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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낯설게 하기] 사랑
 
서현   기사입력  2002/01/30 [16:06]
- 국가와 종교의 연애담 -


{IMAGE1_RIGHT}'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중근의 독백이다.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 일필휘지 이를 써내려 갔다. 경술년 삼월 여순 감옥에서의 일이다.

한편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명 조국을 위해. 박정희는 이 말을 감옥이 아닌 청와대에서 했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는 '네 생명 나를 위해'를 완곡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안중근의 '위국헌신 군인본분'과는 달리 박정희의 '내 생명 조국을 위해', 아니 '네 생명 나를 위해'는 독백이 아닌 지시였던 셈이다.

세월은 흘러, 안중근의 독백은 급기야 저급한 선동구가 됐다. 지난해말, 한 노인이 외치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들으며 나는 이를 깨달았다. 노인은 안중근과 일본군 간수 지바도시치(千葉十七) 사이의 일화를 얘기했는데, 그 도중 갑자기 우렁찬 소리를 내질렀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노인에 의하면,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국가를 위해 몸바쳐 헌신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의미다. 모두가 알 듯, 몸을 바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가를 위해서는 타인의 죽음이든 자신의 죽음이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을 내뱉은 그 노인은, 놀랍게도 승려였다.

불가와 인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나는 불교가 불살생(不殺生)의 종교라고 들었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은 매우 엄격해 육식을 금하며, 어떤 수행자들의 경우 들판의 풀을 밟지 않을까 그 걸음걸이를 삼간다고 들었다. 또, 위로는 부처를 섬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들에게는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이 있는데, 그 첫째는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衆生無邊誓願道)는 아름다운 다짐이라고 들었다. 이에 감동하는 나는 한번 생각해본다. 불자가 해야할 일은 외려 중생들을 폭력과 전쟁의 온상인 국가주의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이 아닐까. 미국의 전쟁을 지원한다며 배 한 척을 띄우는 국가와 그 국가에 헌신하는 중생들은 이들 불자에게 가장 무거운 숙제는 아닐까. 이를 외면하고, 눈먼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선동하는 것은 혹, 파계가 아닐까.

{IMAGE2_LEFT}생각과 질문은 그러나 한 지점에 이르러 막히고 만다. 모든 질문을 부질없게 하는 그곳은 바로 기독교다. 이 종교는 한때, 함석헌이 말했듯, 통사람(全人) 예수의 종교였다. 통사람 예수는 세상과 인간사의 모든 한계와 모든 울타리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웠던 존재다. 그는 신분을 뛰어넘었으며, 율법을 초월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속박과 착취와 지배들과 정면으로 대립했으나, 그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었다. 그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했으며, 원수들과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허나, 다 지난 일이다. 박제가 된 예수는 이제 새 신분과 새 율법을 만드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가련하게도 그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에게 경배 받고 있으며, 세상과 인간사에 둘러쳐진 각종 한계와 울타리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예수를 이용하는 자들의 결론은 전쟁이다. 그들은 일흔 번씩 일곱 번 폭격했으며, 스스로 만든 원수들과 스스로 핍박하는 자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여기에 어떤 진지한 신학적 사유나 의문은 과분하다. 부질없는 짓이다.

듣기 거북하겠지만, 아무래도 두 종교는 현재 정신분열 중인 것 같다. 아니라면, 지장보살, 지장보살, 중생에게 합장하는 승려가 같은 중생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외치는 일을, 그리고 기독교인임을 공언하는 부시와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의 무감각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이들은 부인할 것이다. 혹 당신이 종교인이라면, 정신분열이라니, 격하게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녕 부인과 분노가 그토록 완강하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종교는 사랑에 빠져있다.

소리소문 없었지만, 국가와 종교는 분명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 부처의 때와 예수의 때, 그리고 잠시나마 종교가 민중에게로 눈을 돌렸던 몇몇 반목의 때를 뒤로하고, 이들은 마침내 서로에게 돌아온 것이다. 화해는 쉬웠고, 바야흐로 열락의 시간이다. '형제'의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기쁨과 환희는 끝이 없고, 광란의 예배는 미친 듯 계속된다.

추신. 세상을 전체와 개인의 대립으로 보고 어느 한편에 극단적 지지를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도 그것을 안다. 하지만 전체의 횡포와 전횡이 기세를 올릴 때, 개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해 외치는 것은 일정정도의 정당성을 가진다. 또한 이는 사회 전체를 고려할 때도 필수적인 일이다. 전체가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사회, 개인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사회는 둘 다 같은 만큼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종교가 개인에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종교를 필요로 하는 이는 개인이지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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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1/30 [16:0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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