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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 많은 하리수들은 어디에 있나?
 
변현단   기사입력  2002/01/30 [20:31]
2천 여명의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묻는다

{IMAGE1_LEFT}1994년 '친구사이`가 홍대앞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40여명의 동성애자(homosexual)들이 모였다. 더 이상 낙원가 게이바 같은 곳에서 사회적 냉대를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며 고통의 한숨만을 짓고 있지 않겠다는 그들의 각오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그 당시 참석한 유일한 이성애자(heterosexual)이었고 여성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성애자들은 내가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당신은 레즈비언이요?"
이성애자인 나는 그 자리 있기가 오히려 무색했다.
당시 낙원동에 몰려 있는 게이바를 주말마다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았고 마침내 당시 '사회평론 길`이라는 시사월간지에 있는 모기자에게 국내의 동성애자의 인권문제를 다루어 보라는 기획안을 던져주었다. 흔히 운동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잡지에서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를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일반적 편견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대학에서는 동성애 써클들이 생겨나고 퀴이 영화제도 매년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대학생 중심의 동성애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인권차원에서 동성애자 운동들이 전개되었고, 2000년 9월에 연예인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하면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스포츠 신문, TV매체를 중심으로 '얼굴마담`이 한 사람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트렌스 젠더(Trans-gender: 성전환자) 하리수의 등장이었다.
트렌스 젠더는 동성애와는 다르지만 성정체성의 혼란에서 자신 스스로 성(gender)를 선택하여 생물학적 모습의 전환을 꾀하고, 사회적 성정체성을 획득하려하는 하리수의 등장은 홍석천의 '커밍아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리수를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호기심은 매스미디어의 멋진 성상품으로 탈바뀜되었다, 예쁜 여성의 몸매와 얼굴 이상을 뺨치는 하리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정말 여자보다 예뻐" 라는 말부터 그의 오염한 모델 광고나 영화는 작품을 떠나 하리수 한 사람의 몸값으로 충분히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1. 하리수와 홍석천을 통해서 본 사회적 편력

홍석천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연예인이었다는 사실과  '커밍아웃`이라는 성정체성의 선언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IMAGE2_RIGHT}성적 취향(sexual orientation)이 일반적으로 이성애자(heterosexual), 양성애자(bisexual), 동성애자(homosexual)로 나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남녀의 가족 중심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사회적으로 이성애자들만이 용인이 되기 시작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성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철저한 이성애자 중심의 가족관계 속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의 발현되는 양태들은 스스로 억압을 해야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정신병자`로서 규정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재생산의 구조`의 한계를 가지게 되는 동성애자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게이`라고 하면 섹스하는 장면들이 먼저 상상이 되고, 남성의 모습을 한 사람이 여자같은 목소리, 여자같은 걸음걸이 등이 상상이 되면서 사회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이성애자들은 소름이 돗는 몸서리를 치게 한다..

'인간 재생산 구조`에서의 일탈이 마치 인간이 아닌 무슨 짐승들의 놀이 마냥 치부시 되는 것은 마치 생물학적 성 정체성에 개인 내부의 사회 심리학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상존을 거부하고 생물학적 남성은 사회심리학적 남성성을 가져야 하고, 그들의 성적 취향에도 남성과 여성의 대립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동성애자들 특히 게이들이 가지는 입지는 이성애자들의 보편성을 외치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성적 취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동성애자들, 특히 게이는 남성의 권위와 지배를 떨어뜨리는 수치심으로 작용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혈연중심의 가족제도를 강화 보존하는 전근대적 사고는 동성애자들이 선호하는 '입양`을 직접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사회 인지상황을 빗겨나면서 '혈연으로 이어지는 가족`'가부장제의 가족`이 손상받는 것을 우려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정신적 입지를 조금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지"라는 부지불식 중에 튀어나오는 말은 일상생활의 대표적 언어습관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 역할, 즉 젠더의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났으면 사회적으로도 남성으로 기능해야 하며,  강인함, 권위, 강렬함 등의 모습을 가져야 함을 강제하는 것이다. 가족에서, 사회에서도...

따라서 홍석천 같은 사람은 남성의 권위적 사회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경우이다. 특히나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홍석천이라는 사람이 자라나는 어린이의 성적 취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그들은 두려워하여 홍석천을 밀어낸 것이다.

아직도 집안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대다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허용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회권력은 보다 보수적이며 권위적인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하리수가 등장했다.
트렌스 젠더, 하리수는 생물학적 남성이었고 여성으로 성전환수술을 하였다. 여자 하리수이지, 남자 하리수는 아닌 것이다.
몸매가 끝내주는 미인 하리수가 등장하자 시청자들은 호기심으로 하리수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성전환했데..."  보수적인 남성들조차도 "하리수가 예쁘긴 예쁘네" 하면서 곁눈질을 한다. 그리고 홍석천을 밀어냈던 매스미디어들은 앞다투어 하리수를 보도하고 화면에 열심히 세우기 시작했다. 하리수가 남자가 여자가 되었다는 것에서 홍석천 밀어내기에 앞장섰던  남성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정말 예쁜 여자의 하리수`는 시청률과 잡지판매량을 증가시켜주는 완벽한 '상품`으로 포장되었다.
일반 여성 연예인들의 '몸값`은 하리수를 통해 철저히 적용되었다. 하리수의 정신이 어떠하든 성정체가 어떠하든 ... 남성,여성 모두 침을 흘리고  감탄하는 하리수의 몸은 이제야 말로 정신을, 영혼을 빼버린 '몸`만을 가진 완벽한 자본주의의 상품이 된 것이다.


2. 트렌스젠더 하리수 뒤에 묻혀진 트렌스젠더들의 비애.

지난해 4월 경 하리수가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때 모일간지 신문에 조그마한 기사가 실렸다..

"국내의 트렌스젠더 2000여명 정도"

정확한 숫치는 알 수 없지만 성전환 수술 의사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외국, 일본 등지에서 몰래 수술을 받고 들어오는 것을 합치면 대략 2000여명이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한국에서 수술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는 것이니, 외국에 나가 완전히 다른 성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전환 수술을 하였지만 사회적으로는 반쪽자리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에서 여자로 다시 태어난 한 30대 중반의 성전환자는 얼마 전 대구고법에 호적 정정 신청 항고장을 냈다. 포항 지법에서 기각 당한 뒤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주민등록 뒷번호 시작을 1에서 2로 바꿔달라는 것,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성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를 합법적으로 인정받으며 살겠다는 바람이다. 지난 몇 년간 7차례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 신청이 있었지만 법원은 <타고난 염색체와 사회통념>을 이유를 들어 매번 이를 기각했다."

"지난 95년 한 성전환자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일이 발생했으나 법원은 가해자들을 강제추행죄로 판결했다. 피해자를 여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한겨레 21)

타고난 염색체는 남성이지만 개인이 성전환을 그토록 원한다면 성전환은 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문제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을 빌미로 사회적으로는 성전환을 인정해주지 않음으로서 사회적으로 봉쇄를 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사회통념이란 바로 동성애자처럼 성적 취향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결혼이나 가족을 꾸미고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는 <사회적 통념> 속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성전환자들이 병역기피자로 도망을 다녀야 하고, 직업을 가지는 데 있어서도 꼬리표를 떼어주지 않음으로서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법의 의지는 우리나라 헌법이 보장한 선택의 자유,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사회적 통념>을 내 세워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매장되게 하는 야만적이고 패권적 의지를 철저히 관철하고 있다.

웃기는 얘기지만 하리수처럼 모든 트렌스젠더들이 연예인이 된다면 그들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트렌스 젠더 연예인이 많아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상품의 희귀성 원칙에 의한 몸값에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보수적인 남성중심의 사회, 가부장제 사회의 유지,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통해 계속해서 사회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리수가 상품가치가 하락하면 하리수를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3. 동성애자와 트렌스 젠더, 그들의 인권운동의 방향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동성애자들의 성억압의 역사는 여성의 성억압의 역사와 함께 되어 왔다. 가족농으로부터 시작한 사유재산의 출현은 사유재산의 축적과 권력을 가지기 위해 전쟁을 통해 견고한 국가권력을 만들어 나가고 그 가운데, 노예노동에 의존하면서도 가족의 혈연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적인 혈연중심의 권력을 창출시켜나간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에게 지워졌던 순결이데올로기 그리고 종족보존을 위해 동성애자들은 순결한 기독교 정신에 위해되어 억압받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순결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그리고 혈통주의는 동성애자들의 성적 취향을 신이 주신 성정체성을 반하는 반역자나 범죄자로 취급하게 되었다.

산업자본주의가 태동되면서 대가족의 해체, 핵가족의 등장은 더더욱 가족이라는 것이 노동력 재생산의 근간을 이루어나갔다. 자본문명의 사회 속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하게 되고, 그들은 은밀한 거리로 나서게 되었고, 그들의 성억압은 바로 사회, 법률적 억압으로 질시를 받으며, 사회노동으로부터 제거되어 나갔다. 동성애자라고 밝혀지는 순간 그들은 분절된 노동조직 속에서 조차 자신의 발을 내딛을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사회심리적 부적응을 겪게 되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타당하였다. 지금도 국내에서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순간 은밀하게 감행되는 집단적 조직적 배타적인 폭력이 난무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트렌스젠더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얼마전에 청소년을 이성애적인 진정한 성편향과 자유의 억압으로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동성애사이트를 청소년 유해사이트로 지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청소년들의 성정체성의 혼란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그들의 입맛에 맡는 교육을 강행함으로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온존하려는 작태에 불과하다. 정말 그들은 성정체성이 언제부터 혼란이 오고 심리적 부적응성을 겪으며, 사회적으로 배타당하는 것을....

그들의 인권운동은 사회노동으로부터 완전히 배타당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진보운동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권의 문제, 더 이상 보수적인 모습 속에서는 자신의 인권조차 말살되어 가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의식과 지배체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이고 자위적인 운동으로는 결코 자신의 인권을 지킬 수 없다. 국내에서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그리고 그들의 성적 취향에 전면적 도전장을 내고 있는 자본주의 아성에 대한 패권적이고 야만적인 보수의 아성인 반미투쟁으로,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성적 억압을 인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전세계적인 동성애자와 트렌스젠더들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지식인 노동자든 육체노동자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현장으로부터의 소외와 더 나아가 분절된 노동, 상품으로서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동자 계급운동과 함께 나아가는 것 외에는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들의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고 보호받고 자유롭게 자신의 세대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목숨밖에 없다"라는 외침은 동성애자들이나 트렌스젠더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과감히 선택했었던 의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입지로부터 배타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지를 선택했던 것만큼의 의지외에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잃을 것은 정신이 없는, 영혼이 없는 몸뚱아리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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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1/30 [20: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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