕분에 전쟁의 배경은 물론, 비극적인 한강다리 폭파,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성남장, 국민방위군, 지리산 양 자락의 학살 등이 6·25라는 키워드 아래 망각 또는 은폐되고, 이는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이 잘 먹고 잘 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요즘은 숨어있던 나탈리들이 하나둘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어디선가 우리의 망각을 기다리던 나탈리, 나탈리, 나탈리.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미 국부(國父)가 되어 국회의사당 앞에 흉상으로 서있다. 박정희도 곧 기념관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그리고도 끊임없이 나탈리들은 돌아온다. 망각과 은폐가 계속되는 한 나탈리들의 귀환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당신과 나는 또 다시 이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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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2/16 [13: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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