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서현의 낯설게 하기] 인간 > 매트릭스 > AI
 
서현   기사입력  2002/02/02 [01:11]
- '매트릭스'를 통해 본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 -


{IMAGE1_RIGHT}'매트릭스'에 의하면, 2199년 지구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지구는 AI(Artificial Intelligence)에 의해 지배받으며, 인간은 존엄을 가진 생명체가 아닌 연료다. 인간은 단지 120 V의 전기와 25,000 BTU의 체열을 제공하기 위해 길러지고 수확될 뿐이다. 게다가 현실을 직시하는 인간 또한 거의 없다. 모피어스나 트리니티, 네오, 이들 몇몇 레지스탕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 속에 갇힌 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 그들에게 지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999년의 어느 날이다. 매트릭스를 뚫고 나가지 않는 한 그들에게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한편 섣부른 오만이다. 우리 역시, 2199년의 인간들이 매트릭스에 갇혀있듯, 무언가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 우리의 감옥들은 대개 고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치밀하게 둘러싸며, 우리의 내부로 스며들고, 또한, 안으로 바깥으로, 위로 아래로, 제 자신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들은 영화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처럼 인간을 진실로부터 격리한다. 이에 우리는 진실 대신, 우리의 감옥, 우리의 매트릭스를 위해 부역하게 된다. 서서히 우리는 매트릭스의 노예가 되고, 급기야 그 매트릭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렇듯 악성 매트릭스는 온 지구 온 인간을 물들이고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국가다.

{IMAGE2_RIGHT}그렇다면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는 심상치 않다. 'GO'는 국가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에 대항하는 일종의 레지스탕스소설이다. 때문에, 정확히 '매트릭스'만큼 진지하고, 또 정확히 그만큼 유쾌한 소설 'GO'는 여러 면에서 영화 '매트릭스'와 궤를 같이한다. 예컨대, 주인공 스기하라는 네오다. 그리고 스기하라의 속 깊은 친구 정일은 레지스탕스의 이론적 실천적 리더 모피어스에 해당한다. 또, 이들은 모두 자신을 둘러싼 매트릭스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 넘나듦은 스기하라와 네오, 정일과 모피어스가 거개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주요한 요인으로, 곧,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의 첫걸음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 넘나듦은 넘나드는 자들의 정신을 매트릭스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비로소 그들은 매트릭스와 분리된 자신을 상상하기 시작하고, 이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혁명이든 진보든 그 시작은 이런 식이다.

스기하라의 경우, 넘나듦은 핍박에서 비롯됐다. 재일한국인이라는 태생의 한계는 그를 이지메로 몰아넣었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묻게 했다. 조선은, 한국은, 일본은, 그리고 재일은 무엇인가. 장미를 장미라, 사자를 사자라 불러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조선, 한국, 일본, 재일은 이름이고, 이름이 꼭 그 이름이어야할 이유는 없다. 원한다면 이름을 바꿀 수 있듯, 개인은 국적을 이탈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국가보다 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스기하라가 속한 세상에서 인간은 분명 국가보다 아래다. 인간들은 국적을 이유로 연인에게 거부당하고, 국경을 넘지 못해 피붙이를 만나지 못한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가. 스기하라는 눈치챈다. 범인은 지배하는 자, 즉 AI다. AI들은 스기하라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을 국가라는 매트릭스에 가둔 채 이용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지 오래다. 인간은 AI의 연료일 뿐이다.

사실 스기하라가 본 것은 일단에 불과하다. 매트릭스를 이용해 잘 먹고 잘 살아보려는 AI들의 행태는 더 악독하고, 더 치밀하다. 그들은 인간이 모체의 자궁에서 풀려나는 순간부터 이른바 관리를 시작한다. 모든 개인에게는 번호가 부여되고, AI들은 그 번호로 개인을 식별한다. 번호는 유용하다. 번호 속에는 나이에 관한 정보도, 지역에 관한 정보도 있다. AI들은 모든 개인이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지역에서 적당한 교육을 받게 하고, 개인은 '나는 자랑스러운'으로 시작하는 어떤 맹세를 외며 학교를 오간다. 그곳에서 우등인간과 열등인간이 가려지고, AI들은 우등인간들을 적당히 이용해 인간 전체를 농락한다. 인간들은 마침내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는 무뇌아가 된다. 물론 감히 매트릭스를 뚫고 나갈 자는 없고, AI는 만족한다.

진정 우리가 인간이라면 이쯤에서 한번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혹 우리는 연료가 아닌가. 국가의 해체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상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차선책을 제안한다. 그것은 국가라는 매트릭스에서 AI를 제거하거나, 아니면, 오로지 AI만을 위해 작동하는 국가의 기능을 개편하는 것이다. 하긴 이조차도 한없이 먼 꿈이긴 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세뇌될 대로 세뇌된 개인의 두뇌를 청소하는 일에서부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든 제도를 뜯어고치는 일, 제멋대로 길길이 날뛰는 자본을 다스리는 일까지, 거의 전 지구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많다고 주저앉을 순 없다. 우리는 인간이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2/02 [01:1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